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븐님. 어느덧 12월 끝자락이에요. 쓰면서도 믿기지가 않네요. 이제 며칠 있으면 새해라니 말이에요. 거리 두기로 연말 특유의 분주함은 덜하지만 그래도 연말은 연말. 마음이 바빠져요. 새해가 오기 전에, 한 살을 더 먹기 전에(아. 제일 먹고 싶지 않은 것이죠!)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무엇을 정리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음. 한 해를 정리하는 것이죠. 헤븐님도 연말 결산을 한다고 하셨죠? 한 해를 돌아보며 가장 잘한 일, 못한 일, 올해의 책 베스트 top 3 등 을 꼽으며 총 결산한다고 하셨는데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궁금하네요.
얼마 전 저는 한 해를 정리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물리적인 정리를 했어요. 대대적으로 집 정리를 했거든요. 헤븐님처럼 그때그때 살뜰하게 정리하는 분은 조금 어리둥절할지도 모르겠어요. 집 정리는 늘 하는 거 아닌가? 하고 말이에요. 저는 몰아서 정리하는 편이라서 한번 시기를 놓치니 걷잡을 수 없이 물건이 쌓였어요. 4인 가족이 5년 넘게 산 집에는 묵은 집들이 쌓이고 쌓여 창고를 가득 채웠고요. 아이들 커가는 속도에 맞춰 안 쓰는 물건들을 그때그때 정리해야 하는데 저의 속 터지게 느린 정리 속도가 따라갈 수 없었어요. 필요와 상관없이 온갖 물건들이 혼재된 채 방치되어 있었지요. 혼자서는 집안을 한꺼번에 정리할 수 없기에 도움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정리 전문가 자격증을 가진 지인의 소개를 받아 정리 컨설팅을 받았답니다. 말이 컨설팅이지 이삿짐센터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와서 이사 도와주는 것처럼 해주는 정리 서비스였어요. 이런 서비스도 다 있나? 하시려나요. 물건의 각을 맞춰서 정리하는 헤븐님에게는 영 낯선 세계 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정리 서비스를 받기로 한 건 획기적인 결단이자 사건. 올해의 잘한 일 top 3에 드는 일이었어요!
정리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분류, 판단과 선택에 관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여기서 물건을 처리하는 기준은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저의 경우에는 쓸모와 아름다움, 그리고 감정인 것 같아요. 더 쓸 수 있는지 없는지, 보기에 좋은지 아닌지, 그리고 얼마나 물건에 애착을 갖고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서요. 50 리터 쓰레기봉투를 가득 채워 여러 개를 버렸어요. 어후. 얼마나 많은 쓰레기가 나오던지... 보기에 좋지만 더 이상 쓰지 않는 물건을 '아름다운 쓰레기'라고 하죠? 집안 곳곳에 숨어있던 아름다운 쓰레기를 적발하여 다 내보냈어요. 그동안 아름답다는 이유로 데리고 있었다면, 과감히 쓰레기로 정의하고 내보낸 것이었죠. 정리 컨설팅에서는 버리기를 '배출'이라고 부른다는 걸 알았어요. 우리 몸에 필요한 영양소를 흡수하고 불필요한 것들을 내보내는 일을 배설이라고 하듯 이제 집안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내보내는 일을 배출이라고요.
배출이 쉽다면 정리가 쉬웠겠지만 무엇을 배출할지 결정하는 일은 너무나 고되었어요. 제가 정리를 못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겠다 싶었습니다. 배출이 안 되는 집. 그래서 순환이 안 되는 집. 숨 쉬고 머물고 싶은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배출을 위한 과감한 결단이 필요한데 결단하기가 어려웠던 것이죠. 헤븐님에게 끝까지 버릴 수 없는 것이 기억이라고 하셨죠? 제가 마지막까지 배출할 수 없는 것은 사진, 카드 그리고 편지. 바로 ‘추억’이라고 분류되는 물건들이었어요.
추억 물건들은 기억의 통로가 되는 매개체 인지도 모르겠어요. 추억이라는 과거가 현재를 재구성하는 걸 경험해요. 저의 현재가 새삼스럽게 이해된다고 할까요? 어쩌면 저는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어떤 사건이나 일을 반복적으로 돌이켜 생각하면서 제 자신을 정의하는 것 같아요. 안 좋은 기억은 흘려보내고 기분 좋은 추억을 반복적으로 생각하며 그때의 느낌을 되찾는 것. 정신승리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배출하고 남길 것만 남기고 싶어요. 안 좋은 기억에 발목을 붙잡히기에는 내 발목에게 미안해져요.
대학 시절 사진, 결혼사진, 아이들 돌 사진, 생애 주기마다 기념하여 만든 앨범들이 추억이라고 이름 붙인 박스에 보관되어 있어요. 지금 보면 작은 성취의 흔적이고 덕분에 웃을 수 있던 순간들이었어요. 저는 매일 해야 하는 일상의 압력에 휩쓸려 잠시 잊고 있었어요. 나에게도 순수하게 열정적이고 전적으로 기쁜 순간들이 있었다는 것을요. 이러한 순간을 꽃 같은 순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꽃 한 송이로 공간 분위기가 바뀌듯, 활짝 핀 꽃 같은 순간을 곁에 둔다면 시들었던 마음이 화사하게 피어오르지 않을까 생각해요.
정리기술을 말하는 책들을 살펴보니, 추억마저도 가능한 적게 남기고 버리라고 하더군요. 버려도 마음속에 남을 것이라고요. 어쩌면 제가 추억의 증거물들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추억을 소유하고 싶어서 인지도 모르겠어요. 나의 소중한 추억이 잊히지 않고 도망가지 않게 지켜주는 파수꾼으로서의 물건들이요. 하지만 저는 알아요. 제가 추억 박스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할 뿐 일상을 살아갈 때는 그 사실을 잊고 추억 박스를 드물게 열어보리라는 것을요.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말해요. 꽃을 따는 것이 소유하는 삶의 방식이라면 꽃을 바라보는 것은 존재하기의 방식이라고요. 그러니 프롬이 말하는 존재하는 삶의 방식을 따르려면 소유를 버려야 하는 걸까요? 추억마저도 말이에요. 그렇다고 무소유를 말하지는 않아요. 인간인 이상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기능적 소유가 있으니까요. 존재 양식의 삶을 실천한 인물로 석가모니와 예수를 예로 들고 있으니, 제 인생에서 존재 양식의 삶을 실천하기란 평생 불가능하리라 확신합니다. 저처럼 견물생심으로 가득한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래요.
그렇다고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현재를 더 쾌적하게 살기 위해서 추억조차 내보내야 한다면 저의 추억 박스들을 자유롭게 해 줘야겠지요. 존재 양식의 삶에 도달할 수 없을지라도 삶의 곡선이 소유보다는 존재로 수렴하면 좋겠어요. 무엇을 소유하느냐가 삶의 가치관이고 무엇을 갖고 있느냐가 어떻게 사느냐와 같다면, 무엇을 버리고 남길지에 대해 더 신중할 수밖에요. 그렇다면 제가 불필요한 물건에 치이지 않고 필요한 물건들과 상쾌하게 지낼 수 있겠지요? 정리정돈이 현재에 집중하며 살기 위한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 정리하는 마음은 끝까지 버리지 못하겠어요.
아, 저의 단어 채집 폴더에 있는 단어가 궁금하다고 하셨죠? 몇 개만 소개하자면, 아슴아슴하다, 부유스름하다, 정신적 따귀, 버성기다, 나른한 그리움... 적고 보니 맥락 없이 뒤죽박죽 모아놓은 느낌이네요. 흩어진 단어들이 버성기니, 단어들을 꿰어보면 여러 개 나온 추억 박스는 정신적 따귀에 버금가는 일이었어요. 어쩌면 그동안 이토록 많은 추억을 다 끌어안고 살았는가! 저의 아슴아슴하고 부유스름한 기억은 나른한 그리움을 부르고 그리움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이제부터 추억 박스를 가능한 비우는 연습을 하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인 오늘, 헤븐님은 어떤 추억을 만드셨을까요? 산타가 되어 선물을 준비하는 시간이 분주하지만 즐거웠을 것 같아요. 세심하게 준비한 선물이 둥이들에게 더 없이 기쁜 날을 선사했겠고요. 선물이 나중에 추억의 물건이 된다고 하더라도 현재를 빛나게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오늘의 기억이 어떤 글을 남길지 궁금해하며,
민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