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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Sep 21. 2018

타고난 거짓말쟁이

당신을 위한다는 알량한 마음일지라도.

편지 열셋) 상상 속 거짓말 같은 장면을 뇌로 좋게 속이다 보면, 언젠가 진짜가 되기도 한대요. 


자려고 누워도 생각이 끊임없을 때가 있어요. 그럴땐 그냥 눈을 감고 좋은 거짓말을 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스스로.. 





                      

다쳤다던 손가락의 피, 이제는 멈췄을까요.  

시간이 흘렀으니 멈추는 게 당연한데 괜한 걸 묻고 있네요. 엄마. 생각해 보면 저를 여러모로 따끔하고도 뜨끔하게 만드는 것들 중 '피'도 한 몫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피' 앞에서는 언제나 거짓말을 했던 것도 같고요. 대수롭지 않은 척.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교묘한 거짓말...  생각해 보면 불편하거나 피하고 싶거나 되도록 마주하고 싶지 않은 몇몇 삶의 장면들은 그것과도 연결이 되어 있는 것 같아요. 

 

위험할 뻔 했던 그 해의 밤. 택시 안에서 있는 힘껏 문을 열어젖히고 무작정 달려가다 넘어졌지만 아픈 줄도 모른 채 도망쳤던 날, 뒤늦게야 알아챈 무릎에 줄줄 흐르던 피. 사무실에서 너무 배가 아파서 그대로 사무실 바닥에서 고꾸라 쳤던 날, 복부에 피가 차서 바로 수술을 하게 되었을 때, 혈관을 찾을 수 없다며 팔 군데군데를 연신 찌르며 미안함에 쩔쩔매셨던 간호사 언니의 주사기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는 핏줄기들. 주기를 빗나가며 갑자기 터진 생리, 출근길에 결국 흘리고 마는 코피 등등. 뭐 그냥 흘러가다 만난 에피소드 같은 것들일텐데 말입니다. 

 

빨간색이 예쁘긴 해도 반대로 보고 싶지 않을 때도 있는 것처럼..



누군가가 그랬었는데. 여자의 인생은 '피의 연대기'라고 말입니다. 

생리를 시작할 무렵이면 더더욱 거짓말이 많아졌던 것 같습니다. 행여나 피가 안 새어 나왔는지 -그 와중에 생리통은 언제나 피곤하게 만들죠 -  옷매무새는 괜찮은지. 연인과 관계를 맺고 난 이후 참 아팠던 날, 뒤늦게 흐르고 있었던 피와 '아무 일 없는 척' 했으나 생리가 나오지 않아 잠시 테스터기를 시험하기도 했었던 그 땀 차고 가슴 졸리는, 유쾌하지 않았던 일방적인 나만의 긴장감마저도. 물론 다 지나간 애기지만요. 



 당신께 들킬 수 없는 것들이 조금씩 생겼습니다.
'나'의 세계가 더 커다랗게 자라는 만큼.



따지고 보면 감출 필요 없는 것들인데 말입니다. 

따분했던 가정 시간, 오십 대 중반 실과 선생님께서 성교육 해 주시면서 '처신을 잘 해야 한다' 고 배워서(?) 였을까요. 아니면 같은 여자로서 그녀가 우리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조언이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디만. 어쨌든 곧이 곧대로 믿었던 순진했던 저는, 돌이켜 생각하면 정말 별 거 아닌 것들을 감췄던 것 같습니다. '나'의 세계가 더 커다랗게 자라고 스스로의 목소리를 자꾸 입 밖으로 내려할수록 '좀 이상한 애'가 되기도 했지만, 뭐 적절한 감춤과 드러냄의 완급조절(?)을 해냈으니 학교라는 곳을 다니든가 사회생활을 해내면서 대인관계를 맺어 감에 큰 무리는 없었습니다. 모두 견딜 만했어요. 



감출수록 내면은 소란스러웠어도. 겉은 조용해 보일 뿐이죠.






폐경이 아니라 '완경'이라고 합니다. 

세상에는 부정적인 단어들이 생각 외로 많은 것도 같습니다. 요즘 들어 자각 중인데 그럴수록 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발언이나 행동을 되새겨 보는 요즘이예요. 일종의 셀프반성모드죠. '폐경'이 아니라 '완경'이라는 말을 되도록 사용하려 애쓰는 제가 보이기도 하고요. 


한 때 1년이고 6개월이고 생리를 하지 않았던 저는 과민성 대장증후군 탓인지도 몰랐었어요. 그저 생리 안 하는 것 자체가 너무 기뻤었단 말이죠. 근데 당신은 왜 그리도 걱정을 하면서 산부인과에 가자고 호들갑을 떨었었는지.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걸 좀 더 커서야 알았습니다. 진작 말해줄걸 그랬습니다. 나 그때 아무도 안 만나고 있었다고. 그럴 수 없는 시간이 내게 있었다고.. 평일 주말 가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3개씩 달고 살았을 만큼. 사회 나가서도 한동안 주말엔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독하고 바쁘게 살았으니까. 



당신도 내게 드러내지 않은 것들, 꽤 많았겠죠. 

집요하게 끄집어서 물어봐야 겨우 알 수 있었던 당신의 감추기 일쑤였던 마음들을 애써 알려 했던 호기심 대마왕 딸이어서. 엄마. 미안했어요. 당황했으려나. 기어코 물어보고 말아서. 


엄마 그때 나가서 어디로 갔었어 
.. 갈 대가 없더라.
연락을 하지 그랬어. 그럼 같이 있어줬잖아. 전화기는 왜 꺼뒀어. 
됐어.. 
다음부턴 연락하셔. 알바 째고 달려갈 테니까. 
... 넌 나중에 나한테 전화해. 결혼하고 나면. 
엄마. 나 결혼 안 해. 돈이랑 엄마가 제일 좋아. 그리고 말이지. 결혼하면 상대를 가출시키지. 내가 왜 나가 
... 기지배. 그래. 그렇게 살아. 
엄마..
...... 그래도. 나한테 전화해. 넌. 
나 역시 복받았다. 그치. 
그래 너 복받은거야. 고마운 줄 알아. 난 연락할 엄마가 없다. 지금. 
....엄마. 


당신이 '혼자'였을 때. 그래도 주변 풍경이라도 아름다웠으면 좋겠어. 그러면 덜 외로울 거 아냐. 




결혼 안 하고 돈이랑 당신이 제일 좋다 했었던 그 치기 어렸던 제가, 어느새 이렇게 흘러 왔네요. 

돈 모으는 재미가 솔솔 했는지 아니면 그저 뭐에 쫒긴듯 바쁘게 살아야 그게 맞는 줄 알고 아르바이트를 달고 살았었잖아요. 당신들께 학비 내달라는 소리가 이상하리만큼 하기 싫었으니까. 그러면 당신 두 명이 좀 자유로워질 것도 같아서. 쉴 수 있을 것도 같아서. 그래서 악착같이 장학금 받아 내려고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죠. (그 때 아마 데이트의 팔 할은 도서관이었다니까. 젠장. 그래도 가성비가 갑이긴 했죠. 그 덕에 지금의 내가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고..)  당신도 맞벌이하면서 집안일하고 애 키우고 가족 챙긴답시고. 우리 둘 생각해 보니 못해본 것들도 참 많았네. 그쵸. 사소한 건데도 못해본 것들 있잖아요. 



 '괜찮다' 고 했었어. 안 괜찮았던 순간에도. 
우린 서로에게 '괜찮다'고만 했었던 것 같아. 



생각해보니 말입니다. 우리 두 사람. 그동안 완벽히 둘이서만 둘을 위해서 뭘 먹거나 보거나 사러 다니거나 그래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이제야... 이런 생각이 진해지다니. 아니 어쩌면 사실은 이것도 거짓말. 어쩌면 당신과 단 둘이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어떻게 여행을 가는지, 나 그 방법 자체를 잃어버리고 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혼 전에 좀 더 많이 해볼 걸 그랬습니다...



이렇게 후회를 합니다. 언제나 뒤늦게. 

그러니 유한한 이 삶을 지금부터라도 덜 후회하고자. 저는 이제 감추지 않고 '들키는' 연습을 해 보기도 합니다. 어리석게 보여도.. 이렇게 글을 쓰는 시간만큼은 말이죠. 물론 그럼에도 일상이라는 시간은 흐르고, 정작 입 밖으로 내뱉고 싶은 말은 다른 정 반대의 단어로 내지르기도 하니, 그렇게 서로가 마음은 어긋난 채 서로 생채기 내기도 하더라고요. 그러니 좋게 거짓말하는 연습도 필요한 게 점점 느껴지기도 합니다. 삶을 살아가며 어떤 관계들을 맺어 나감에, 때론 마음을 들키지 않고 감추는 것도 필요하다는 걸. 거짓말을 '잘' 하면서 삶에 플러스가 될 수 있도록 잘 살아가는 게 필요하다는 것을. 도미노현상처럼 우루루- 무너지면 안되잖아요. 나, 그래서는 안되잖아 아직. 그러니 되도록 연습해 봅니다. 



 거짓말을 진실처럼. 진실을 거짓말처럼.

 

 




애쓰지 말라고 요즘 제게 자주 얘기하는 당신. 

그런데 나. 사실 그 애쓰지 않는 삶이라는 거. 잘 몰라요. 정말 모르겠습니다. 뭐가 애를 쓰고 뭐가 애를 쓰지 않은 건지. 지금 이게 애를 쓰고 있는 건지 아닌 건지도 알 수 없죠. 특별히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러니 거짓과 진실의 경계는 사실 없는 듯 싶어요. 그냥 허물어질 뿐이죠. 

 

김서방은 왜 나만 오면 꼭 늦게 오냐. 
미안해 매번. 일이 요새 정말 바빠 그이...
그럼 나 없을 때 육아는. 너 또 혼자 절절매는 거 아냐?
걱정 마. 익숙해졌고. 그이는 되도록 같이 하는 편이야. 이젠 고맙다고도 해. 나쁘지 않아요 우리 둘.  
그래도 지금 시기에 너무 늦게 오지 말라 해. 영유아가 어디 쉽냐. 그것도 둘씩이나. 
응....엄마도 사회 생활 해 보셨으면서 그래..
혹시 바람피우는 건 아니지?
큭큭...엄마도 참..  근데  있지. 나. 이런 말 하면, 엄마 정말 웃으려나 몰라. 
뭔데.
만약 그이가 그러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할 거 같아. 결혼해서 한 사람만 줄곧 바라보며 사는 거. 좀 웃긴거 같기도 해. 물론 약속이야 하지. 사람들이 결혼할 때. 넌 내거라고. 근데 그 약속은 사실 틀린 거 같아  엄마. 애초에 약속이라는 걸 할 수가 없어요. 내 몸과 마음은 한 사람만을 위한 게 아니잖아. 진짜 한 사람을 위한다면 그게 너무 잔인하지 않아? 내가 상또라이라는 건 원래 알곤 있어서 이 말 하는거지만 엄마. 그래서 결혼제도를 법으로 만들어야 한다니까. 어때. 20년 재계약 결혼제도. 콜?
미친년 
ㅋㅋ 응. 그렇지 
아무튼. 너. 사람 일 모르는 거다. 
근데 엄마.. 이 마음이 좀 이상한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이가 그러든 말든 그게 별로 '나한텐 안 중요해.' 
책 많이 보더니 애가 이상해졌어. 
...필요할 때 곁에 있는게 중요하지 뭐. 누굴 만나든 사실 그런 건 별로 안 중요할 거 같아. 내가 모자란건가 
모자란 년. 그러는 넌. 바람 피우고 싶냐. 
엄마랑 이런 대화가 이제 가능하다니. 결혼해서 좋은 것도 있네. ㅋㅋ  나 좋다고 먼저 달려드는 미친놈 있으면 좀 데려와줘봐 엄마. 면상부터 훑어보게. 나 외모지상주의야. 
니 잘생긴 아들 둘이나 실컷 봐라 
ㅋㅋ 역시. 아무튼 엄마. 걱정같은거 그냥 버려요. 그이 하도 바빠서 그럴 시간(?) 있으려나 몰라. 설령 그렇다 한들. 요즘 나 같아서는... 별로 흔들릴 것 같지도 않아. 아님 내가 '안 겪어봐서' 뭣도 모르고 이런 소리 할지도 모르고. 아무튼 엄마. 지금은 마음 추스리고 나 살기도 바빠.. 시간도 맨날 허덕이고. 하고 싶은 건 많고..아니면 뭐 그이 앞에서 이제 초연해졌나... 
초연이 다 얼어 죽었냐? 애가 오늘따라 이상해. 
ㅋㅋ

 


그러게 엄마. 초연이가 다 얼어 죽었나 봐요. 얼어 죽어서 내가 막 나가나 봐. 흐르는 그대로. 정말 그대로.

당신의 그 표정 말입니다. 둘이 맥주 마시다가 서로 웃기면서도 약간 당혹스러운 듯한 그 오묘한 표정이 이상하게 참 따뜻하고 좋은 겁니다. 엄마. 나 그런 당신의 '안도하고 편안한' 모습이 좋습니다. 역시 화난 얼굴보단 웃는 얼굴이 가성비 갑이라니까. 그러니..당신의 그 미소를 위해 적당한 거짓말과 유머를 섞어가는 연습을 요즘 더 열심히 해내는 저 라는 걸, 당신은 알까요.. 


사실은 괜찮지 않고 나도 모르게 하염없이 볼을 타고 눈물이 흐르는, '잘' 살지 못한 채 괜히 쓸쓸하고 외롭게만 느껴지는 완벽히 혼자가 된 어떤 순간에도.



 당신에게만큼은 타고난 거짓말쟁이가 될 거예요.
안 들킬 겁니다. 흔들림이든 외로움이든. 그건 나의 몫이니까.

 

 

원래 사람들 내면엔 '아이'가 살잖아요. 그걸 적당히 드러내고 감추며 사는 거예요. 별거 정말 없는거 같아. 엄마..





 

당신의 어제 귀가가 무사했기를. 

교수 됬어도 여전히 소소한 걱정으로 뒤 봐줘야 하는 아들녀석 이사 도와주고. 다가오는 명절 준비 하고. 아직 영유아 두 명 키우며 사는 딸내미의 울적한 마음까지 챙기느라 여전히 바쁜 당신. 오늘 병원은 잘 다녀왔기를. 그리고... 나도 당신 나이 정도쯤 되면 좀 더 굳은살이 베이려나요. 관계에 있어서,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삶의 에피소드에 있어서도. 정답은 없지만 다만 여전히 적절한 거짓말과 진심. 잘 섞어가면서. 엄마. 나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켜봐 줄래요. 내 곁에서. 되도록 오래. 
그래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주가 마지막 편지입니다. 그 열네 번째 편지는 목소리로도 전할까 합니다. 그리고..
어떤 문장들을 손으로도 남겨볼 생각입니다. 아마 펜을 되도록 꽉 쥐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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