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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an 08. 2019

#6. 피해자는 없어야 한다

낭만적 연애 그 후의 일상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성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익혀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한두 가지 면에서 다소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쾌히 인정할 줄 아는 간헐적인 능력이다. 


- 낭만적 연애 그 후의 일상 - 








바람직한 외도라는 게 가능한 걸까. 

설거지를 멈추고 나도 모르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날 정태민이 좌석 벨트를 채워주려 했을 때 닿았던 그의 손가락이 내내 생각이 나서였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깊어질 무렵 지우의 울음소리에 찬물이 확 끼얹어져서 현실 세계로 무사히 다시 진입할 수 있었다. 



띵동. 그이가 돌아왔다. 밤 11시가 훨씬 지나가고 있었다. 



- 왔어? 밥은 

- 먹었지. 하아... 혜연아. 그 정태민 대표. 건축과 나왔어? 경영 전공했다 하지 않았어? 

- 왜? 무슨 일 있었어?




남편의 입에서 그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약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애써 모른 척해야 한다는 게 더 욱신거리지만 내색은 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궁금해하다가 깨달았다. 이미 신경은 그에게 초점 맞춰져 이미 곤두서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부인하지 못했다. 




- 아니, 큰 일은 아니고. 설계 도면이랑 3D 애니메이션 같이 보여주면서 PT 했더니 그 양반 참 

- 왜. 뭐라 해?

- 아니 그게 아니라 자기가 생각한 아이디어대로 나오지 않았다고 하면서 오히려 나를 가르쳐 주더라고. 설계를 본인이 해 왔어. 스케치 해왔더라고. 가관이야. 근데 하... 이거 건축사 자격증 반납해야겠어. 잘하더라 새끼. 

- 아...

- 생긴 것도 기생오라비처럼 생겨갖곤 하여튼 뭔가 기분 안 좋다니까. 

- 인상 좋지 않아? 젠틀하고 소프트한 편인데 

- 뭐라고 소프트? 야. 그건 아이스크림 먹을 때나 쓰는 단어야. 편집 주간이 단어 선택 제대로 해야지

-... 나랑 일할 땐 안 그래. 

- 뭐?

- 아.. 아니에요. 책이랑 원고 얘기할 땐 또 다르다고. 아무래도 보는 눈들이 많으니까 회사에선. 

- 아무튼 난 그 자식 맘에 안 들어. 이 프로젝트 빨리 끝내려고 노력 중이다. 당분간 야근 많을 거야.. 

- 도우미 아주머니 이번 주 휴가신데 어쩌지. 나도 밀린 마감 있는데 

- 장모님 SOS 안돼?

- 자긴 뻑하면 우리 엄마 찾더라. 꼭 이럴 때만 찾아 왜? 

- 그럼 미국에 계신 우리 엄마 부를까?

- 됐어.... 그만하자. 다툴 기력 없어. 내일 지우 어린이집 소풍이라 일찍 일어나서 도시락 만들어야 돼.



슬며시 뒤에서 이미 허리를 잡고 안으려는 그의 손을 기분이 나쁘지 않은 선에서 예의 바르게 거절을 할 궁리를 이미 해야 한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 채고 마는 내가 때론 원망스럽다. 



- 우리 하자. 

- 뭐?

- 아니. 우리 혜연인 그렇게 정색하고 말 따박따박 할 때가 참 매력넘친단 말이지. 

-.... 지금 이 포인트에서 그 대사 아웃이야.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거! 뭔지 알면서 또 그래? 

- 알았어 알았다고. 칭찬을 해 줘도 하여튼 튕기기는. 

-..... 그 여자랑 할 때도 이랬니? 

-... 뭐? 

- 아니다.. 

- 뭐야 정혜연 갑자기 뜬금없이 다 지나간 그 애기는 왜 해?

-... 자기가 나 안 건드렸으면 나도 말 꺼내지 않았어

- 요즘 이상해 왜 그렇게 예민해. 그리고 그 건 걔가 먼저 

- 누가 먼저인 게 중요한 게 아냐. 결국 두 사람의 몫이야. 인정해. 난 그 여자 원망 안해. 남자들의 본능을 원망할 뿐이지. 

-...그래. 미안... 여전히 난 너한테 미안해야 하는구나. 사연을 다 설명했는데도 자백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래 다 내 잘못이야. 결국에 널 상처 입혔으니까. 

- 그렇게 쉽게 꼬리 내리지 마. 그게 더 싫어. 그리고 나 상처 받은 건 아냐. 그냥 약간. 아무튼 상처 아니니까 너무 맘 상해하지 마. 

- 정혜연답다...난 그런 네가 더 무서워. 남 대하듯 대해서. 

- ... 남이 아니라 식구야. 당신을 진짜 남같이 대했다면 나 이렇게 말 안 섞어. 





다툼의 기승전결 중 대부분의 과정에서 부딪히는 포인트는 다름아닌 육아였다. 

아이 있는 기혼 생활에서 육아는 그리 썩 좋은 아이템은 되지 못한다. 최소한 남자와 여자라는 개개인의 동물적 감각이 살아 숨쉬는 사랑의 경계 안에서는. 우리가 행여나 다투기라도 할 때면 나의 일방적인 논리적 압박에 그가 마지못해지고 마는 식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반복되고 있었다. 


물론 지우는 아직 손이 필요한 나이이고, 우린 둘 다 일을 하는 부모였기에 육아로 인한 경미한 다툼은 어쩔 수 없는 이치이다 싶다만 그 날 따라 남편이 먼저 꺼낸 정태민이라는 이름이 들렸기 때문에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밀려오는 탓에 괜한 화를 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괜한 자격지심과 동시에 그와 남편 사이에서 묘한 비교를 하게 되자마자 어리숙하게도 이기적이고 교활한,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그 바람에 괜히 남편에게 짜증을 한 껏 부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 누르고 있었다. 



- 건축도 할 줄 알았나.. 하긴 원고 안에 남주 캐릭터가 건축사였던 것치곤 묘사가 되게 정교했는데.. 뭐지. 그 사람. 하여튼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라니까. 



생각이 다시 밀려오려고 할 무렵 일부러 지우의 방에 찾아갔다. 

나를 잡아주는 건 언제나 지우였다. 딸아이의 잠든 얼굴을 보고 있으면 세상이 다 멈춰 버리는 기분이다. 남편과 다툴 때도, 미국에 계신 시엄마에게조차 랜선으로 회사 그만두라는 식의 예의 바른 듯 하나 도무지 듣고 나면 언짢고 기분마저 나빠 오는 후폭풍 압박을 강요받을 때에도, 아이 돌봄 육아 자청하다가 허리 삐끗해서 병원에 실려 갔었던 친정엄마 간호하다 울컥 눈물이 치솟을 때에도 지우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는 시간만이 내게는 만능 특효약이나 다름없었다. 



- 지우야... 엄마 왜 이러니 정말. 바보 같아. 그치..



아이를 위해서라도 마음을 다잡아야 했지만, 생각이 나는 걸 막을 도리는 없었다. 이미 어떤 게임은 시작되었고 누구 하나 pause 버튼을 누르기 전까지는 이 MMGRPG 같은 게임은 도통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찾아오는 거대한 바다의 파도가 일렁이는 것. 세차게 일렁이다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지는 것. 

 




바람직한 외도라는 것은 어쩌면 바람직한 배우자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저질러야 완벽히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나와 남편은 사실 그리 안 좋은 배우자 상에 속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다만 각자의 삶을 존중해주며 잠깐 다른 길로 갔었던 사람들이라고. 그가 먼저 갔던 길을 나도 한번 넌지시 가보려 하는 것 단지 그뿐이라고. 어느새 허무맹랑한 자기 합리화가 똬리를 틀고 시시때때로 생각의 문 앞에서 나를 덮치려 할 때. 



그가 나타났다. 그리고 난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그에게 남편 이야기를 꺼냈을 때 어떤 표정으로 그가 나를 바라볼지 사실 내심 궁금해하면서. 



- 혜연 씨. 오래 기다리진 않았죠? 무슨 일로 절? 원고에 문제 있나요? 

-... 아뇨. 원고는 완벽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오늘은 좀.... 사적인 애기입니다만

- 좋은 대요. 사적인 애기. 혜연 씨 이야기라면 환영입니다-. 뭐 시키셨어요?

- 아뇨 아직..

- 생각해보니 뭐 드시는지 물어본 적이 없네요. 

- 그러게요. 생각해보니 긴장타는 말만 해댔지 차 마신 적이.. 정말 없네요 

- 하하 그랬었나요. 난 긴장되는 말 한 적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

- 미안. 농담입니다. 뭐 드실 거죠?

- 전 얼그레이..커피를 사실 잘 안 마셔요. 어쩌다 한 두 잔이 고작이라.

- 어? 우리 비슷한 거 하나 생겼네요. 저도 커피 잘 안 마십니다. 

- ... 사업 하다 보면 자주 마셔야 되지 않나요? 

- 그렇죠. 아무래도. 그래서 이게 있지 않습니까




텀블러가 보였다.  

그와 잘 어울리는 진한 네이비색 '골든아워'라고 적혀 있던 한 500ml 남짓의 고급스러운 텀블러가 이미 그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되었다. 댄디한 그와 물건도 참 잘 어울리는 세트 마냥 그의 곁에 붙어 있었다. 




- 에코 프랜들리 하시네요 

- 하하. 그런가요. 이게 익숙해서. 저 보기보다 짠돌이라고 그랬었잖아요. 

- 그러게요. 대단한 짠돌이 나셨네요. 그게 사업 성공 포인트?

- 혜연 씨.. 부드러워졌군요. 농담이. 

- 아.. 뭐 아무튼. 저는.. 얼그레이를..

- 차 좋아해요?

- 네.. 커피 별로 안 좋아하니까 주로 차를 마시죠. 

- 네. 그럼 저도 같은 걸로 먹도록 하죠. 잠시만요 주문하고 올게요. 



얼그레이 한 모금이 넘어가고 쓴 물이 밀려오는 느낌에 잠깐 미간을 찡그리며 말을 떼어냈다. 



- 지금 사무실 신축 공사 설계 작업 들어가셨죠?

- 어? 혜연씨가 어떻게 그걸 알죠? 설마 

- 네?

- 스토커...?

- 설마요. 

- 설마가 사람 잡을 줄 알았는데 아쉽군요. 

-... 그 건축설계사 사무소. 저희 남편이에요. 

- 아...



그의 눈이 잠시 흔들리는 게 느껴진 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 그이가 어제 말을 하더라고요. 작가님 이야기를 

- 아... 몰랐어요. 김민성 소장님이 남편분 되신다니... 정말 몰랐습니다. 

- 네... 모르는 게 당연하겠죠. 아는 게 이상한 거고.

-... 무슨 일 있었나요?

- 아뇨. 전혀요. 아무 일 없었어요 다만. 

-...?

- 건축도 공부하셨어요?

- 네?

- 그냥 그게 궁금해서... 북클럽 다음 책 선정도 논의할 겸.. 사실 궁금해서 찾아왔어요 

-.. 그게 다예요?

- 네. 다예요. 

- 공부한 적은 있어요. 미국 유학 갔을 때 잠깐. 취미 삼아 설계 도면 짜는 걸 배웠는데 재밌더군요. 그냥 좀 아는 걸 말씀드린 거였는데 혹시 뭐 기분 언짢으셨었나 보군요. 김 소장님께서. 

- 아뇨.. 신랑은 일에 있어서는 프로페셔널해요. 저도 신뢰하는 편이고요 

-... 사랑하시는군요 남편분. 

- 사랑하니 결혼했겠죠?



그가 잠시 멈칫 하더니 몇 초 간 우리 두 사람의 눈이 마주했다. 누구 한 사람 먼저 피하진 않고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찰나의 정적을 뚫고 그가 말을 다시 이어 나갔다. 



- 그럼 지금은요? 



나 또한 순간 멈칫했지만 다음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하나를 고민하는 나 자신이 우스꽝스럽고 유치하고 수치스러워서 쥐구멍에 숨고 싶을 지경이었다. 



- 사랑에 영원이 있을까 싶네요. 유통 기한 있지 않나.. 

- 전 믿어요. 그래도 영원히라고 생각될 만큼 오래 기억되는 사람은 있을 거라고. 

- .....순진하시네요. 



순간 정태민의 말이 참 근사해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마음이었다고. 

심장이 그만큼 떨렸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오만방자한 말이 새어 나와서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어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순진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시종일관 부드러운 미소를 갖고 있던 그의 표정에 약간의 변화가 일더니 꽤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계속 예의 주시하며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날카로운 눈매와 선명한 눈썹이 더 선명하게 시야 안에 들어오는 순간, 그의 입가에 보이는 옅은 미소로 감춰진 진지한 눈빛조차도 숨이 막힐듯해서 심장이 터져 버리는 것 같은 두근거림을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써 도도한 표정을 짓고 있어야 했다. 



- 그러고 싶다고 믿는 거죠. 믿으면 그대로 될 테고요 

-.... 결혼 안 해 보셨잖아요. 

- 해봤어요

- 뭐라고요? 



귀를 의심한 순간 그가 개구쟁이 소년처럼 웃으며 말을 건넸다. 쥐락펴락할 수 있는 상대가 어느새 되어 가는 기분으로 그의 이야기에 어느새 주목하고 있던 내가 나중에서야 바보 같이 느껴졌지만. 



- 책으로 해봤다구요. 

-...

- 다음번 북클럽 선정 책은 고전 대신 가볍게 이 책 어때요. 



작가여서 그런지 언제나 펜을 가지고 다니는 그가, 테이블 위에 비치된 휴지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 읽어봤어요?

- 알랭 드 보통.. 네. 읽어봤어요

- 잘 됐네요. 다음엔 이 책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도록 하죠. 

- 책 선정 권한은 시삽인 제게 월권 넘기신 거 아니었나요?

- 이번엔 대표 권한입니다. 

-....

- 아무튼 김 소장님의 와이프 이셨다니.. 사실 좀 놀랐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않나요 

- 뭐라고요?

- 혜연 씨. 착각하시는 게 하나 있는데 말입니다.

- 네?

- 저희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즉 놀라실 만한 일.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 아...

- 그리고 저는 혜연 씨의 몸이 궁금하지 않아요 

- 뭐라고요? 그 무슨 무례한

- 저는 당신이 살아온 시간이 궁금해요. 그래야 하는거 아닌가. 진짜 호감있는 대상한테는.. 

- 아... 

- 피해 안 드리겠습니다. 혜연 씨. 그러니 너무 그렇게 무서워하지 말아요

-..... 피해자는 없을 거예요. 없어야 하니까. 

- 네. 제가 그렇게 할 겁니다. 걱정 말아요.. 






현실에 지쳐 도피성 사랑을 찾는, 마치 외도라는 게임에서의 한심한 참여자 치곤, 어딘지 모르게 달랐다.  

외도 이전에 연애라는 단계가 있다면 그리고 그 연애라는 단계 이전에 썸이라는 게 있다면. 우리는 서로가 현실이 고달파서 자연히 서로가 주는 일시적 위안에 그저 한없이 매달리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으로 비칠지언정, 사실 정태민이 나를 그리고 내가 정태민과 주고받는 언행들과 표정엔 어딘지 모르게 귀한 그릇 취급하는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기에 싸구려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마치 몸을 만지는 것보다는 서로의 살아온 시간을 만지는 것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은 그런 말도 안 되는 관계..



이 게임에서 피해자는 없어야 했다. 

즉 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피해자가 필요할 테지만 다시 말해 피해자가 없는 행위는 곧 죄가 아니라는 것. 나의 오랜 상상이자 생각이었다. 완벽한 외도에 대한 생각. 그로 인한 수혜자만이 결국엔 남을 뿐, 피해자는 없어야 한다는 걸, 그도 아는 눈치였다. 그는 나보다 더 뛰어난 수완을 가진 사람인가. 



돌아가는 발걸음은 무언의 승리에 취해서 가벼울 줄 알았으나 어딘지 모르게 더 공허하고 외로워졌다.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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