지지 않는 마음

by 헤븐

민님. 정돈된 공간에서의 홀가분함을 느끼셨을까요. 올해 잘한 일 중 단연코 상위에 든다 하셨던 정리 컨설팅을 받기로 한 그 결심에 저는 박수를 보내고 싶었어요. 생각은 행동으로 번지기 마련이죠. 정리에 대한 결단과 동시에 실행까지 착착. 사실 움직임에도 용기가 필요한 법일 테니까요. 편지를 읽으며 이곳저곳 정리하느라 분주하셨을 , 그러나 무척이나 뿌듯해하며 기뻐하셨을 민님의 홀가분한 시간을 잠시 상상해보았습니다. 살면서 사실 참으로 중요한 게 바로 정리 아닐까 싶기도 해요. 시간이 흐르는 만큼 물건도 쌓이고 기억도 만들어지고 그래서 가득가득 채워지기만 한 삶 속에서 우린 그래서 더더욱 정리라는 것을 잘하는 습관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으니까요. 예컨대 마음 정리, 생각 정리. 기억 정리 물건 정리 등, 비우고 버리고 다시 잘 채워가는 그런 연습을 여러모로 말이죠.



저는 정리를 자주 하는 편이긴 하지만 자주 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또 다른 영역 같아요. 그래도 이것 하나는 분명히 믿고 있어요. 잘 하진 못해도 자주 하는 습관을 만들다 보면 조금씩 스스로 수완이 생기며 언젠가는 잘하게도 될 것이라는. 그래서 언제부턴가 나름 혹독한(?) 정리 훈련을 익히려 노력하는 제가 있었네요.. 그렇지만 절대 아직 정리를 잘한다고 말할 수 없는 저라는 걸 알아요. 친정어머니가 방문하실 때는 언제나 그녀의 손을 타게 되는 공간 곳곳이 거의 업그레이드되는 수준인지라 언제나 부족한 나를 발견하거든요. 그래서일까요. 어머니 앞에서는 무언가 항상 위축되는 묘한 기분에 빠지곤 해요. 그렇지만 또한 알고 있어요. 그녀의 존재는 내 생에 더없이 커다란 확실한 영향력... 그런 존재라는 것을.



photo-1600172454520-134a542a2255.jfif 엄마가 다녀간 자리는 확실히 달라서... 반대로 그녀의 손길이 닿지 않은 날을 상상하면 괜히 울고 싶은 날이 있어요....



민님께서는 정리하는 산뜻한 마음으로 올해의 마무리를 짓고 계시다면 저는 부끄럽지만 이 자리를 빌어서 좀 털어놓고 싶습니다. (역시 편지는 무언가 고백을 하게 되네요) 어떤 마음에 대해서요. 사실 요즘의 저는 연말이라는 핑계에 기댄 채 한껏 헝클어진 상태입니다... 확실히 마음과 감정에 져 버리고 말았다는 열패감에 당도해요. 정리조차 되지 못하는 이 기묘하게 꼬이고 엉망진창 질퍽거리는 감정상태를 어떻게 말끔히 정리할 수 있을까요. 사실은 '정리하다'는 측면에서는 비슷할 수 있으나 전혀 다른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셈이죠. 물건은 버리면 눈에 보이지나 않지 어디 감정이나 마음은 그러할 수 있을까요... 그리하여 산뜻함까지는 전연 바라지 않아요. 그저 있는 데로 난장판이 되어 버린 듯한, 그래서 정리조차 쉽지 않은 이 마음의 원천은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를 생각해보는 중이어요. 그러면서 계속해서 쌓이고 쌓이다 기어코 바닥을 뚫고 지하 1층에서 한 5층 정도까지 우르르 내려가 있는, 무언의 무거운 무력과 분함이 공존하는 감정. 연말을 잘 마무리 짓고 상쾌하게 새로운 '첫날'을 맞이하고 싶은데 솔직히 자신이 없어요. 억지로 쥐어짜 내듯 상쾌한 '척' 할 수 있는, 거짓말에 익숙한 인간도 아닌지라...



사실 혼자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런 몇 가지 이유들을 생각해냈어요. 올해를 살아내며 제 마음에 꽤 많은 구멍이 생긴 게 아닌가 싶은 것이에요. 누군가를 돌봐야 하기에 정작 자기 자신을 돌보지 못한 채 그대로 살아가는 인간. 그런 인간들이 잘하는 자기 합리화로서는 열정이라는 명분과 포장에 기댄 채 꾸역꾸역 무언의 절망과 힘듦을 혼자서 있는 힘껏 감내하죠. 한편' 잘 사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려 무언가를 자꾸만 이루려 하며 애쓰지만 그러면서 구멍은 더 커질 뿐이죠. 그러다 방전이 된 어느 순간 어리석게 도망치는 것이에요. 아무것도 제대로 이뤄내지 못한, 이렇게 망가진, 못났다 느껴지는 자신일지언정, 그 모습 자체를 열렬히 환영하며 인정해 줄, 사랑할 누군가가 있을 거라는 비틀거리며 갈망하는 마음... 그런데 사실 알고도 있어요. 헝클어진 채 구멍 난 마음으로 인한 갈망과 갈증은 사실 스스로 만들어 낸 환상이었음을. 망가지고 뚫린 공백을 채울 수 있는 건 바로 자기 자신일 뿐이라는 것을. 아무도 도울 수 없다는 것을. 그 누구에게도 함부로 도움을 구해선 안 된다는 것 마저도...




22-Tired-1885.jpg @Christian Krohg, Trett (Tired) 1885



지쳤다는 건, 한편 그만큼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일 텐데. 그렇다면 저는 사실 지칠 자격이 있는가 라는 자문을 해보곤 해요. 나는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일까라고. 확실히 '예스'라고 답할 때도 있지만 - 새벽에 도시락 만들고 두 아이 평일에 혼자 키우며 운동도 꾸준히 하면서 몇 가지들의 '일' 들을 만들어서 혼자 꽤 잘 해내고 있는 모습의 자신과 마주하노라면 - 한편으로는 여전히 '노'라고 대답하는 저도 있어요. 왜냐하면 정말 부끄럽고 못났지만... 저는 가끔 살기 싫어질 때가 여전하거든요.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죽고 싶다는 바보 같은 생각에 대해서는 얼추 개선이 되었을 뿐이지 - 자주, 종종이라는 부사에서 가끔, 아주 가끔이라는 빈도수의 변화가 있을 뿐 - 사실 아주 없어진 건 아닌 상태라, 정말 지하를 뚫고 지나가는 어두운 감정에 휘말리게 되면 제 자신이 저를 놓고 싶어질 때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 그러니 제겐 자격이 없는 셈이죠. 정말 열심히 '사는' 인간은 사실 생의 의욕과 열망이 앞서야지 죽음의 의욕이 샘솟진 않을 테니 말이죠. 에로스가 타나토스를 이기길 바라는데 여전히 제 마음 한 구석에는 타나토스가 확실히 에로스를 눌러 버리고 마네요. 물론 그 에로스조차 어떤 면에서는 확연히 소멸되어 가는 중이지만...



미안해요 민님. 연말에 이런 형편없이 불안하여 붕 떠 있는 마음을 고백해 버리다니. 제가 아직 어떤 면에서 정리를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단 증거겠어요. 그래도 그 '정리'라는 것을 위해 저는 며칠 전부터 어떤 마음을 생각해냅니다. 바로 '지지 않는 마음' 이예요. 한 해가 다 지나가는 이 시간 앞에서 그럼에도 제가 스스로 사랑할 수 있었던 몇 가지의 장면과 순간들을 열심히 기억해내면서... 그것들을 떠올리며 이겨내고 싶을 뿐이에요. 형용할 수 없는 제 마음속 무언의 불안과 분함, 실망과 슬픔이라는 생각을. 잘 이겨내며 그렇게 지지 않고 싶다는 생각과 마음은 결국 행동을 만들어 낼 거라고 믿고 있어요. 믿음이 얼마나 유효하게 일상에서 작용될 진 솔직히 확언하기 힘들겠지만. 비틀어진 마음과 괜한 상상에 부디 지지 말고 한때 스스로 믿었던 투명한 진심과 다정한 열정을 다시 되찾고 싶다고. 그렇게 지지 말자는, 그런 지지 않는 마음....



photo-1528351655744-27cc30462816.jfif 향초가 제 구실을 하려면 심지가 짧아질, 타서 없어질 각오를 해야 하죠. 새삼 그 향초가 얼마나 위대해 보이던지...



요즘 향초를 매일 켜 두고 그 앞에서 멍하니 타들어가는 향초의 심지 끝을 바라보며 책을 읽어요. 요즘 다시 손에 든 건 페르난도 페소아의 '불안의 책'인데요. 그가 죽기 하루 전에 썼다던 마지막 문구는 바로 이것이었대요.



I know not what tomorrow will bring

나는 내일이 무엇을 가져다줄지 모른다



내일이라는 시간이 어떤 형태로 다가올지 알 수 없지만. 마냥 불안하고 마냥 기대하다 끝내 슬픔과 마주한다 할지언정. 버려야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생기는 것처럼 저도 여러모로 올해의 시간과 마무리에 마주하는 기묘하게 불편하고 불안하며 한껏 피로했던 상태와 마음을 잘 버리고 싶어요. 그래서 지지 않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 마음을 잘 보내버리며 다시 잘 맞이하고 싶은 것...잘 보내야 보다 괜찮은 내일은 그렇게 다가올 테니까요. 오늘 이 편지를 쓰면서도 내내 제 옆의 향초에서 나오는 허브 레몬 향기가 참 좋은 지금, 미리 새해 인사를 이렇게 보내 봅니다.



내일이 무엇을 가져다줄지 우리는 정말 알 수 없을 테니.

다가오는 새 날 어떤 시작들 앞에서, 좋은 향기와 뜨거운 열정이 우리가 마주할 슬픔들을 이기기를.

이길 수 없어도 지지는 말기를.



- 심지가 타들어가는 것을 감내하고서도 좋은 향기로 힘껏 타오르는, 그 향초를 닮고 싶은...헤븐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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