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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an 04. 2019

#4. 북메이트

 이성과 감성 

수줍음은 하여간 열등감의 소산일 뿐입니다. 

만약 제 매너가 완벽하게 자연스럽고 고상하다는 확신만 든다면 수줍어할 필요가 없지요. 


- 이성과 감성, 제인 오스틴 - 






이 주가 흐른 뒤 정태민의 제안은 정말이지 '작가' 다웠다. 

생각해보면 그를 단순히 내 출간 담당 '저자' 이기 이전에 다른 무엇으로 보기 시작한 건 어쩌면 내 쪽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가 글 쓰는 사람이라는 걸 잊기 시작했다. 부재중인 이 주간 이메일로 업무를 교신하면서도 그의 그 '제안'이라는 것이 궁금해서 일상에 조금씩 균열이 일어날 지경에 이르러서야, 그제서 깨달았던 것이다.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해도 이미 원치 않게 촉각이 곤두서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가 돌아왔을 때, 올 것이 정말 오고야 말았다. 



- 제안하고 싶다는 말 기억하세요? 

-..... 무슨 제안 말이죠 

- 아... 아닙니다. 

-... 기억해요. 망할.. 그 말 때문에 제가 원고에 집중을 못했으니 말입니다. 작가님. 

- 화가.. 난 것 같네요. 



뻔뻔함은 드러내기도 쉽다. 상대를 봐 가며 낸다면. 드러내도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본능이 대신 알려 준다.  



-... 화가 난 게 아니라 

- 혜연 씨가 그렇게 화내는 이유. 난 알 것도 같은데. 

-... 뭐 하자는 거예요 정말

-.... 아무것도....

-? 

-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참 오랜만에 들어 본다. 

그것도 남의 목소리를 통해서. 지우 낳고 키우며 코피 터지듯 보냈고 심지어는 남편의 외도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은 마음이었다. 그때 내가 했던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남아있지 않다는 말. 그러나 그땐 이렇게 크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었는데... 



-.... 나 좋아해요? 



악취미 발언은 그새를 못참고 새나가 버린다.

아뿔싸 하며 언제나 후회는 뒤 따라오는 것일 뿐. 기다려주지 않는 게 시간뿐은 아니다. 차오르는 마음, 흘러버리는 감정들. 돌이킬 수 없는 말들. 그러나 그 이후에 다가오는 게 무엇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누구도 내일의 교통사고를 예언하지 못하는 것처럼. 아니 예언하지 않고 사는 것처럼. 



-.... 네. 그런... 것 같습니다. 미국 가 있으면서 혜연 씨 생각을 했으니까요. 

-  선수 다운 발언이십니다. 작가님. 

-... 이런 당신 모습이 생각이 났어요. 목소리도.. 살면서 이런 감정이 생길 줄 모르고 살았으니까.

- 개.... 소리. 

-....

- 당신. 한남이에요. 그냥. 좀 마음에 드는 여자 떠보는 한남. 

- 혜연 씨... 

-....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고. 나도 남자 싫어하지 않는 나쁜 페미니스트라고요.  

-....  제안. 들어볼래요. 그렇게 자신을 깎아내릴 정도로 화만 내지 말고. 애기를 좀 들어봐요. 

- 들으면 뭐 달라져요. 악취미야 정말..

- 그건 저도 모르죠. 네..제 악취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좀 더 지켜보고 싶다는 제 악취미

-.... 

- 메이트가 되어 주세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저희'들'이 맞겠군요. 

- 뭐라고요? 

- 메이트 말입니다. 북 메이트요. 저의 북 메이트 말입니다. 혜연 씨 책 좋아하잖아요

- 출판사 다닌다고 다 책 좋아하는 거 아니고 더 안 읽어요. 그런 고루한 말은..

- 처음 봤을 때 밀란 쿤데라 책 읽고 계셨잖아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아...

- 저 눈썰미 좋습니다. 사람도 꽤 잘 봐요. 특히 제 눈에 들어온 사람들은 놓치지 않는 편이죠. 어쨌든 제안. 좀 더 들어보시겠어요? 메이트가 되어 준다는 조건 하에. 






정태민이 제안한 건 소위 실험대상자가 되어 달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이끄는 사내 임직원 대상 북클럽을 만들고 정기적인 독서 토론 및 강연회와 가능하다면 북 큐레이션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내 콘텐츠 사업을 구상 중이라 던 현재 내부적으로 논의 중인 세컨드 사업화 모델의 기획자나 다름없었다. 기획하는 사업가. 그리고 그 사업가가 만들어 낸 일종의 실험과도 같은 모임..



그의 목소리엔 힘이 들어 있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요즘 보기 드문, 아니 내 주위에서 보기 드는 '그 나이에 살아있는 잘생긴' 남자였다. 입고 있던 청바지와 검은색 목폴라, 네이비색 폴로 카디건이 그의 스마트한 아우라를 대변하기에는 무리수였다. 약간 스키니 한 몸매의 나이 치곤 영하고 핸섬한 호감형 비주얼. 사실 첫인상에서 타인에게 끌림을 연출할 줄 아는 노련함은 풍기는 어른이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의 다분히 확신적인 목소리를 통해 나오는 정확하면서도 예리한 발언들은.. 에디터인 나로서는 '더' 끌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쉽게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고 싶다'는 말을. 쉽게 보이면 정말 쉽게 변할까봐. 



- 듣고 있어요?

- 듣고 있어요. 

- 정식 고용의 개념이 아니라 그냥.. 프리랜서 외주로 좀 더 활동해 보신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 돈 많이 줘요?

- 하하. 혜연 씨 돈이 궁해서 사는 분은 아니신 걸로 기억합니다. 


- 돈 안 궁한 사람은 없어요. 안 그렇다고 속이거나 안 그래 보일 뿐이지. 당신같은 사람들이 다 아니란 말입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일하면 돈을 줘야죠. 투여된 노동 대비 정당한 값을 지불하는 게 기업의 원칙입니다. 사회부 기자였을 때 숱하게 악덕 기업 고용주들, 그 밑에서 쓰러져 가는 노동자들.. 많이 봤어요. 이골이 날 정도로. 그래서 저는 사람 볼 때 돈 다루는 것부터 봅니다. 사람과 돈 다루는 법. 제대로 올바르게 다루는 사람...



괜히 욱했다. 남편의 내연녀의 부모가 적반하장으로 들이내민 카드가 바로 '돈'이었기 때문에. 그때 깨달았다. 돈이면 다 용서될 수도 있다는 이 사회의 거짓말 같은 진실을. 



-.. 혜연 씨.. 강하신 분이군요. 

- 뭐라고요?

- 생각보다... 더 매력 있다고요. 

-.... 나 원 참. 뭔 말만 하면 한남 발언하십니까

- 칭찬을 하는 게 왜 한남 발언인 거죠? 본인을 나쁜 페미니스트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다니는 여자가 대한민국에 흔한 건 아니니 이해합니다만... 아무튼 무례했다면 사과합니다. 

-.... 한남 발언 정정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도가 지나쳤어요. 

- 에디터 다우십니다. 

-... 좀 혼란스러워서 그래요

- 이해합니다..

-.... 해보죠. 그 제안.. 뭘 어떻게 하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다만 저희 대표님껜 먼저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일에 지장 주진 않을 거지만 그래도 신경 쓰이실 테니까..

- 알겠습니다. 아참.. 제 원고는 보셨는지요. 

-... 초고를 워낙 잘 쓰셔서 뭐 손댈 구석이 없었어요... 몇 개 문장 구성 빼놓고는 비문도 전혀 없고요. 제가 오히려 배우고 있습니다. 디자인 시간 작업 나오는 대로 간지 페이지 보시고 느낌 살려서 몇 개 원고만 추가해 주시면 됩니다. 

- 혜연 씨

- 네?

- 제안 받아 주실 줄은 사실 몰랐는데. 감사해서 밥이라도 대접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건 작업식 한남 발언이 아닌 진짜 호의로 듣겠습니다. 

- 네. 앞으로 호의 많이 드릴 수 있기를 저도 기대합니다. 




작가, 사업가, 그렇지만 그것들을 초월해서 그저 내게 다가오려 하는 것 같은 알 수 없는 사람.  

그의 제안보다도  '기대한다'는 목소리가 더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되려 내가 기대하게 될까 봐. 내가 그 사람에게 뭔가 나의 억눌린 자아를 폭발시키듯 꺼내보이게 될까봐. 



드러내는 건 글자로 만족하다. 섯불리 사람들에게 드러나면 다치게 되는 건 결국 드러낸 쪽의 책임일테니.






집착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지우를 키우면서도 이건 이래야 하고 저건 저래야 한다는 일종의 육아 기준 스트레스는 거의 받는 편은 아니었다. 원래 남들의 시시콜콜한 말들에 귀담아듣는 편도 아니었지만 그만큼 마음에 담고 있거나 신경 쓸 만큼의 가치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단칼에 흘려버리고도 마는 사람. 



심지어는 남편이 외도를 했다는 고해성사를 하던 밤에도 나는 많은 걸 묻지 않았다. 

물어볼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었고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결혼 제도는 욕망하려는 인간에게 있어 이율배반적인 제도권 안의 일이기에 소위 내 기준에서는 내 일상이 흔들릴 만큼의 뭐 그리 대단한 사건(?) 은 아니었다. 오히려 외도 사실을 알렸던 그나마 마음 터 놓고 지내는 지인들이 더 열을 내고 화를 내주었을 뿐. 그들의 화가 당연하면서도 별로 탐탁지도 않았다. 딱 그 정도의 시간들이 흐르고 있었기에. 어느 것에도 흔들리지 않을 무감각한 평정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알 수 없는 얕은 우울감에 혼자서는 하루가 때론 멈춰지기를 바라며 무디게 살아가는 여자.. 그랬던 내가 조금씩 그 평정심이 무너져 가는 게 느껴졌다. 



그의 이름을 검색창에 입력해 보았던 날. 또 다른 내면의 어색해서 피하고 싶은 모습의 시작이었다. 

알법한 정보들이 나왔고 뒤따라 연관 기사가 나왔다. 한데 놀랍게도 그의 약혼녀 이름이 따라 나왔다.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정보라고 생각하면서도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다시 그녀의 이름을 검색했다. 



이수연. 

그의 약혼녀 사진을 찾는 것은 스스로 캐물으려 하는 심보처럼 검색을 해 나갈수록 허무할 정도로 쉬웠다. 착해 보이는 외모의 나름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미인상이었고 무엇보다도 그와 잘 어울렸다. 기사 속 그의 약혼녀를 찾으라고 한다면 쉽게 골라낼 수 있을 것 같은 비주얼이었다. 원하지 않는 약혼 대상이라 했던 아쉬움 섞인 말을 하긴 했어도 그도 남자구나 싶었다.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그녀와의 약혼을 결심하게 된 벅찬 이유가 고작 이런 건 아니겠지만 그저 짐작할 뿐이다. 그럼에도 할 수밖에 없는 어떤 이유가. 마치 외도한 남편과도 헤어지지 않고 사는 나와 남편의 현재의 순탄한 관계처럼. 



질투심은 들지 않았다. 

다만 업무상으로, 혹은 공통의 지인이 되어 버린 정태민을 통해, 혹은 회사에서라도 우연히 만나게 되는 날이면 어떤 사이로 규정지어야 할까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이는 쉽게 결정되었다. 



- 안녕하세요 이수연입니다. 

-... 정혜연입니다. 

- 말씀 들었어요. 저희 오빠 이번 책 출간 담당 편집주간님이시라고 

- 그리고 또 하나 늘었죠. 

- 네?

- 메이트요. 




일부러 타인의 시선을 자극하려는 듯 보란듯이 몸에 꽉 맞춰 입어야 승리감이 더 차오르는 개미 허리라인 자극하는 검정과 회색이 잘 조화된 그라데이션 무늬의 니트원피스와 블랙 오버코트, 그리고 그레이색 하이힐은 그녀가 가진 것들을 대변하기에 충분했다. 딱 봐도 비싸보이는 명품가방을 보자니 들고 있었던 나의 녹색 나무그림이 그려진 손잡이 부위쪽 모서리가 너덜너덜해진 에코백이 영 볼품없이 느껴져서 잠시 패배감에 젖어 있었지만. 




- 정태민 대표님 북클럽 운영 담당이자 작가님의 북메이트..입니다.

-.... 재밌는 분이시네요.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 묻지 않았지만 제 소개 정도는 듣고 알고 계시는 게 아니라 직접 말씀드리는 편이 제가 더 좋아서요

- 수줍은 분은 아닌 것 같네요. 



어제 읽다 만 제인오스틴의 이성과 감성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리곤 애꿎은 책 탓을 해보기도 전에 이미 발언은 흘러나갔다. 멈추려 하는 마음보다 더 빨리. 이성적으로 살아야 하는 내가 드디어 감성에 눈을 뜨고 말아버렸다며 애꿎은 책 탓을 했다. 



수줍음은... 열등감의 다른말일지도 모르죠. 제 매너가 완벽하게 자연스럽고 고상하다는 확신만 든다면 수줍어할 필요가 없을테고요. 

- ...작가신가요? 아닌걸로 들었는데. 

- 책이 꼭 나와야 작가인 건 아니죠. 제인오스틴. 이성과 감성에 나오는 말이예요. 첫번째 북클럽 고전 시리즈 중 선정된 책이기도 하고요. 

- 아..네...오빠가 좀 힘들겠네. 이런 사람하고 같이 일을 하니 그래서 더 바쁘단 핑계 댔었나보네. 아무튼 제가 좀 바빠서요. 그럼 이만. 







우리가 과연 사이좋은 세 사람이 될 수 있을지 혼자만의 영양가 없는 짧은 생각이 스친 후에야 

섯부른 그 어떤 대화의 진행이나 판단은 보류하기로 했다. '이런 사람' 이라고 이미 단정지어졌으며 또한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재단해 버리는 그녀와는 더이상 대화를 이어나갈 필요도 없었다. 시간과 에너지만 낭비될 뿐이었으니까. 그야말로 소비도 아닌 낭비였다. 


그녀에 관한 모든 사실은 그가 직접 말해 줄 때 비로소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에 섯부른 검색질도 그만 두었다. 혼자서 온갖 상상을 통한 어설픈 뒷조사를 하는 것은 영 마음이 편치도 않았다. 그리고 그와 그녀의 조합이 뭐 어울리지 않을 것도 사실상 없었다. 세상 사람들도 환상처럼 인정하는 그림 속의 먹지 못할 떡같은 존재들. 


그치만 믿고 있었다. 외도는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다지만 나의 이들과의 관계의 진행은 그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라고. 적어도 여태껏 그들이 살아본 그쪽 세상이 아닌 곳에서 살아온 나에게 만큼은.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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