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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ul 29. 2017

2. 나의 첫번째 '책' 이야기 #1

 독자가 아닌 '저자'가 되다.  

뭐가 그리 불안해서 혹은 기억하고 싶어서 줄기차게 써 내려갔었는지. 그때부터 내게 글자가, 문장이, 글이 주는 마법에 휩싸여, 지금의 나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는 걸 안다. 뒤늦은 깨달음? 한 글자 써내려갔었던 내가 있었던 그 시절, 그땐 내가 싫었는데, 사실은 난 나를 사랑했었다는 것또한 뒤늦게 깨달아, 여기 이렇게 잠깐이나마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오늘 잘 살면 그만이겠지만, 그래도 과거들이 모여 오늘의 내가 있다는 걸 알기에, 브런치를 시작하고 나선 예전의 습작 노트들을 다시 주섬주섬 꺼내 보니, 새삼 욕심이 생긴다. 그 빛나던 시절이 모여져서 하나의 이야기로 탄생되었음 싶어서....
바닥을 치는 삶에 다 떄려 치고 싶었으나, 그러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살아서 오늘이라는 시간의 내 이야기를 쓰고 있는 내가 그 과거에도 존재했기 때문이라는 걸 느끼기에 (아-이 글을 저장하는 저녁 8시의 사무실 공간, 너무 매력있어서 눈물이 나려 한다...)


소설이 좋았다. 

   그냥 장르 불문하고 (일반인이 이해하기에 난해하고 기이한 수준이 아니고서야) 읽는 것 자체에 흥미를 느꼈고, 사실은 등단이라는 청운의 욕심 어린 꿈을 품었었던 20대의 내가 있었다.


  그 시절에는 줄기차게 쓰고 또 써 내려가는 영문과 학생이 존재했다. 어느새 빠져들었던 것이다. 가랑비에 옷이 푹 젖어 들어가듯.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를 읽어 내려갈수록 마주하는 그 세계관들에 자연스레 매료되었고, 때때로 현실도피, 일탈, 공감 등의 감정들이 성숙해 지는 나의 시간은 소설 속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사실 오래된 책을 넘기는 빠닥한 소리, 그리고 종이냄새, 그런것도 좋았었어. 이상한 취향의 여대생이었지 나란애...


필요에 의한 소설 읽음도 거부감은 없었다.   

  에드거앨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라든가 어셔가의 몰락을 과제와 논문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읽어내려 갔던 때에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감히도 일본서로 도전정신 십분 발휘하여 엉덩이에 힘 딱 주고 크나큰 인내심을 갖고 읽으려 했었던 풋풋한 나날들.


  이해도의 깊이는 수준 미달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한 권의 책을 처음 접하여 완주해 내려는 순수한 용기가 마음에 남아 있는 그 때. 참 사뭇 그리워진다. 지금 와서 그렇게 읽고 쓰라 해도 쉽게 용기 내지 못할 나일테니깐.


  그냥 소설이 좋았고 지금도 싫지 않다. (다만 관심영역이 좀 바뀐 정도라고 해 두자) 제목 아래 몇 개의 프레임을 둘러싸고 가상의 인물들이 맞닥뜨리는 에피소드들, 그리고 그들의 세상에 빠지는 단계는 꽤 쉽게 찾아오곤 했었다. 그러다가 조금 더 깊이 파고 들다 보니 어느새 내게는 제멋대로 작가가 설정해 놓은 모든 상황을 부정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   


‘이 장면에선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었어! 아니 도대체 왜’ 라며 작가에게 반기를 들고 질문세례를 퍼붓고 싶었을 때. ‘나라면 그렇게 설정하지 않지. 나라면….나라면?’  


독자에서 저자로 변하는 순간

  그때부터였을 거다. 읽는 주체에서 쓰는 주체로 변신하는 순간을 맞닥뜨린 21세 무렵의 나였다. 그땐 몰랐겠지. 앞으로 내게 일어날 창작과 고배의 고통(?) 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지를 절절히 경험하게 될 것을.


나의 욕심이 한껏 서려진 종이들은 꽤 유치했었지, 그치만 순수했었으니깐. 오히려 지금은 그리워...


  당시 나는 글을 대하는 잘못된 오류에 빠져있었다. 지금 생각하자면 너무 미성숙 했다. (지금도 그닥 성숙한 편은 못되지만) 문장 안에 진심을 담아내어 글을 쓴다는 걸 모른 채 그냥 욕심껏 써 내려갔던 나날들이다. (부끄럽다 그 과거가 그러나 부끄럽기 이전에 사실 그립다. 그때의 순수함이)   


  아무 영감과 감동 없이 그저 쓰기에 욕심 냈었던 순간이 있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알 것도 같다.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는 건 사실 이 삶을 살아가는 ‘나의 현재’ 이야기들이 저 밑 어딘가에서 움직여 누군가의 심금을 울리지 않으면 절대 진심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그때 난 너무 어렸고 욕심만 많았고 그래서 행동만 앞섰었다.   


‘내 책을 만들어 내고 싶어. 아니 내가 만든 이야기들을 읽고 사람들이 공감해 줬음 좋겠어. 근데 뭐가 문제인 걸까. 왜 재미없다고 하는 거지. 왜 알아봐 주지 않는 거지..’  


  내 마음을 주지 않았는데, 다른 이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대단히 욕심어리고 유치한 생각에서 탄생된 문장이 좋을 리 없지 않은가. 그 당시의 각종 장/단편 소설의 공모전을 위해 써 내려가는 글은 당연히 호응을 받을 리가 없었다는 걸 왜 그떈 몰랐을까.


모든 일이 그러하듯, 욕심과 허상과 허구만으로 가짜가 진짜처럼 보이려 하면 할수록 그 가짜가 드러나는 법인데...     


어쩌면 때론 가짜의 모습도 연습이 필요했나봐. 감춰야 했어서... 진짜 내 모습은 너무 나약했으니깐.


그래도 그 시절의 나 또한 사랑했었다.   

  그저 읽어 내리는 게 사람과 이야기 하는 것보다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던 평범한 영문과 2학년 학생의 순수함과 열정이 강했다고 합리화 해 두자. 어느 순간 읽어 내리는 문장들을 비틀고 꼬아서 바라보는 시선이 생겼을 때. 읽는 주체에서 쓰는 주체로 바뀌어 버리기 시작한, 나의 꿈에 부풀기만 했었던 20대의 처절한 창작을 향한 시작을 알리는 순간, 나의 ‘소설 쓰기’는 그렇게 시작 되었다.

   

‘아쉽지만 이번 기회엔 모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소중한 원고, 투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짜 아쉽기는 한건지. '쳇'이라는 콧방귀 한번 내뱉고 쿨하게 뒤돌아서기엔, 그 시절의 실패가 너무 아팠다.

 메시지를 주는 공모전 혹은 출판사는 꽤나 예의 바르고 겸손한 편에 속한다. 투고를 했음에도, 기획서를 작성했음에도 그저 묵묵부답인 곳들이 허다했으니깐. 처음 1년은 꽤나 지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여전히도 난 그냥 한 달 두 달 계절이 바뀌는 시간들 속에서 그냥 읽고 쓰고 또 썼으며, 두드리고 또 두드림을 반복해 나갔다.


  그러나 두드리면 열린다는 옛말이 내게는 절대 먹히지 않은, 그래서 거짓말의 문장으로 자리했었던 시절이었다. 암담했다. 그리고 포기하고 싶었다. 실제로 한동안은 아무것도 쓰지 않고도 살았다. 지긋지긋했었으니깐.


근데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 그런 무기력에 더 빠지게 되서 무섭더라...그러면 안되는데 라면서도 빠지더라..

 

 여기서 쓴다는 건 ‘새롭게 탄생된 창작’을 의미하는데, 나의 세계관에서의 창조된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는 몇 십 번을 고치고 새로 쓰고 보여주었음에도 누군가의 흥미를 끌어 당기기에는, 내공은 턱없이 부족했었던 것 같다. 물론 내 글에 관심갖지 않아준 세상만 있었던 건 아니다. 꽤 손쉽게 (운이 좋았다고 하고 싶지만) 글쓰기, 작문, 이런 류의 사연 공모전은 꽤 자주 있었으니깐. 그러나 그건 나의 이야기, 아주 짧은 에세이에 속할 수준의 사연이었지, 소설이 아니었다. 난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여대생이었고 그런 내게 등단이라는 문턱은 그냥 뚫리지 않은 바위벽이었고그 무렵 가상의 현실 대신 나는 진짜 나의 현재를 더욱 집중해서 쓰기 시작함을 결정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차라리 소설가가 아닌 에세이스트로 진작에 전향해더라면 ! 8년이 흘러 첫번째 책의 저자가 된  나를, 좀 더 일찍 만날 수 있었을까?)  


소설가이자 구직자입니다.   

  대학교 4학년이 되던 무렵, 내게 자기 소개서와 소설쓰기는 꽤 비슷하면서도 상당히 다른 글쓰기였다. 현실의 팩트를 꽤나 객관적인 검증들과 함께 논리 정연하게 그러나 감동과 재미라는 임팩트를 드러내야 하는 게 자기소개서라면 (그런 면에서 소설과 뭐 비슷하겠지만) 소설은 그것을 뛰어넘는,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함과 아름다움’이 자리하는 느낌의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현실은 다큐였지, 문학이 아니니깐


  사실 소설만 쓰고 인문 서적만 탐독하고 고전을 파고 들며 여전히 마음에 자리한 ‘등단’의 욕심이 있었던 나였었다. 그러나 졸업해서도 이 짓(?) 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가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한 꽤 깊고 쓸쓸한 나와의 대화를 주고 받는 시간들 속에 나는 어느새 ‘쓰는 사람’에서 ‘그냥 읽는 사람’으로 다시 변해가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글을 쓰며 먹고 사는 일이 꽤 비현실적인 직업 혹은 일이라는 걸 안다. 

  대단히 쉽지 않은, 아주 비합리적이고 비실용적인 일이니까 말이다. 막막함과 불안감에 포기해버릴까 싶다가도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나만의 무대에 데뷔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고 꽤나 고군분투했던 졸업반의 나였다.   


‘아….공모전이다. 시나리오…?’  


  소설과 시나리오는 엄밀히 이야기가 구성되는 프레임은 달랐겠지만, 무식해서 용감했던 내게는 그게 그거였다. 떨어질 걸 염두 해 두고 썼기 때문이었을까. 모든 걸 다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찾아온다더니, 그 시크릿이 실현되는 첫 번째 순간이었다.   


입선, 처음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었던.

  아주 작은 지방의 어떤 연극단에서 공모하는 시나리오 공모전이었다. 당시 상의 크고 작음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보여 줬어서. 그것 만으로도 내게는 큰 성과였고, 포기 하지 말라는 마지막 신호 같은 것이었다.  

  그 덕분에 포기하고 싶지 않았나보다. ‘글’에 대한 집착증은 그 덕에 직장인이 되었어도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내,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어른의 글쓰기   

  취업을 하면 어른의 시작이라는 굉장히 이분법적이고 어설프며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을 했었다. 조직이라는 곳에 속하고 한 달에 한 번, 내 노동과 시간의 대가로 인한 월급이 지급되는 직장인이 되는 순간, 나는 어른 같았고 어른처럼 행동하려 노력했다. 사실은 어린아이였고 (그건 때때로 아직도) 아직도 미숙한 데 말이다. 그래서 글도 어른처럼 쓰려고 더 노력했었다. 25세가 지난 이후의 내 습작노트속 글들은 참으로도 '화려'한 미사여구, 있어보이게 써 있는 걸 지금 발견하니 아, 얼굴이 화끈거린다. (지금도 그 습관이 남아 있는 탓에, 여전히 미성숙하고 부끄러운 건 매 마찬가지겠지만)


어른이 아닌데 어른인 척 했었던 나를 기억해... 그것도 나니깐 지금은 또 그립고. 그 때가..


문학 소녀 

  평생 가지고 가고 싶은 나의 수식어다. 소녀라는 단어를 쓰기 참 민망하지만 나는 사실 어른이 되고 싶었으면서도 소녀이고도 싶었다. 이미 서른을 꽤 넘긴 (33이라는 숫자에 ‘꽤’라는 표현을 쓰기엔 뭔가 좀 억울하지만 어쨌든) 나이에도 불구하고 '문학 소녀'라니.  (오글 열매 오드득) 그래도 순수한 나의 또라이 열정이 참 좋았고 지금도 변함은 없다.


꿈을 꾸고 있으면 그 안에서는 착각이더라도, 완벽히 행복한 나라는 걸 안다.

  건조하고 삭막한 공간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기 시작한 어른인 척 행세했던 신입사원때,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고 때론 나라는 사람의 본연의 모습을 숨기며 살아가는 시간들. 우유에 적시지 않은 채 건조해진 식빵 2개를 한꺼번에 입 속에 집어넣는 느낌이랄까. 퍽퍽하고 꽤 고단한 첫 직장생활은 출퇴근 4시간의 왕복 시간 덕에 지쳤으나, 그럼으로 인해서 틈틈히 무언갈 해내는 것에 익숙하기도 했었다. 그 틈틈히 해냄에는 '꿈'도 있었다. 여전한 등단의 (빌어먹을 포기하지 못하는) 꿈....


 나름의 ‘여자 직장인 잔혹사’를 겪어가면서는 더더욱, 어른인 척 강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가면을 쓰는 연습을 한다. 그러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어쩌면 꽤나 꾸준히도, 꿈을 그리는 내가 존재한다는 걸  생생히 마음에서 그리움을 버리고 싶지 않은 나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금요일의 왕복시간은 약 4시간이었어. 정말 파김치였는데...그때 나 되게 치열했었거든. 근데 지금도 또 반복되는 게 느껴져.


퇴근을 하면 머릿속의 스위치가 한번 꺼진다. 그 순간 ‘진짜 나의 현실’이 시작된다.   

 내일 또 반복될 현실 따위는 필요 없을 정도로, ‘죽기 전에 내 책 만들기’라는 목표 안에서 살았던 때가 있었다. 20대의 절반을 지나 후반을 향해 달리고 있었던 28살의 내 마음이 내게 말을 걸었다.  


‘지금 무슨 쓸데 없는 생각을 하고 있니....책 만들어야지. 그래야 끝낼 수도 있지'


 첫 직장을 참 힘들게 다니며 결혼을 하고 싶을 정도로 나름 사랑했다고 믿었던 연인에게서 이별 통보를 받은 실연당한 여자. 그리고 일년도 채 되지 않은 연애 아닌 연애 기간을 거쳐 쫒기듯 성급히 한 결혼. 그리고 유산. 고통, 상실, 비애, 불가능한 어떤 것을 향한 욕망과 좌절, 그리고 절망. 이 모든 감정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내리는사이 내 마음엔 부작용이 싹트기 시작했던 것 같다. 오후 휴가를 무작정 내고 마포대교를 건너가는 그 순간의 나는 그랬었다.  


  그러나 그렇게 삶을 끝낼 수 없었다. 나란 사람이 얼마나 연약하고 병적인 꿈에 대한 집착이 있는 바보였는지, 문득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고 다시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장장 1시간을 내내 그렇게 우는 여자였었다. (정말 인생에 지우개가 있다면 싹 다 지워버리고 싶은 시간들)   


 인연은 꽤 엉뚱한 곳에서 찾아오는 걸까. 

  이젠 그냥 쓰는 데 이골이 났는지, 써서 '남겨야' 했다. 세상에. 나란 여자가 살았노라고. 꽤 치열하게. 그러니 당신들도 함께 치열하다가도, 나처럼 지치지 말아 달라고. 내가 지쳐서 내가 아닌 누군가들은 지치지 않기를 바라는, 이 무슨 초딩 발상이었는지.


 내가 붙들고 있는 집착의 대상을 언제 놓을 것인가를 고민하다가도 놓지 못하게 되는 나를 발견한다. 그럼 나는 어떻게 그 상황을 받아들여야 되는 걸까. 어른의 시간을 흘러가보면서 마주할 수 있는 가장 힘들고 풀 수 없는, 숙제일 지 모르겠단 생각만 가득한 날들의 어느 즈음, 정말 상상하지 못한 장르에서 나는 첫 책을 발행해 내게 된다.

되게 고마웠어요. 책이 나온 다음 날, 이 곳에 꽂혀질 영광을 준 강남의 카페 어느 서가에서의 첫 소개..
다음 이야기엔 이어서 책 출판에 대한 에피소드를 좀 더 적어 보고자 합니다. 여간 속상한 지금입니다. 다소 글이 길어지다 보니 집중력이 저도 떨어지네요. 그래도 이해해 주세요. 고맙습니다.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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