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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an 11. 2019

어느 젊은 교수 이야기

피, 땀, 눈물... 그리고 무서운 실행력을 가진 누군가의 실화..입니다

Now is no time to think of what you do not have.

Think of what you can do with that there is.


- 어니스트 헤밍웨이 -





찢어지게 가난한 집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먹고 살기 넉넉한 것도 아니었던

그런 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남매가 있었다. 비빌 구석은 오직 두 사람. 성실하게 살아 보려 애쓴 부모님이 계신 것. 그게 전부였다. 재력도 인맥도 없는 평범한 시작이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한 사람은 출간 작가로, 그리고 남은 한 사람은 서른셋의 '최연소' 교수가 되었다...



오늘은 그 '젊은 교수'에 대한 일화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사실은 '남동생' 이야기다. 그를 곁에서 지켜보 그야말로 방탄소년단의 노래 제목 그대로 '피. 땀. 눈물....' 이 느껴진다. 이 이야기를 다 읽어가셨을 무렵 당신의 마음속에 부디 작은 '희망' 하나 건져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번 주엔 이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희망이라곤 눈 크게 뜨고 찾아봐도 도저히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이미 무너진 공교육 시스템과 '가진 자가 더 잘 먹고 잘 사는' 격차가 더욱 벌어지고 마는 현 자본주의 시스템을 개인이 쉽게 바꿀 수 없는 세상이라 할지언정. 흙수저로 태어났다고 해서 열망이나 꿈, 살고자 하는 삶 마저 처음부터 흙수저의 시선으로 살아갈 필요는 없다고 본다. 가진 게 없어서 못한다는 편협한 시선에 갇히지 않기를, 부디 씩씩하게 세상에 뛰쳐나오시길 바라는 마음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한다.






벌어먹고 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동생은 유소년기에 노는 걸 좋아했다.

다행히도 그 시기에 인생 종 치기 십상인 허세 가득한 놀이질 (예컨대 음주 흡연 폭력 가해 등)  하지 않았다.. 다만 운동을 좋아해서 주야장천 방과 후엔 축구하러 나가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선수가 될 생각은 없었지만 하여튼 취미 치고는 정말 열심히 놀았다.



바닥을 기진 않았지만 공부를 정말이지 '못' 했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성적이 안 좋았다. 한데 신기하게 부모님은 크게 걱정하거나 성적으로 닦달하는 편은 아니셨다. 그래서일까. 나와 동생은 공부를 좀 못해도 먹고사는 데 지장은 없겠구나 생각하며 참 태평하게 자랐던 것 같다.. (여담이나 요즘 SKY캐슬 시대에 나의 부모님 같은 성향은.. 위험한 걸까. 모르겠다. 무릇 슬퍼지려 한다.)



일반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동생에게 대학은 가기'는' 해야 하는 곳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 대학, 갈 거야?

- 가긴 가야겠지. 가고 싶긴 해.

- 갈 순 있고? ㅋㅋ

- 가서 축구할 건데 왜 ㅋㅋ 걱정돼?

- 아냐. 가야지. 내 동생.. 누나랑 같이 가자.  

- 누난 공부 잘했잖아.. 난.. 누나 정도면 고맙지



내색 안 했지만 여간 고생이었을 것이다.

중학교 때까지 뻔질나게 놀던 동생은 그 흔한 학원 한번 다니지 않고 입시를 치러낸다 했을 때 정말 애쓴다 싶었다. 기특도 했지만 그만큼 짠하기도 했다. 기하급수적인 상승세를 탄 편은 아니었지만 동생은 조금씩 성적을 올려내고 있었다. 점수라는 숫자에 특별히 좌절하는 성격은 또 아닌 보였다. 아주 느리지만 조금씩 올라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고 3 봄방학.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동생은 아팠다. 꽤 심각하게.

방과 후 자율학습시간에 있어야 할 동생이 갑자기 병원에 실려 갔다. 아르바이트를 하다 말고 당시 부동산에서 일하시는 엄마를 따라 급히 쫒아갔었다. 그때도 별 대수롭지 않은 표정의 담담한 동생과는 달리 친정 엄마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셨었다.



- 어떡하니. 고 3인데....

- 엄마..... 울지 마. 괜찮을 거야.

- 미안하다. 엄마가 좀 더 신경 쓸걸. 일 하느라 너희들 못 살폈어...

- 누나...

- 너 알지? 이거 별 거 아냐. 약 먹으면 돼. 괜찮아. 믿어.

- 응. 나는 진짜 괜찮은데 엄마가 너무 많이 울어서 좀... 그렇네.



성 사구체신염 신증후군이었다. 

진단도 비교적 간단하고 진행도 빠르며 완치가 많아 걱정스런 질병은 아니라곤 하나 진단이 늦거나 치료가 부적절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고, 만성화되어 완치가 힘든 상태가 될 수 있는 병이었다. 다행히 수술을 할 수준은 아니고 다만 병원에 몇 달 입원하면서 약물 투여를 하고 지속적인 약 복용과 철저한 식단관리가 필요했다. 이때부터 우리 집 모든 음식은 저염식이 되었고 그건 어느새 모두의 식습관이 되었버렸다. (엄마가 고생을 꽤 하셨다. 어딜 가나 엄마들은 고생이다....) 



문제는 입원 후 약물 투병생활을 몇 달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수험생에겐 쥐약이나 다름없는 선고였겠고 부모님은 동생이 대학에 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한데 나는 좀 달랐다. 동생이 어딘지 모르게 해낼 것 같은, 그것도 엄청나게 잘 해낼 것 같은 소름 끼치도록 묘한 기시감이 들었었다. 그건 수능 D-100일을 남겨 두고 동생에게 축하 파티를 하러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떡을 사 가지고 동생이 입원한 암병동 센터로 찾아간 날이었다. (이 당시엔 D-100 일 남기면 떡을 돌리는 게 관례였다. 그러면 철떡 붙는다나 뭐라나.)



아직도 기억한다 그 날. 비어있던 한 편의 침대를.

동생은 앉아서 뭔가를 읽으며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참고로 나와 동생은 주로 읽고 말하며 공부하곤 했다.)  당시 6인실에서 생활했던 동생 주변 분들은 50-60대 후반의 경제적으로 약간 뒤처진 느낌의 (파트타임 간병인을 쓰거나 가족이 보이지 않은) 각자 사연은 다르지만 꽤 중증 환자분들이셨고 그 날은 5명이 있던 침대 중 한 개가 비어 있었다. 찾아갔을 침대 한편은 비어 있었다.




- 옆에 아저씨는?

- 죽었어.. 오늘 새벽에... 돌아가셨어.

- 아....

- 누나

-... 응

- 나... 공부할 거야. 돈 없으면 일찍 죽는다. 그 아저씨 좀 더 일찍 오면 살 수 있었대... 다 수군댔어.

-.....

- 공부 졸라 팔 거야. 두고 봐. 축구하러 가는 게 아니라 졸라 잘난 놈 돼서... 그래서..

-....

- 도와줄 거야. 나 같은 애들... 저 아저씨 같은 사람들.... 누나. 나 사실 여기서 졸라 짜증 나는데 참을 거야. 버틸 거야.

- 그래. 버텨. 내가 도와줄게. 뭐든... 필요한 거 있음 말해.

- 어. 두고 봐라..



처음이었다. 동생이 그렇게 울면서 고래고래 고함치듯 말했던 적은.

그리곤 병원에서 공부를... 정말이지 눈에 불이 나는 것처럼 하기 시작했다. 난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어쩌면 남동생의 잠들어 있던 내면 속 잠재력이라는 거인을 건드려 터져 나오게 만든 티핑포인트는 바로 그 병원에서의 시간들이 아니었을까. 꽤 이른 나이에 '죽음'의 경계를 간접 체험한 것. 그게 동생을 눈 뜨게 한 것 같아서.. 마음 아프지만 그리 생각된다. 죽음이라는 가치는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병원을 다녀본 사람은 삶에서 뭐가 중요한지도 잘 아는 것 같다...







결국 동생은 해냈다.

'말보단 실행'에 앞섰던 동생에 비하면 나도 한 실행력 하는 편이라지만 감정적인 데다가 기복도 심한 편인데 반해 그는 이성적이고 냉철한 편이라 감정 기복이 적었다. 이것도 어쩌면 실행에 힘을 실어 주는 중요한 성장 포인트로 보인다.



그에게 흔들림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짧은 시간 내 투병 생활 지속하면서 입시 공부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특했는데 당당히 원하는 골을 이뤄낸 동생은 그 이후로 좀 많이 바뀐 것 같았다. 대학 입학했어도 다른 과 친구들처럼 소위 꽃다운 청춘을 사교적으로 즐기기보단 뭐랄까 좀 재미없다만 뭐에 미친 사람처럼 공부만 정말이지 '디립다' 팠다. 아마 그것밖에 할 게 없다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 같았다. 연애 술자리 담배 등등의 것들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것들이었다. (이것도 성장 포인트. 라 하기엔 흠... 연애는 젬병 그건 팔자소관이지 싶다만)



하늘은 정말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와 운도 건네주는 걸까.

그 무렵 동생은 군 면제 판정을 받았다. 동생을 비롯한 식구들에겐 정말 힘들었던 시간이 전화위복이 되는 순간으로 보였다. 면제 판정받던 날, 엄마는 많이 우셨다. 아마 그 병이 면제가 되는 수준으로 판정받기 까지 친정엄마가 꽤 큰 마음고생을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시간'을 얻게 되었던 동생은 허투루 쓰지 않겠다고 식구들 앞에서 확언한 적이 있다. 반드시 공부로 승부 보겠다고 했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솔직히 설마 설마 했다. 정말 공부로 승부 낼 줄이야...



공대에 합격한 지 엊그제였는데 어느새 동생은 경영학을 복수 전공한다고 했다.

전공 학부 공부만으로도 벅차오를 텐데 꽤 다른 분야의 것에 도전하려는 그가 그저 놀라워 보였다. 사실 복수전공이라는 것에 불은 지핀 게 나긴 했었다만 그래도 설마 할까 싶었다. 나도 당시 영문학과 일본어를 복수 전공하며 나야 뭐 둘 다 비슷한 언어 계통이니 어렵진 않았고 어찌어찌하다 보니 자립으로 장학금 타서 교환학생을 가게 되었는데 그걸 지켜본 동생도 약간 자극(?) 받았던 건 아닐까 싶다만 (내 속 아닌 남의 속 알턱은 없고... ) 여하튼 그런 게 가능하다는 걸 알고 나서 동생은 해보겠다고 했었다. 속된 말로 입에서 쉰 내 날 정도로 죽을 맛이기도 했다지만 결국 휴학 한번 하지 않고 동생은 스트레이트로 학사 과정을 무사히 졸업하고 두 학문 모두 이수를 완료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름 대면 알 법한 Top 대학교 곳곳의 석사 시험에 모두 패스하는 기암을 토해낸 동생은 고민 끝에 그대로 SNU에 남기로 했다. 그는 알 수 없는 미래를 불안해하기보다는 그냥 생각하던 대로(?) 대학원에 가는 게 당연했다. 마치 이미 정해진 길을 그저 자연스럽게 가는 사람 같았다. 그때 종종 물었다. 뭐 하고 싶어서 그렇게 공부하냐고.



- 누나. 때가 안 됐어. 기다려봐. 내가 어디까지 올라가는지.



동생은 종종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고 했었다.

마음속에 뭔가 커다란 열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도대체 그놈의 때라는 게 뭔지. 그래도 피붙이를 믿어 주는 게 우리 식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집밥과 칭찬, 다독임과 신뢰.. 우리 식구가 동생에게 쏟아낸 에너지의 전부였다. 이것도 생각해보면 성장 포인트가 아닐까. 혼자만 잘났다고 잘 되는 게 없는 세상 이치일 테니...



그리고 석사 이후 박사까지 그는 의지대로 스트레이트로 진학했다.

포닥 (포스트 닥터)을 갈지 대기업에서 오퍼 받은 취업을 할지 고민 중인 상태였다. 한데 신기하게 동생이 면접 봤다던 누구나 들으면 알만한 2대 기업에서 모두 박사 채용 러브콜을 받았고 고액의 연봉과 처우가 우수했던 기업에 가겠구나 싶었지만 의외의 선택을 했다. 연봉은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대신 '전공분야'를 살릴 수 있는 기업체에 진급자 레벨 수준의 취업을 했다. 동생 나이 스물 아홉이었다.



동생은 기업체에서 근 4년을 일하다가 어느 날 식구들에게 이직을 한다고 했다.

나로선 또 놀라웠다. 소위 말해서 그대로 눌러앉으면 승진과 고연봉은 따놓은 당상이었는데 국가 기관 산하 정부 출원 연구소의 연구원 자리를 지속 try 했다고 했다. 그리고 합격하고 나서야 그 소식을 식구들에게 알렸던 것이다. 말보다 행동이 대부분 먼저였던 동생은 섣부른 김칫국 마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생각이 서면 곧장 행동해 내고 고통의 과정을 거쳐 결국 이뤄내는 식... 뻔하지만 결국 이게 본질이고 진리인 것 같다. 시련 없는 성장은 정말 없다...



심해 깊은 곳을 가려면 끊임없이 들어가야 한다. 움직이며.. 그래야 볼 수 있는 거다.




그리고 지금. 그는 서른셋에 다시 이직했다. 대학교 '교수'로.

식구들 모두 합격 발표 소식을 듣고 기염을 토했다. 그가 말하던 '때'가 바로 이 날을 말하는 건가 싶어서 나는 정말이지 소름이 끼쳤다. 사실 떨어질 줄 알았다고 웃으며 담담히 그간의 과정을 고백하는 동생이 여전히 신기하기만 했다. 면접에서 1:1로 붙은 상대편이 MIT였었나.. 아무튼 외국 유수 대학교의 40대 초반 외국에서 모두 석박사를 진학한 소위 있는 집 자식의 엘리트코스 화이트칼라였다고 했다. 그럼에도 어찌 네가 붙은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나로선 입이 딱 벌어지는 말을 해 주었다..(운도 좋았지 싶다. 좋게 봐주는 사람들.. 객기로 보이지 않았을 타고난 운)




- 누나. 면접 때 흥정했지 뭐. 떨어질 거 각오하고 미친 척, 하고 싶은 말 지르고 나온 거지. 나 같은 흙수저도 할 수 있다는 걸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눈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말했어.


스펙만 좋으면 뭐하냐고. 실제 가르치는 교단에 서는 교수라는 사람들은 본인 뽐내는 게 아니라 배우는 학생들이 뽐낼 수 있도록 잘 지도하는 게 사명 아니냐고. 무엇보다 내 교수님 추천도 한 몫했고. 교수님이 나 잘 챙겨줬잖아.. 백도 뭣도 없는 내가 열심히라고 도와주고 싶다고..


누나. 나는 운도 좋았어. 그때 아팠던 거부터 시작해서.... 아무튼 좋은 교수님 만난 것도 큰 복이지. 나도 누구한테 그런 교수님 되고 싶어서... 내가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다고 그냥 지른 건데. 붙을 줄 몰랐는데 결국 붙어 버렸네. 이제 다리 뻗고 잘 수 있겠어.






그는 오늘 (이 글이 읽히는 금요일) 모 대기업에 기술 강의를 하러 간다고 했다.

헌데 놀라운 건 동생의 예전 박사 학위 시절 특별히 아껴 주셨던 그 교수님이 이름만 대면 알법한 대기업 부사장님으로 최근에 발탁되셨는데 그런 그가 동생을 지목하며 강의를 먼저 해 달라는 오퍼가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이제 막 새파랗게 젊은, 조교수 타이틀을 단 동생에게 말이다. 왜일까...



나의 거침없는 상상은 이미 날개를 달았다.

그리고 난 아마 평생 동생을 마음 깊이 응원하고 지지할 것 같다.. 나와는 또 다른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그의 어깨에 보이지는 않지만 더 큰 세계로 비상하려는 날개가 이미 조금씩 자라고 있는 것만 같아서...



동생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그리고 나는... 이제 당신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이 말을 건넨다.

헤밍웨이가 그랬듯이 가지지 못한 현재를 생각할 때가 아니라고. 현재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할 때라는 건 정말 맞는 말이다.


동생은 가지지 못한 체력, 환경, 시간, 물질적 풍요 등등의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냥 묵묵히 그것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도록... 신념 하에 움직일 뿐이었던 건 아닐까. 정말 힘들어도, 해낼 때까지. 끝까지 말이다.



당신이 끝까지 해내시길 기원한다.

그리고 나 또한 될 때까지 해 보고자 한다. 오늘의 조용한 나의 과업들을...

부디 행운이 따르기를 바라며.



혼자 노를 저어간다는 게 외롭지만, 그럼에도 젓다 보면 뭐든 보이는 게 인생 아닐까 싶다.. (어렵지만..)





내일, 오전 11시에 발행될 이석현 작가님 이야기는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으리라 '입니다.
역시 이번에도 타이틀에서 찾아오는 진한 여운 (일단 웃어보는 것으로...!)  기대해 주시길.

나이도 직업도 다른, 7명이 펼쳐내는 성장 스토리
매일 오전 8시. (주말 오전 11시) 성장의 비결이 궁금하신 여러분은 이제 '구독' 하게 되실 거라고.
지금부터 마법의 주문 들어갑니다. :)

한 걸음 더 성장하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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