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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May 21. 2019

#14. 참아내는 시간

우리들의 행복한...시간

누구나 사랑받기 원한다. 결국 그들이 사형수이든 작가이든 어린아이이든 판사이든 인간에게는 누구나 공통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 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며 실은 다정한 사람과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한다는 것. 그 이외의 것은 모두가 분노로 뒤틀린 소음에 불과하다는 것.

그게 진짜라는 것.


-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






지우를 키우며 회사와 집을 오고 간 지 몇 달, 정태민과 마주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의도적으로 피하는 나 때문이기도 할 테지만 어쩌면 그의 피함도 적잖이 작용했다는 걸, 굳이 애쓰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동아 서점을 다녀오기 전 으례껏 엘리베이터나 건물 로비 혹은 지하 1층 구내식당에서 자주 마주했던 그는 한동안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다만 몇 달이 지난 후에 그의 소식은 짤막하게 압축된 한 문장과 2장의 사진으로 채워진 인터넷 기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이수연과 정태민의 결혼 소식이었다.  

사무실이 유독 시끄럽게 느껴졌던 건, 그의 책이 찍자마자 중쇄를 거쳐 5쇄에 들어가는 것보다도 더 신경 쓰이는 소란스러움으로 가득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알고 싶지 않았지만 옆에서 일일이 그와 이수연의 이야기를 종종 들려주는 지현이 덕분이었다.



- 와. 대박. 주간님. 이거 봤어요? 이럴 줄 알았어. 이수연 아주 회사에 발도장 얼굴도장 찍을 때부터 알아봤어

-... 왜. 또.

- 이거 봐요. 결혼기사. 아예 날을 잡았네 잡았어. 다음 달이래. 하여튼 있는 사람들은 뭐 서프라이즈가 일상이래

- 서프라이즈... 정말 그렇네.

- 어디 아파요?

- 응?

- 식은땀 흘리잖아요. 괜찮아요? 그러니까 요새 일을 너무 많이 한다 했어요. 왜 안 맡으시던 소설까지 맡으셔서. 소설가들 마음 맞춰주면서 원고 마감 지키는 거.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요 근래 주간님 너무 무리했어요.

- 아냐. 괜찮아. 근데... 결혼이 다음 달이라고 기사에 나왔어?

- 그니까요! 대박이죠. 우리 책 이러다가 10쇄 들어가는 거 아닌가 몰라. 소문이 광고가 되어 버리니까.

- 좋은.. 일이네. 여러모로..



듣기 싫었지만 사실 그만큼 고마웠다는 것을.

그의 일상과 안부를 공유받게 되는 것에 내가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 지를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고, 나는 그 날 이후로 더욱 표정을 굳건히 하고 약간은 화가 나 있는 듯한 표정마저 짓곤 했다.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또 없을 것만 같아서 때론 실소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집과 회사, 그리고 지우를 픽업하러 오기 위해 어린이집을 오고 가면서 나는 점점 워커홀릭이 되어 갔다. 집안일이든 편집일이든 원고든 뭐든 물리적으로 닥치는 대로 움직였다. 그걸 눈치채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이 다행인지 불행 인지도 모를 만큼.





- 정 주간, 잠깐 애기 좀 할까

- 네. 대표님. 무슨 일로.

- 혜연아.

- 말해요. 선배. 웬일이에요.

- 너.. 정태민 대표랑 무슨 일 있었지?

-.... 네?

- 너. 그날 이후로 이상한 거 알아?

- 뭐가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 이수연이 나한테 찾아왔었어.

- 네?

- 직원 관리 똑바로 하라고 하더라. 자기 결혼할 거라고. 책은 잘 팔릴 거니까 그러려니 하겠지만 앞으로 정태민 대표 주변에 혜연이 너. 얼씬도 못하게 하라고 하더라. 그런 여자를 정태민은 뭐가 좋다고 결혼을 하는 건지. 나 원 참.

-... 미안해요. 선배 곤란했겠네

- 내가 화냈어. 이수연한테. 우리 직원 함부로 까대면 정태민도 이수연 당신도. 무너지진 못해도 흠집 정도는 내줄 수 있다고 호언장담 퍼붓고 보내버렸지.

- 아.. 풉..

- 야. 넌 웃음이 나오냐

- 미안.. 선배답다. 하여튼 츤데레야. 남자로 태어났음 인기 많았을 거야.

- 혜연아... 너 무슨 생각 하고 있는 거야.

- 무슨 일이야 있었죠... 없진 않았어.

-.. 잤냐?

- 하여튼 스트레이트라니까. 왜. 자면 안되나? 하긴. 일처일부인 세상에, 미혼남이 누구랑 자든 세상은 관심 없지만, 유부녀가 미혼남이랑 자면 세상은 또 요란스럽게 떠들썩해지기도 하지. 그걸 미처 잊고 있었네. 하여튼 여자들은 어딜가나 관심대상이예요. 귀찮게. 그쵸. 선배. 우리 다음생엔 남자로 태어나자. 아니태어나지 말자. 지겹다. 사람으로 사는 거.

- 혜연아.... 난 안다. 그래. 그럴 수 있어. 나도 남편하고 살면서. 그런 맘 숱하게 먹었었다. 이 거구에 달려드는 놈팡이 하나 없어서 문제긴 했지만. 그리고 너네 남편 바람 폈잖아. 그러니 너도. 정당방위. 그래 어떤 식으로든 변명 거리 만들 수 있어. 근데 혜연아. 정태민은 좀 달라. 그들은 가진게 많고 넌 없어. 알지? 너 모함하기 시작하면 다치는 건 너야. 그거 알고..시작한거야?

- 하여튼 유진선배, 진도 뺴는거. 여전한 스토리텔러. 최고야. 우리 출판사 오래 가겠다.

- 야!농담 말고. 말해봐. 너 요새 일 일부러 막 미친듯이 하는 거. 지우도 아직도 네가 다 독박하고 그래? 아니 그 썩을놈의 니 남편은 뭐한다니? 너네 부부 무슨 문제 있어?



'문제' 의 정의는 무엇인가. 누구에게 문제가 누군가에게 문제가 아니라면 그게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

문득 그 생각이 났다. 그리고 유진선배에겐 말하지 못했다. 근래 남편과 이야기를 주고받지 못했다고. 그래서 그게 문제로 보인다면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걸 굳이 말하려고 하진 않았다. 잦은 해외출장과 야근, 그리고 반복되는 클라이언트 미팅으로 인한 술자리 때문에. 퍽 하면 열이 오르는 지우를 간호하느라 밤새고 출근하는 일상의 반복도. 별로 이렇다 할 문제는 되지 못했다.



-... 없었던 적은 없었잖아. 새삼.

- 혜연아... 나 진담이야 지금. 농 아니라고. 너 걱정돼서 그래. 너 그렇게 깡 말라가는 거. 나 못 본다. 너 자꾸 그러면 사표 내라 할 거야.

- 사표 내고 다른데 알아보지 뭐... 통장 잔고 아직 있고. 예금도 만기 다 되가고. 할 수 있어. 언니.. 나. 이제 못할 것도 없지 싶다.

- 야! 너 정말. 이거 빈말 아냐. 이수연이 너 은근히 까대고 다니는 거. 그거 은근히 이 바닥에서 소문나면 매장당하기도 식은 죽 먹기라고. 알아?

- 소문이 뭐 무섭나.

- 벌써 우리 편집실에서도 사실 너 속초 다녀온 이후로 좀 이상하다고. 정태민하고 썸 탄 거 아니냐고 험담하고 다니는 사람들 생겼어. 네가 미련퉁이라 귀 닫고 일만 하니까 안 들리는 거지 이 곰탱아! 넌 소문이 무섭지도 않아?

- 결혼 날짜도 잡았는데, 이제 와서 그런 소문이 무슨 소용이에요.

- 정태민은 안전하지만 너는 아니잖아. 정태민이나 이수연은 가진 게 많지만 너는 아니잖냐.

- 언니.. 소문이 무서워?

- 혜연아..



소문보다 더 무서운 건, 그 소문에 진실과 허구가 조작되고 왜곡되는 현실을 당연히 즐기는 '산' 사람들.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들이 더 무서운 거라고, 유진선배에게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마음에 한동안 머뭇 거리가 다 입을 떼었다. 선배의 애쓰는 표정에 보답을 하는 어떤 말을 해내야 할 필요는 느꼈기에.



- 고마워 언니. 근데..언니도 알잖아. 어차피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걸 믿게 되어 있어. 그게 사실이든 거짓이든 중요하진 않지. 믿고 싶은 걸 믿는 거야.  살인이 아니어도 살인으로 믿어 버리고 수사를 시작하면 그건 살인이 되는 거야. 세상이 그렇잖아. 불륜이 아니어도 불륜으로 믿고 싶으면 그렇게 믿어 버리고 확장하고 해석하는 거랑 뭐가 달라. 그러니 소문보다 더 무서운 건 그냥 사람이야. 사람이에요.. 난 그런 사람들이 좀 싫어서, 그냥 내 사람 한 명만 지키면서 살고 있는 거뿐이야. 내 사람. 지우... 딱 한 명.

- 혜연아..








사실 알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모욕에 가까운 원색적인 비난이 곳곳에서 들리고 있다는 것을.

하물며 '아직' 미혼인 남자에게 들이댄 유부녀 소리 듣고 있는 기분은 사실 참담했다. 이러다 몇십 년간 유지했던 커리어도 그만두는 건 한순간 이겠구나 싶었다. 그럴수록 단단해져야 하지만 나는 겉으론 강철처럼 딱딱해질지언정 속은 물렁해서 다 터져 나올 듯한 감처럼. 흐물흐물하고 찐득한 감물이 줄줄 흐르는 것처럼 내면에선 뭔가 알 수 없는 속절없는 감정이 흘러넘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음이 아파오는 날, 겉보기와 다르게 약해지는 것이 정점을 찍던 날.

오랜만에 일찍 퇴근한 남편과 전화통화를 하다가 진하게 부부싸움을 하고 난 그 날. 나는 망설임 없이 정태민을 떠올렸다. 결혼 축하 메시지를 건네면서 안부를 물어볼까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 이후로 전혀 먼저 연락을 주지 않겠다고 마치 작정이라도 한 것 같은 괘씸한 사람에게 자존심은 허락하지 않았지만, 그깟 자존심쯤 무슨 대수일까 싶다가도 여전히 망설임이 반복되는 시간이었다.



더군다나 남편과 싸우고 난 이후에 정태민에게 기댄다는 건 사실 두 사람 모두에게 예의가 아니라고.

그렇게 굳게 생각했기에. 남편과의 문제에는 제삼자의 개입 없이 결국 남편과 둘이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을, 나는 정태민의 배우자도, 그 대체자도 아닌 온전히 그 남자라는 사람 자체로 좋아하는 것이라는 걸, 더욱 자각할 수 있었다. 마음이 저리는 만큼 참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지우를 친정에 맡기고 야근을 억지로 몰아서 하던 날. 밤 11시. 핸드폰이 울렸다.

진동으로 해 둔 핸드폰은 고요한 사무실의 정적을 깨뜨려버렸고 그제야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나의 눈은 핸드폰 화면 앞에 뜬 번호를 보는 순간... 미칠 듯이 뛰는 심장과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마음이 한 번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안도했고 행복했다. 눈물이 날 것처럼.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받을까를 망설이다가 전화는 끊어졌다. 그리고 바로 문자가 왔다.



- 잘 지내나요.

- 아...네.

- 어딘가요.

- 사무실입니다.

- 잠깐 만날 수 있을까요

-...

- 지하 주차장, 제 차에서 잠시 뵙죠. 저도 시간이 많이 없어서.




문자가 끝나고 나는 순간 아무 미동을 할 수 없었다.

다만 무의식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잠깐 화장실에 가 봐야 한다는 생각에 무심코 화장실 거울을 쳐다보며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바보 같았지만 또 바보라는 걸 인정하듯이. 늙어가는 30대 반의 여자 치고는 괜찮은 외모라고.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다가 그 모습마저 속수무책으로 우스꽝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지만, 그리고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눈물을 감당해낼 여력은 없었지만 애써 입가에 미소를 띠며 그렇게 있는 힘껏 나를 달래보고 있었다. 울지 말자고, 절대 눈물을 흘려선 안된다고. 이제 흐를 눈물은 다 말라 가고 있다고.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 지하 4층 주차장, 정태민 차 안)



- 오랜만이에요 혜연 씨.

- 네. 오랜.. 만이네요

- 몇 달 만이죠.

- 두 달.. 아니 세 달.... 잘 모르겠지만. 뭐 중요한가요

- 중요했죠. 나한테는. 참아내는 시간이 긴 만큼 힘든 시간들이었으니까. 한 삼 년 같았습니다.

-.....

- 별 일 없어요?

- 네 별 일.. 없어요. 늘 똑같아요. 당신 만나기 전이나 후나. 그리고.. 그 날 이후도.. 변함은 없어요

- 다행이군요.

- 별일.. 그쪽은 있죠.

- 알고 있군요

- 축하.. 하려고 왔어요. 한 번은 얼굴 보고 축하.. 드리고 싶었으니까.

-....

- 결혼.. 축하드려요

-.. 아직 안 했어요. 그러니 축하는 나중에 받죠

- 미리... 미리 축하드려요.

-.... 당신이 내게 한 말. 결혼해서 아파보라는 그 말. 그 말이 더 아팠다는 걸 혜연 씨는 압니까.

-...... 몰라요. 얼마나 아픈지. 내가 알 턱이 있어요?

-.... 수연이가 미행을 붙였더라고요. 우리가 그 하루 같이 있었다는 걸 빌미 삼더군요.

- 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왜 몇 달을 두고두고 연락을 하지 않았었는지, 그 수면 밑에 가려진 아픈 배려의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 곧 눈물이 흘러넘칠 것 같았고 적잖은 분노도 이상하게 함께 밀려오고 있었다.



- 도대체....

- 수연이는 죽으려고도 했던 사람이에요. 뭘 못하겠나 싶지만, 당신을 건드리는 건 볼 수 없어서. 아주 어이없는 이유로 결혼을 하자 했어요. 당신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더 이상 이상한 소문이나 미행, 그 이외의 할 수 있는 모든 악행들. 하지 않겠다는 전제로.

-.....

- 혜연 씨 나는. 이 결혼이 불행할 거라고 짐작하고 있어요. 그래도 해야 합니까. 그걸.. 묻고 싶었어요. 물론 무언갈 지키기 위해 하는 결혼이라는 건 알겠지만, 내가... 내가 솔직히 무섭습니다. 서로 불행해질 것 같은데. 그래서 오늘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당신이 보고 싶어서. 그래서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와 줬네요. 이렇게.

- 아...



눈물은 터졌고 감정은 둑에서 물이 새어 나오다가 밀려 터지듯, 그렇게 말이 새어나가고 있었다.



- 미안... 해요.

- 혜연 씨. 행복해요?

-.... 지금이... 좋아요. 그리고

- ...

- 결혼.. 다시 한번 축하...해요.  

- 그게 답니까. 하고 싶은 말.

-.... 네.



"아니오"는 때로 '네'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대단히 반듯하고, 기계처럼 열심이고, 모든 행동에 자신감이 묻어나는 그의 첫 모습부터 모든 태도와 생각이, 사람을 대하는 그 깊숙한 진심이. 모든 것이 좋았다고. 그 날의 체온과 교감을 뛰어넘어 나를 자극시킬 사람은 아마 앞으론 없을 거라고도. 그의 침묵과 분노로 일그러진 미간의 주름은 보지 않아도 보이는 것 같았다. 그의 긴 손가락이 네비게이션위를 몇 번 터치하기 시작했다. 음악이 흘러 나왔다.



when we were young.

우리는 말없이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나는 살면서 참아내는 시간에 설득당해 버렸나 싶다고.



보고 싶다는 말도,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를 묻는 일도. 사랑받고 싶다는 말을. 내가 지금 당신에게 사랑받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을 차마 말하지 못한 채. 모든 하고 싶은 말들을 다시금 꾹 참아낸 채. 여전히 나는 그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꾹 참아낸다.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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