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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un 29. 2018

어디예요.

엄마도 늘 내게 물었죠. "어디야"라고...

편지 하나) 당신의 행방이 언제나 궁금했었어


좋은 걸 보게 되면 같이 보고도 싶어지는 거지. 그러니 이 마음, 되도록 오래 간직해 보려고 해요...나의 '당신' 


뗄 수도 버릴 수도, 버림 당할 수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는 친애하는 나의 당신. 엄마. 

당신에게 앞으로 몇 십통의 편지를 써 내려가 볼 생각입니다. 사실 한참을 주저했어요. 겨우 마음 깊은 곳에 잠재웠었거든요. 당신은 미처 몰랐을 수면 밑에 가려진 어떤 마음들을 말이죠. 엄마와 딸이라는 수식어가 우리들에게 붙기 시작한 처음부터 지금까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서 여태껏 흘러나온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제가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전하고 싶은 마음도, 하고 싶은 말도 이렇게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사실은 절 아프면서도 또한 뭉클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 대상이 지금 당신, '엄마'이니 이 또한 기쁠 수밖에요. 


그건 아직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당신과 나 사이의 기억을 여전히 이렇게 간직하며 산다는 게 가끔은 신기할 정도입니다. 고맙지만 그만큼 아파서 피가 철철 났던 순간들. 기뻤지만 애타기도 했던 시간의 흐름들을 이렇게 꺼낼 수 있다는 건, 어쩌면 아직 제 마음속 에너지가 당신에게 아직 이렇게 열려 있다는 반증이겠죠. 그래서 이 마음 하나 붙잡고 이렇게 편지를 써 내려갈 용기를 만들어 봅니다. 


숨겨진 이야기 혹은 마음을 드러내려면, 늘 용기가 필요한 법이죠.  



그래서 지금 떨립니다. 

당신은 모르셨겠죠. 나 한 명만큼은 당신께 힘든 가족 구성원이 돼주고 싶지 않았다는 걸. 내 존재자체가 이상하게 당신에게 죄스러웠다는 것을. 정말 우습죠. 언제부터 이런 마음이 생겼는지 저도 몰라요. 그러니 아무도 모를 테죠. 나도 솔직히 모르는 것을 누가 알 수 있겠어요..


때론 자식의 연으로 만난 내가, 당신 삶에 허들이 된 것만 같았거든.. 

날 가졌으니 결혼이라는 게 옵션이 아닌 디폴트 값은 아니었을까 싶은 거죠. 당연히 남편이 있는 가정을 바라잖아요. 사회는. 그러니 엉겁결에 당신 삶에 불청객처럼 내가 껴들어 간 건 아니었을까 싶어서 때론 마음이 아팠어요. 그때 당시 (물론 지금도 별반 크게 다르진 않겠으나) 사람들이 볼 때 '아이를 가진 올바른 여자의 기준'이라는 게 있었을 테니까. 그러니 과거에 당신이 어떻게 살았든 결혼 이후의 세계에서는 과거의 당신이라는 존재는 강한 의지가 버티고 서있지 않는 이상 소멸되기 쉽다는 것을. 스물 하나. 그 나이에. 엄마는 생각하며 선택했을까. 아니 선택할 권리가 주어지긴 했을까 감히 생각해 봅니다. 이젠 한참 늦었고 무의미한 생각이지만...


태어나고 아주 어렸을 때 기억은 사실 많이 없어요.  

엄마에게 들은 것들이 어쩌면 내게 만들어진 기억이라면 기억일 수 있네요. 자아의 의지로 '의식'이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한 무렵은 아마 유치원 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무지개 유치원. 당신이 나와 동생을 부단히 보내 놓고 봉제 인형의 눈을 붙이러 다니며 봉투를 접기도 했고 출판사 책 혹은 방판용 화장품을 동네 여기저기 팔러 다니기도 했다던 그때 맞나요? 제 기억이 맞다면 당신은 늘 '일'이라는 것을 해 왔던 여자였겠죠. 대한민국에서 일을 하며 아이들을 보살피는 가사 노동 또한 병행했던 '두 일터의 여자' 말입니다.  



'두 일터' 를 바지런히 해낸 당신이 신기하고 또 존경스러웠지만...그걸 고스란히 보고 배운 나는 어느새 가끔 지치더라구..



난 늘 당신의 행방이 궁금한 아이였어요.

유치원에서 돌아왔을 때 당신이 없기라도 하면 대문 앞에서 늘 쪼그려 앉아 있었던 제 모습을 기억해요. 당신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울보 캐릭터 설정이 제대로 박혀 버렸나 봐. 엄마는 행여나 귀가가 늦을 까 싶어서 기다리는 나를 위해 헐레벌떡 달려왔을텐데. 한 여름이면 겨드랑이에 땀이 가득 차 젖기 일쑤였었던, 양손에 검은색 봉지를 가득 쥔 채 시장을 보고 온 당신을 보자마자 나는 맺힌 눈물을 기어코 터뜨려 버리곤 했죠. 당시엔 핸드폰이라는 게 없었으니 그저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울면서도 기다렸다는 건, 어쩌면 기다림에 익숙하나 그만큼 기다리기 싫었나 봅니다. 

견딜 수 있다고 스스로 속이며 괜찮다고 연기하는데 몸이 절로 부작용처럼 반응한 걸지도요. 그때부터였나 봅니다. '엄마 어디야'라는 말을 달고 살았던 내가. 한창 젊고 아름다운 다 누리고 살고 싶었을 당신의 그 이십 대 초반에 '엄마 어디야'라는 저의 그 단순한 말이 때로 얼마나 고단했을까요. 이제야 알 듯도 합니다. 



당신은 너무 일찍 그 이름을 뺏겼을지도 몰라요. 


이른바 육아 3종 세트인 '양육 보육 훈육'에 더하여 집안일에 부수적으로 경제적 도움을 위한 부업까지 도맡아 하셨댔죠. 아니 어쩌면 한 게 아니라 버티고 있었다는 게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어요. 



누구나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 법이죠.  

내 기억에 엄마는 늘 바빴지만 활기찼어요. 제 눈엔 그래 '보였어요.'  당신에게선 길게 늘어뜨린 헤어스타일은 어지간해선 볼 수 없었습니다. 기억이 생길 무렵부터 지금까지 돌이켜 보자면 당신은 줄곧 짧은 단발 아니면 쇼트커트로 무장했죠. 내 마음속 긴 생머리에 화장도 곱게 한 '예쁜 엄마'를 감히도 바랐던 걸까요. 애석하나 어렸던 제 눈엔 ‘그래야 마땅한 올바른 여자의 코르셋’을 어느새 장착하고 있었나 봅니다. 나도 모르게 은연중에요. 머리를 기를 새 없이 싹둑 잘라내야 했던 당신의 시간을 그때는 몰랐으니까.  


당신의 나이 듦과 우리들의 성장은 비례해갔죠. 

머리 커 갈수록 말도 잘 안 듣는 남매가 된 철딱서니 자식새끼 두 마리에 소처럼 성실하게 일하며 밥벌이를 하나 정말 '일만' 해낸 무뚝뚝 대명사인 전통 남성 캐릭터였던 아빠까지. 가족이라는 프레임 안에 함께 있었지만 누구 한 명 자유롭게 서로에게 감정이나 마음을 제대로 적시에 표현 해 내지 못하며 살았던 우리 네 식구의 한때를 기억합니다. 


특히 당신. 자기 마음 돌보지 못한 채 식구 세 명 보이지 않게 챙기느라 케케묵은 엄마의 마음이 가끔 폭발할 때면 그땐 무섭기만 해서 왜 그러시는지 이해도 못했을뿐더러 사실은 굳이 이해하려 애쓰지도 않았죠. 지금은 동병상련일까요. 바보처럼 이제야 알았습니다. 당신도 도망치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다는 걸... 그럼에도 떠나지 않고 곁에 남아 있어 줘서, 그게 이상하게 고맙고 또 무척이나 미안한 건 왜일까요. 


'어디야 엄마'라는 말, 입에 달고 살지 말걸 그랬어요. 그럼 당신이 덜 힘들었을지도 모를 텐데.

무서웠나 봐. 엄마가 어디로 가버릴까 봐. 그래서 달고 살았어요. 유치원 때부터 나 스스로 '반항' 하기 전까지는. 그렇지만 엄마. '어디야'라는 말이요. 참 좋지 않아요? 


누군가 '어디야'라고 물어봐주면 참 고맙고 좋더라.
사랑 받고 있단 느낌이 어느새 들어버리니까..


물론 그 '어디야' 소리가 철없던 한 때 잔소리 같아서 겉으론 늘 투덜댔지만 사실 그 말조차 없었던 한때 침묵으로 무장했던 무서운 엄마보단 잔소리쟁이 엄마가 더 좋았었거든. 마치 이런 느낌인 거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전래동화 테이프를 틀어 주셨던 장면이 떠올라요. 듣기 싫은 잔소리 같았던 그 아침의 동화구연 소리가 하루를 알리는 시작이었던 셈이지. 그리고  '일어나' 라며 당신의 얼굴이 내 눈에 비치는 순간, 투덜거리면서도 그제야 이상하게 안심이 돼더라고. 그래서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갔던 나... 그 모든 것들을 왜 난 여태껏 당연하다고만 여겼을까. 


내겐 당연한 그 익숙해서 편하기만 했던 일상들이
당신에겐 마냥 좋은 시간만도 아니었을 텐데..



울어대는 연년생, 달래고 멕이고 씻기고 재우고 놀리고. 아무도 그 시간 보상 안 해주잖아. 그래서 그냥 미안하고 고마워..



내가 모르는 당신의 삶은 어땠을까요  

‘엄마 어디야’를 입에 달고 살며 당신 껌딱지로 살았던 어린 시절의 나와 동생이 늘 함께 있었으니 차마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 일들. 뱉고 싶어도 못다 한 마음속 목소리들. 그렇게 꾹 눌러 숨기며 살아왔다면서요. 그게 때때로 얼마나 무거웠으면 언젠가 같이 맥주 마시다가 술에 취한 채 ‘나는 꿈이라는 단어 조차 잊고 지냈었다’고 눈물범벅이 되어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었던 당신이었잖아... 그러니 정작 엄마가 된 딸내미가 지금처럼 ‘꿈’을 쫓아가는 이 시간들이 당신 눈에는 상당히 이기적으로 보였을지도요. 알아요. 엄마. 당신이 뭐에 그렇게 분노하고 불만스러워하는지. 육아에 집중 안 하고 딴짓거리(?) 한답시고 책 읽고 글 쓰고 내 일 꾸역꾸역 하고.. 등등. 사뭇 못마땅하실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젠 넌지시 이해가 될 법도 합니다. (그럼에도 가끔 엄마의 독설은 아파요)


꿈? 그딴 건 됐고, 다만 '현실'을 바쁘게 쳐내듯 살아 냈었던, 내가 몰랐을 당신의 순간을 이젠 알 것도 같아요.

나 또한 '엄마'가 됐다는 같잖은 핑계 삼아서요. 당신처럼 결혼과 육아라는 성역에 들어가게 되니 당신의 옛 시간들에 격한 공감과 애처로운 동감은 자연스레 찾아오는 별책부록 같기만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요즘은 당신의 안부를 곧잘 묻게 되네요. 


"엄마 어디야" 
"지금 병원이야, 검사 대기 중. 왜 뭔 일 있냐?" 


"엄마 어디야"  
"지금 시장이야, 뭐 사러 나왔어 어디냐?" 


"엄마 어디야" 
"부동산이지, 일하는 중이야 회사야?" 


"엄마 어디야" 
"밀린 집안일 중이지. 어디야 밥은 먹었어?" 


"엄마 어디야" 
"운동 중이다. 쌍디들은 어린이집 잘 갔어?  


당신의 그 시간 그 장소가 이젠 궁금해져서 말입니다. 

어른의 몸으로 변한 지금임에도 마음은 어렸을 적과 비슷한 유치한 순간이 부쩍 요즘 많아지는 나여서.... 사실은 그래서 여전히 이렇게 생활 속 틈틈이 안부를 자주 물을 것 같습니다. 예상되는 장소와 예상되는 사람들과 같이 있는 당신임을 알면서도 '일부러' 말이죠. 



안녕을 묻고 또 확인받고 싶었었나 봐.
당신의 오늘과 나의 오늘이 '무사'함을. 



귀갓길에 이상하게 코끝이 매섭게 서러워지는 겁니다. 그러다 갑자기 버스에서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며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려고 했었죠. 결국 망설이다 전화를 걸면 되려 내 안부와 행방을 묻곤 했었던 당신이잖아요. 그러니... 저는 이제 이 편지를 시작으로 꽤 오래 안부를 주고받고 싶습니다. 물론 이제는 엄마의 '어디야'라는 주체가 나에서 우리 쌍둥이들, 당신의 손주들로 바뀐 것이 커다란 변화이긴 하지만.


"둥이 맘, 애들 어때? 어린이집에 잘 갔어? " 
"응 엄마. 어디야 " 
"집이지 어디냐. 수고해. 옷 따뜻하게 입고. " 
"응.." 
"무슨 일 있어? " 
"아니. 그냥. 음... 엄마.." 
"무슨 일이야? 별 일 없지? 너 급할 때 연락해라. 혼자 끙끙대지 말고." 
"응....ㅋ.” 


울먹이는 목소리를 대번에 눈치채는 대단한 엄마, 나는 당신에게 그러니 여전히 전화를 걸 생각입니다.



'ㅋ'라는 글자를 보내야 그제야 마음 놓는 당신을, 이제는 알 법한 나이가 점점 돼가나 봅니다. 

엄마. 우리 이렇게 여전히 '어디야'라는 걸 묻고 지내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서로가 함께 살아있는 유효한 이 시간에 감사하며 
이젠 자주 마음을 들켜볼 작정입니다. 



새삼 전화기를 발명한 분에게 감사하기도요. 세상의 가장 큰 위대한 발명품은 '전화'일 거예요. 멀리 떨어져 있는 누군가에게 유일하게 육성으로 그곳에 닿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니까.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 일인지 몰라요. 펑펑 울고 싶은 어떤 날에도 울리지 않는 전화기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버튼 위로 손가락을 매만지는 날도 있을테지만.. 


그럼에도 당신 앞에선 우는 시간, 이젠 많이 없을 거라고, 감히 다짐합니다. 

물론 절대 쉽게 지켜지지 않는 오늘의 각오지만 말입니다. 울먹이는 목소리를 대번에 눈치채는 대단한 당신에게 저는 오늘 전화를 걸 생각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바랍니다. 전화가 닿을 수 없는 거리의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존재에게도 닿을 수 있는 도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바로 엄마의 엄마에게도, 당신이 힘겨워서 삶에 부딪힐 때 할머니에게 전화를 할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나이를 먹어 가지만 아직 젊다 하는 오십 대 당신의 몸이 요즘 들어 부쩍 삐걱거리며 약해짐에 가속도가 붙을수록 저는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더 안부를 물을 생각이에요. 올해는 더더욱 나의 할머니들의 몫까지.  


"어디야. 보고 싶어"라고..


혼자 길을 걷다 보면 꼭 생각 나는 사람이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이래.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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