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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Apr 12. 2018

후졌습니다. 오늘 나...

송두리째 흔들리진 않지만. 그럼에도 흔들리는 저는 후졌습니다 여전히.

편지 열여덞) 나 자신이 초라하고 후져 보일 때. 이 감정 어찌 씻겨 내리죠 


엄마. 저 오늘 출근 잘 '못'했습니다. 

 네. 어떻게 이야기를 써 내려가야 할지. 아마 이 편지는 당신께 쓰고 나서 두고두고 또 후회와 한숨, 혹은 원망을 한꺼번에 받아 마땅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어서 죄송합니다. 저는 토해내야 할 듯합니다. 오늘은 더군다나, 그러지 않고서는 못 버틸 거 같거든요.. 


 화가 났지만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조용한 저는, 여전히 화를 풀었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건 즉 이런 말이겠죠. 언제나 우울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한편으론 결코 행복하지도 또한 기쁘다고도 말할 수 없는 그런 기분 있잖아요. 사회의 기준 안에서 주어진 역할에 대해 정당하고 합리적이고 지극히 숨 막힐 정도로 논리적이고 현실적인 이유를 부여하며 살 아내 보지만. 엄마 때로 제 자신이 후지고 초라하게 여겨지는 그런 날. 그런 날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이렇게 조용히 도망치 듯 글을 써 내려가 봅니다. 


3년전 병원에서도. 엄마 사실 그랬어요. 혼자 글 썼어. 그 짧은 입원 기간에도....좀 살아보려고. 


 인정받으려 사는 건 아닐 테지만, 저는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들의 인정과 사랑을 갈구하나 봅니다. 

 당신과 그이가 세찬 비난까지는 아니었어도. 여전히 글 쓰는 시간과 아이를 돌보는 시간. 그 둘을 모두 동급으로 소중히 생각하는 저로서는, 당신들이 던지는 무언의 행동과 메시지들이 아프게만 느껴집니다. 네. 그 누구의 잘못도 없다는 걸 알아요. 모두 받아들이는 '제 마음' 탓이겠죠. 그렇지만 엄마. 당신의 말. 그리고 그이와의 대화는 여전히 비수처럼 제 마음에 날카롭게 침투합니다. 여전히 도... 


책.. 앞에 조금 읽어봤어. 더 안 봐도 되지. 
.... 응?
반이 내 이야기네.. 의견 정돈 구하면 좋잖아 내 이야기 쓴다는 거. 
.... 자기 얘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야. 물론 자기가 내 삶의 중요한 사람이니까.. 근데 그걸 허락 구해야 해?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튼.. 기분 좋지 않아. 책 그만 볼게 
.... 읽지 마요. 


 그이의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불편하게 애써 감추려던 슬픔이 다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대화를 대충 끊고, 저는 바로 지하실로 그대로 뛰쳐나가서 엉엉 울고 말았어요. 그런데... 그 일이 있자마자 얼마 못 가서 당신도 한몫 거들어 주시듯. 저를 찔러 주셨죠. 


책 다 봤다. 
.... 응.. 고마워 
너 뭐가 중요한지 생각 좀 하면서 살아. 지금 너한테 글 쓰는 게 중요해? 지애 미 찾는 애가 중요해? 
.... 생각하면서 살고 있어요 엄마... 제발...
지금 아니어도 되잖아. 아빠는 앞에 좀 보다가 못 읽으셨다. 이 책 니 신랑이 봐야 하는 거 아냐? 보기는 했대?
.... 
안 봐도 비디오야. 뭐 좋은 소리 듣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러고 사니 
.... 그렇게 사는 게 뭔데 
쓴 약이 몸에 좋은데 너는 왜 그렇게 바락바락 싸우려고만 들어. 엄마 말 듣지는 않고 
엄마 나는..... 싸우고 싶지 않아 다만 답답해서 그래. 이러고 사는 게 어떤 건데? 뭐가 중요한 건데? 
.... 아무튼 너 글 쓴다고 여러 사람 고생시키니까 하는 말 아냐. 
.... 내가 글 쓰는 데 다들 고생시키는 거야?
단적으로 봐. 니 글 쓸 시간에 애기 더 보면 좋잖아. 그게 엄마의 본분인 거야 
....... 본분....


더 이상 대화가 진전되지 않았죠. 

 본분의 사전적 정의를 까먹어서였을까요. 저는 그날 밤. 한 숨을 못 자고 내내 생각에 잠겼습니다. 본디의 신분을 본분이라고 한다죠? 알아요 엄마. 충분히 알고 있어요. 당신이 말하는 그 빌어먹을 '본분'의 정의를. 아니 어쩌면 이해하지 못하는, 이해하고 싶지 않은 모지리가 바로 저일지도 모르죠. 원하든 원치 않든 '엄마' 역할이 주어지고 나서 제가 당신과 부딪혀야 했던 시간을 생각하면... 네 엄마. 당신에게 그리고 그이에게. 나 빼고 모든 가족들이 아이를 원했으니. 네. 저는 결국 축복처럼 아이를 가졌고 낳았고 기르고 있죠. 그 본분을 제가 망각하고 여전히 착각 속에서. 이상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제게 건네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와 화답을 원해서일 수도 있지만. 엄마.... 그렇지만 말입니다. 


가끔 몹시 외롭습니다. 정작 도망가고 싶은 대상이 돌연 가족이 되는 어떤 날들은..


엄마. 그거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일하는 유부녀와 유부남을 바라보는 세상의 당연한 시선에 대해. 

(좀 정확히 표현하자면) 아이가 있고 일을 하는 유부남이 늦게까지 남아서 일을 하든 뭐를 하든 그건 정당화되죠. 그 집안 생계를 돌보고 책임지느라 고생한다고들 말하고 생각하니까. 반면에 아이가 있고 일을 하는 유부녀가 늦게 귀가하든가 사부작대며 자신의 일들을 해내고 늦게 귀가하거나 시간을 뺴기라도 하면 말이죠. 애 팽개치고 뭔가 한다고 비난받기 일쑤입니다. 겉으로든 속으로든. 탐탁지 않은 시선은 여전히 살아있기 마련이죠. 


그럴 때 다 흘려버렸죠. 모든 따가운 시선따위가 내 인생 대신 살아주는 거 아니니까.


특히 당신과 자주 이런 문제로 부딪히는 날들이 잦아질수록... 엄마 저는 어디로 향해 흘러가야 할지 길을 헤맵니다. 텅 빈 마음과 허탈해지는 마음. 그리고 알 수 없을 죄책감과 동시에 겨우 잠재워 둔 우울증이 다시 도질 것 같습니다. 이 알 수 없는 우울의 늪에 잠식되어 도저히 나 스스로가 후져 보여서 어쩔 수 없을 때. 요즘 같은 이런 날은 안절부절못하지 못하게 됩니다. 엄마... 차라리 제가 웃으면서 넘기면 그만일 것인데. 여전히 이런 대화들을 그이와 당신에게서 작고 크게 주고받게 되면. 너무 아픕니다. 정말 너무 아파요.......


당신 말대로 네. 엄마 저는 제멋대로입니다. 알아요..

 여전히 이렇게 제멋대로 흘러가 볼 테지만, 이젠 좀 그만 아프고 싶은데, 쉽지 않네요. 다만 엄마. 저는 여전히 잠들지 않는 꿈을 꾸고 있다는 게 당신에게는 그리도 못마땅하신 걸까요.


당신의 마음을 모르진 않으나 여전히 받아들이기가 힘든가 봐요.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이 정한 그 기준, 그 세계에 맞춰진 캐릭터가 아니라서... 


미안합니다. 이모양이라. 

 일상에서 툭툭 주고받는 대화들을 곱씹다가 오늘은 좀 많이 후졌습니다. 바로 어제까지 열이 난 아이들을 위해 휴가를 내고 하루 종일 당신과 함께 육아를 해 내면서도. 마음은 이상하게 미안한 불편함으로 가득했죠. 급기야 책이나 글쓰기로 좋은 소식들이 간간히 생겨도, 시간이.... 물리적 시간이 부족한 제게 신랑에게 겨우 밤 시간을 양보받아서 글을 써 내려가고 있는 육아로부터 해방된 밤. 지금 같은 시간조차 이상한 죄책감과 후진 제 모습이 여전히 서글프게만 느껴집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내면의 또 다른 자아가 말을 걸어와서 그런가 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엄마. 당신과 주고받는 숨 막힐 듯한 몇 분들의 그레이 한 대화들이 제 삶 속으로 침투되는 순간. 저는 나 스스로 괴물로 변하는 것 같아요. 난 괴물이 되고 싶지 않은데 말입니다.... 괴물 같아요 정말 나 자신이... 내가 뭐라고 글을 쓰고. 내가 뭐라고 쌍둥이를 낳고 내가 뭐라고 그 감당도 안될 사랑스러운 존재들을 짊어지고 어떤 정신머리로 살고 있는 거죠. 



검열하고 싶지 않은데 검열을 어느새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그 기준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같은 여자인 당신에게조차 차마 말하지 못한단 말입니다. 내가 정말 괴물이 될까 봐.  

 쌍둥이를 위해 보내는 시간이 버거워서 내가 때론 힘든 소리만 하거나 낭비라고 느끼거나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에 대해서 엄마는 사실 이해 못하시잖아요. 다들 저러고 사는데 너만 왜 그 모양이냐고. 엄마로서의 과업을 해내고 있는 건데 유독 왜 너만 그러냐고. 그렇지만 엄마. 어쩌면 당신도 그러셨을지 모르겠지만 그 내면에는 표현할 수 없는 굉장한 괴로움과 불안감을 느끼는 게 아닐까요? 나만 그런 게 아니라고. 그리고 저는 감히 찾았다고 말하고 싶은걸요. 언제나 혼자 남겨진 시간의 글쓰기.... 음악과 키보드. 몇 개의 기억들이 공존하는 이 시간만큼은 꽉 막혀있던 케케묵은 오물 덩어리를 마음껏 배설해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라고. 


어머니의 위대함을 거스르는 말을 할 수 없어요.

다만 무엇보다도 나의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것 또한 포기할 수 없습니다. 불안해서 불안전한 건 정상일지도 몰라요. 엄마. 이렇게 나를 붙잡고 살아가 보는 게 전부일지도 모르겠어요. 요즘 같이 감정이 다시 소용돌이치고 사뭇 제 스스로 어디로 튈지 모를 것 같은 감정에 휩싸이게 되면 더더욱. 도리어 나에게 페널티로 작용할까조차 두려운 마음이 있음에도. 이젠 멈추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다들 그렇잖아요. 다들 그런 마음 있는 거잖아요. 드러내지 않을 뿐. 아니던가요. 


당신과 제가 한때 참 좋아했던 한 여름밤의 맥주. 저는 당신 없이 혼자. 가끔 이렇게 먹고 잠시 헛소리를 해 봅니다. 텀블러에 캔맥주를 담아서 회사에서 먹곤 해요. 낮술이든 밤에 퇴근하고 글 쓰는 시간이든. 술기운에 약간 부 유하 듯한 기분마저 도망치기 딱인 연출을 자체적으로 만들어 버리네요. 오늘도 또... 아니 오늘은 보고 싶었던 누군가가 맥주를 사다 줬다니까. 그니까 안 먹을 수 없죠. 오지게 먹고 취해서 자 버리고 싶을 만큼의 힘든 마음인걸요.... 힘들거든. 당신 딸이 요즘 다시 우울증이 도진 것 같아서. 


엄마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에서. 좋은 시간을...보내고 있는 이 시간이 왜이리 고통스럽죠.



아프지 마요 엄마. 우리 서로 생채기 내면서 아프지 말아요 

바락바락 대들고자 한 거 아니었어요. 그때 우리들의 대화. 그리고 침묵. 제가 침묵한 건 그냥 당신과 좋은 시간을 더 만들고자 애쓰는 저의 최선이라는 것을 알아주시길.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단지 그것뿐이니까요. 


 고마워요.... 그럼에도 여전히 비빌 구석이 내겐 당신뿐이라. 가끔 소스라치게 밉고 원망스러우면서도, 이런 모지리 같은 내가 쓰러졌을 때 유일하게 달려와 줄 수 있는 또 유일한 사람은 당신이라는 것을 나는 모르지 않기 때문에..... 아프지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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