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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Apr 25. 2019

바라는 그 날 까지는

보고 싶어서. '그 날' 의 나를.  

그때 “안 갈래요.”라고 대답했더라면, 우리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영원히 궁금해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험에 대해, 미지의 것과 가능성에 대해 “네”라고 대답했다는 점이다..


- 멀고도 가까운 - 





삶의 고비들을 건너게 해 주는 건 언제나 '이야기'를 쓰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나는 오늘 마주한 고비를, 이렇게 결국 글로 토해내고 만다. 결국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펑- 하고 터져 버렸다는 핑계 삼아. 분노와 고통은 오늘 나를 삼켜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몇 시간 전 이윽고 저격 대상'을 찾아냈다. '그'가 당첨되었다. 



오늘도 고객님과 - 그것이 내부이든 외부이든 조직이든 일이든 그렇든 말든 - 이러저러 그래서 저래서 의 이유들로 인해 평일이면 이른 아침을 제외하고 요 근래 얼굴 한번 제대로 볼 수 없는 그이를 향해 버리고 말았다. 사실 더군다나 공교롭게 저격대상의 이유가 엉뚱하지도 않았다. 요 몇 달 나를 조용히 옥죄어온 '그의 식구들'로 인한 나의 '설득되지 않은 고개 숙임'을 여전히 암묵적으로 종용하는 배우자였기에. 그 사유가 저격 대상이 되기에 충분치는 않아도 반대로 그리 엉뚱하지많도 않은 이유라면 이유.. 였겠다. 



일방적인 장문의 톡을 보냈다. 아니 보내 '버렸다' 

밤 11시의 톡을 아마 어떤 모임 자리에서 읽었을 - 1자가 지워졌다. 라인보단 역시 읽었단 표시가 나는 카카오가 때론 최악이면서도 최고다 - 그의 마음을.... 알면서도 나는 악녀가 되어 버리고 만다. 어떤 생각들에 엉뚱한 분노가 기어올라왔으니까. 나는 도대체 얼마나 악처가 돼야 속이 시원해지고 마는 걸까. 남들은 못 벌지 않은 배우자 - 더군다나 잘 버는 범위에 속한다면 - 에게 '내조'라는 걸 한다는데... 나는 

정말이지 역주행 좋아하는 또라이던가...



왜 대한민국 영유아 자녀를 둔 기혼남녀들은 언제나 늘 터지는 문제들과 타이밍이 설상가상이란 말인가. 빌어먹을. 이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차오를 무렵, 그이와 나는 밥을 다 먹어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나는 일부러 늦게 먹으며 그에게 대화를 계속 건넸다. 그러면서도 체할 뻔했지만 일부러 웃으며 그의 안부를 묻고 오늘의 일정을 궁금해했다. 



그게 내 사랑의 모자란 표현이었기에... 그렇지만 이것도 내 생각이겠다. 

그의 생각을 알 턱이 없다. 그의 마음은 나의 것이 아니기에. 예상되는 답이 들렸고 그러려니 했다. 애써 이해를 하려 했지만 이상하게 서글픈 것이 느낌이 좋지 않았다. 오늘 꼭 무슨 일이 생겨버릴 것 같은 그런 기시감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 무슨 일이 생겼다... 맙소사. 돗자리 깔아야 하나 싶다...



대낮에도 깜깜한 느낌이라면... 그래서 저녁은 또 금방 찾아 오기도 한다. 마음이 저녁이면, 이미 저녁이 된 셈이다. 



요 근래 회사의 감정노동이 극심하던 찰나 안 그런 '척'을 잘 해내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하세요. 제가 부족하죠..라는 말을... 쌈닭처럼 전투적인 '여직원'으로 살면서도 한편으로 고개 숙이는 것도 참 잦은 요즘이다. 그러다 종종 나는 어떤 자괴감에 빠져들고 만다. 자존감이 도둑맞는 기분...이 밀려오고 만다. '내가 왜' 라는 이 뻔뻔한 자기 방어..말이다. 그럴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너그러운 '그럴수도 있지 뭐' 라는 대수롭지 않게 쿨내 진동하는 마인드는 언제쯤 단단해질까. 



가스 라이팅이라는 걸 미처 인식하지도 못한 채 죄인이 되는 요 근래 일상 덕분일까. 

그걸 조직 내 누군가는 '내공 훈련' 한다는 말로 겉포장된 위로를 건네며, 원래 밥벌이가 다 그렇다며, 인생살이가 다 그런 것이라는 올드한 위로를 나는 애써 부인하지 않았다. 다만 듣고 흘렸다. 그러고 싶었다. 내공이 뭐 이리 구질구질해야 하는가 싶어서. 그래. 삶의 '훈련'이라면 좋다. 이것도 훈련이라 치자. 



뒷담화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걸 결국 멀쩡한 두 귀로 들었을 때. 

그야말로 '병신' 이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그래. 난 어쩌면 스스로 '병신'을 인정하고 만 그 순간, 그 오후부터 무너졌었던 걸지도 모른다. 12년 차. 여자 직장인 잔혹사를 겪으며 있는 소리 없는 소리 숱하게 들어서 이젠 이골이 나고 별로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고 있었다. 신입 때부터 결혼 후 그이와의 우당탕탕 하는 신혼 초까지도. 꽃뱀, 도둑년, 어린 여자애, 목소리만 커서, 쌀쌀맞아서, 제멋대로여서, 미친놈, 좀 이상한 여직원 등등 등등 등등. 이젠 회사 속타인들에게 못 들을 말도 없지 싶었다고 생각하고 살았으니 별로 상처 받지 않은 영혼이 이젠 정말 다 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 근데 쓰면서도 여전히 나는 분노한다. 왜 이 회사라는 곳엔 한가한 이들이 많은 것인가. 일만 해도 부족한데 몇몇은 정말이지 말이 많다.... 시끄럽다..) 



상처 받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는 건 완벽한 착각이었다. 나는 여전히 상처 받는 영혼이라는 걸.

귀로 직 타를 날려주신 지인 덕분에 결국 나는 나 자신을 철저히 뼛속 깊게 인정하기 시작했다. '나'만 생각하는 '바보'였다는 걸. 전혀 뜻밖의 무리들의 - 나에 대해 잘 '모르는' 그리고 친하다는 형용사가 붙을 만큼의 관계는 더더욱 아닌 이들임에도 - 험담, 안주거리의 여전한 주인공이며, 그것이 선의든 진심이든 그들에겐 중요하지 않고 결국 나로 인해 함께 있는 누군가가 감정 피해와 극심한 피로함과 노곤함을 견디고 있었다는 걸.... 알아 버리고 말았다. 눈치 없이 이제야 알아 버렸던 것이다. 



더 무슨 '변명'을 늘어놓기보다는 결국 침묵을 택했.. 다. 

그리고 시간이 몇 시간 흘렀을까, 다시 밀려오는 업무 메일 몇 통을 혼은 이미 쏙 나가버렸지만 이성 하나 붙잡고 몇 통 아웃룩의 수신함과 송신함을 번갈아 가며 타자기 몇 번 두드리다 보니 이제 아이들을 데리러 갈 시간이 되었다.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에너지 고갈 신호다. 힘이 들어서... 결국 참다가 마지못해 그이에게 호출을 했다.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역시 예감은 빗나지 않았다. 보기 좋게 그이에게 거절당했다. 미안함과 단호함이라는 두 개의 모호한 감정만이 배달되는 순간이었다. 정류장에서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사람이 너무 힘들어도 웃음이 때로 나는구나 싶었다. 



그래도 자생력 하나 끝내 주면..어떻게든 살 수 있다. 사막일지언정. 


땀을 뻘뻘 흘리며 육중한 두 아이들을 유모차로 하원 시키면서 눈물이 나려 했지만 대신 웃으며 동요를 부르고 아이들과 정말이지 신나게 육아 출퇴근을 마쳤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 새벽 1시가 되어 가도 아직도 오지 않은 나의 저격 대상에게 모든 감정을 엉뚱하게도 쏟아내 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톡으로. 1이 지워졌으나 읽씹 되고 말 거란 느낌도, 결국 예감은 여기에서도 빗나가지 않았다. 





나의 자존심과 자존감과 자신감을 모두 갉아먹는 게 사실은 '나'의 변해 버리고 마는 이 순간에 휩쌓여 물들여가는 핏빛 감정 탓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왜 굳이 저격 대상을 찾았던 걸까. 아니 정확히 다시 말하자면 찾고 '싶었던' 걸까.. 회사에서의 노곤한 업무 연속상과 그 와중에 충격이 아닐 수 없는 피로한 사실들을 뒤늦게 깨닫고, 또한 이 상황에서 쉽게 탈출하지도 못하는 건 모두 '나' 에게 원인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삶의 고비들이 다가오는 시간에, 살아보려 이러나 싶다. 



그의 식구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고개를 숙여야 하는 것을 강권하는 이에게 

어떤 역할이 필요했을 뿐, 한 인간을 사랑했던 걸까를 의심하게 만드는 이에게. 

가스 라이팅...인 걸까 아닌 걸까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관계에서

반대로 악착같은 에너지를 솟게 만드는 동시에 나를 살아있게 해 주는 고마운 지지자를 위해..

지지자라고 믿고 있는 그 믿음에 의심도 변명도 좌절도 슬픔도 결국 '무'로 만들려는 '나'를 위해..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지금 이 시간에 지치고 고갈되는 에너지임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키보드를 누르고 마는 것인가. 한참을 생각하다 이윽고 답을 찾았다. 



살아내야 하니까. 살고 싶으니까. 나는 바라는 '그 날'의 장면을

너무나도 간절히... 이제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으니까. 이혼 서류를 몇 번이나 작성하고 찢고, 때로 자학하고, 그러다가 자살하려 했던 어떤 날에도... 끝까지 나를 놓지 않았던 단 한 개의 장면이 있다. 



내 자궁을 뚫고 나온 핏덩이 이 두 아이들과 합법적이며 공식적으로 

함께 맥주를 마시는 '그 날'의 나를, 너희들을, 우리를 보고 싶다...



열심히 헤엄 치다 보면, 바라는 곳에 결국 도달한다. 다른 말로 즉 헤엄을 쳐야 다가갈 수 있다는 소리..다. 



그러하니. 바라던 그 날까지는 살아낼 것이다. 어디로 흐르든. 

그리고 나는 조금 더 마음을 붙잡을 생각이다. 그는 남들이 보기에도, 그리고 때로 내가 보기에도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철저히 현실적이며 또한 나쁜 사람이 사실은 아니니까. 반대로 사실 참 좋은 아빠... 니까. 이 '아빠'를 포기할 수는 없다. 다만 나는 나를 포기하지 않는 것도 문제이나, 아직은 그 무엇도 나는 포기하지 아니하려 한다. 그리하여 결정 내리는 것은 고작 이런 것들 뿐이다. 



최대한 감정보다 이성이 더 이 뇌 속에 들어가 있는 시간이 많아지도록.. 

그래서 일부러 요즘은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의 정신승리와 물리적인 실천을 행하고 있다. 경제적 자유 혹은 꿈을 이루기 위한 모든 과정들을 상상하고 기획해서 씨앗을 뿌리는 모든 행동들은 어떤 연결들과 마주하여 결과로 배달되는 중인 요즘과 마주하다 보니 나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이 고마운 작은 조짐들을 믿고..



부단히 읽고 쓰는 이유가 있다. 아주 선명한 이유가...




나를 좀 더 삶에 내맡겨 본다. 일종의 실험처럼. 

그래서 여력이 되는 물리적, 심적 여유가 닿는 순간엔 언제나 닥치는 대로 쓰고 주어지는 기회를 전부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이 열정 페이든 이용당하든 험담에 휘말리든, 오해를 받는, 비난을 받든, 고통을 받든, 눈물이 나든. 이젠 뭐든지 간에. 못할 게 없지 싶다.



밤에, 더군다나 이런 감정을 부여잡고 쓰는 글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서글프다. 

이 모든 시간들은 결국 글감이 된다는 것에 기쁘지만. 



그나저나 신은 왜 눈물샘을 준 것일까. 

이 눈물은. 언제쯤 마를까... 



생각이 그치지 않다가, 자동적으로 이성이 되돌아온다. 

그의 귀가를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지금. 저장. 그리고 곧 발행 버튼을

누를 것이다. 



#좋은 사람이란_무엇인가  



왜 자꾸 바다가 보고 싶어졌던 걸까. 이럴 때마다, 그럴 때마다.. 물결이 닮아서 그런가 싶다. 마음과 물결은 닮았다. 여러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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