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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May 20. 2019

우아함은 없다

이성으로 잠재운 욕망은 반드시 되살아난다


- 파우스트 -




최근에 성대결절 판정을 받았다.

평소 잘 가던 회사 근처 이비인후과의 최종 진단 결과를 듣고, 사실 별 호들갑이나 어떤 슬픔(?) 어릴 듯한 감정은 단시간에 찾아오지 않았다. 목감기가 좀 오래갈 뿐이라고만 생각했었고 애써 '설마' 했던 예감을 외면하려 했으나 그것이 빗나갔을 뿐...



그러나. 모든 세상의 일이 그러하듯이, 원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도 '절대'라는 부사를 나도 모르게 실토할 만큼의 어떤 얕은 우울감이 조금씩 더 선명해지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말이 많고 밝고 꽤 자주 웃는 나는 (정말 그러했다만) 말이 없어지려 하고 (물론 목이 아파서, 가래 낀 듯한 이 쉰 목소리로 쉬이 말을 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지만) 웃음보다는 무표정이 조금은 더 많아졌다는 것.



그럼에도 예외는 존재한다.

어두운 나를 철저히 차단하고 다시 웃으려, 큰 목소리로 씩씩하게 살아가게끔  만드는 대상은 변함없이 '아이들'이다. 대부분의 양육자들 - 특히 여자 사람 엄마들- 에게 흔히 일어나는 일은 나에게도 일어나는 흔한 일 중의 하나가 된 셈일까.



물기 어린 밝음..이라는 표현이 떠올랐던 건..왜였을까 싶다.



출장 중 부재인 그를 대신해야 하는 저번 주말, 급기야 일은 터졌다.

생전 토하지 않는 아이가 갑자기 연신 먹던 것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자다가 가래 섞인 기침을 하다 시작된 그 구토는 연속으로 이어졌다. 토사물의 냄새에 비위가 약한 둘째도 헛구역질을 하며 울어대기 시작했다. 사태 수습과 더불어 아이들을 임시방편으로 진정시켜놓고 난 이후, 연이은 소파 커버와 이불 빨래를 돌려놓고 병원에 다녀오려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목은 더 잠기고 아무 말도 나오지 못했다. 할 수 있는 건 전화기를 들고 친정에 도움을 청하는 일.... 언제나 그게 최선이었고 흐르는 눈물을 아이들 앞에서 결국 흘려버리고 만다.



아이 둘이 잠에 들자 전화가 울렸다


- 차가 좀 막혀. 애들 괜찮아?

- 응.. 잠들었어. 조심히 와요. 미안해..

- 원래 가려고 했잖아. 그러게 이럴 때마다 왜 맨날 너 혼자냐. 애 너 혼자 낳았냐

-....

- 됐다. 더 말해서 뭐하냐

- .. 미안.



딴 데 같으면 친정부모님의 속상함에 연신 맞장구를 치면서 유머러스하게 그 순간을 면피하려 했던 나였겠지만, 나는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고 하지 않았다. 성대결절 변명을 할 뿐. 목소리가 좋지 않아서. 원하던 목소리가 아니라서 그럴 뿐이라고..



먹구름 속에서도 빛을 볼 수 있다는 것. 볼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



부모님이 오시고 집 내 화평이 다시 찾아오고, 병원에 가서 약을 받아오고.

저녁을 대충 챙겨 먹고, 짐을 꾸렸다. 급성 장염 판정을 받아 버린 첫째의 가정 보육을 위해 둘째 아이를 이번주 평일, 친정에 잠시 맡기기로 했기에. 저녁이 찾아오고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다 잠시 핸드폰을 열었다. 그이에게 현재아 아이들의 상태를 알렸고, 보이스톡이 왔지만 나는 받지 못했다. 아니 사실 받지 않은 게 사실 맞는 표현일지 모른다.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는 때론 차단해 버리는 게 최선일 때도 있어서. 듣는 순간에 잠재워 둔 깊은 분노와 어떤 사유를 알 수 없는 화남이 물밀듯이 밀려올 것만 같아서. 그러하다면 결국 이 목소리는 더 '맛이 갈 듯' 싶어서. 이 정도면 꽤 이성적인 근육이 단련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다가 문득 페이스북과 여러 단톡 방의 수천 개의 읽지 못한 챗들을 영혼 없이 톡 하고 건드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몇 개의 글이 눈에 띄었다. '비가 오는 주말 여유로운 카페'에서의 나날이라든가. 어떤 모임들로 일상을 다채롭게 꾸며 가는 이들의 일상들, 혹은 결혼생활이 행복해 '보이는' 부부 혹은 커플 들의 사랑 넘치는 순간들...



눈물이 흘러넘쳤던 건 나 때문이었다. 우아하지 못한 나 때문에.

남들의 '주말의 비'를 여유 있게, 그야말로 우아하게 즐기고 있는 그 일련의 순간과 행위들을 어느새 나의 '처지'와 비교 하기 시작한 나 때문에. 그 장면들이 '가소롭게' 느껴졌던 비겁한 나 때문에.  우아한 그들의 행위와는 달리 나는 우아하지 못했다. 처신도, 생각도. 모두 비겁하게 나는 비교하면서 내면을 잠시 갉아먹기 시작했다..



비는 그친다. 계속 내리라는 법은 없다.



스크롤을 내리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급히 핸드폰 케이스로 커버를 닫아 버렸다.

눈물이 어느 정도 흐르고 난 이후 나는 애써 어떤 생각을 외면하려 했다. 그만두고 싶다는 말이나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혹은 어떤 살아 내는 힘이 사라지려 할 때 누가 나 좀 구원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시간 있으면 누가 나 좀 좋아해 줘'라는 소설 제목이 퍼뜩 생각이 나면서. 이렇게 우아하지 않은 나라도... 우는 모습도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애써 잠재워 둔 절대 우아하지 못한 비겁한 그 상상들에.



종지부를 찍고 눈을 감는다. 그러다 다시 떴을 땐 아직도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고 있었다.

새벽 3시. 잠들 수 없이 그렇게 아침이 시작된다. 그것은 또 다른 시작. 그리고 늘 변함 없이 마주하는 아침... 비가 그쳤고 공기는 맑을 것이다. 그리고 잠긴 목소리도, 아이의 일상도, 나의 앞으로 마주할 시간도,빌어먹을 상상도..그렇게 비 오다 그치는 것 처럼, 곧 다시 그치리라. 괜찮아지리라. 아울러, 이 30분간의 온전히 나만의 시간인 글쓰기의 시간으로 나의 하루는, 이번주는, 좋을 것이다.



좋아야 한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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