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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May 22. 2019

애도하며 바랐다...  

부디 그곳에선 덜 우울해하기를. 

메멘토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불편한 목 상태와 종종 찾아오는 현기증이 부쩍 심해진 탓에. 

그 기미를 알아 채 주셨는지 친정부모님은 아이들을 일찌감치 집으로 데리고 가 주셨다. 이번 주. 급작스레 다시금 찾아온 육아로부터의 짧은 휴가.... 이런 '급 해방'은 사실 비겁하게도 마음 깊이 순간순간 그토록 바라고 또 바랐던 것이었지, 막상 찾아오면 적잖은 당혹감과 깊은 죄책감을 동시에 선물한다. 예컨대 피곤함과 지나친 극도의 심신 노동이 피크를 찍어갈 무렵의 아이들의 구토질로 인한 연속된 이불빨래라든가... 둘을 동시에 케어한다는 것으로 인한 여러 예기치 못한 특수 상황들 (이쪽에서 쾅 저쪽에서 악 등등등) 



그런 것들에 신물이 나다 보면 

때론 이 생활을 청산하고 절에 들어가서 살고만 싶어 지는 극한의 우울함과 좌절감, 어떤 절망감과 참담함이 몸서리치게 뼛속 깊이 느껴진다. 그렇게 우울에 잠식된다. 내가 현재 우울하다 는 생각을 본인 스스로는 알아차리지 못한 채. 아니 설령 알아차린다 해도... 빠져나올 돌파구를 스스로 있는 힘껏 찾지 않는 이상. 쉬이 빠져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늘 아침엔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거실에 음악을 틀어 놓았다. 

그리곤 화장실 문을 조금 열어두고 반신욕을 했다. 미지근한 물을 가득 욕조에 담아내어 몸을 담갔을 때. 어지러웠던 게 조금은 가시는 것만 같다. 그리곤 스트레칭을 하고 공복에 먹는 약 한 알을 먹고 난 이후 옷을 입는다. 스킨과 선크림을 바르고 가볍게 BB 크림을 바른 후 말린 장미 색깔이 나는 립글로스를 연하게 바르고 나면 아침 5분의 꾸밈 노동 끝. 그리고 출근이다. 



휴가가 주어지는 며칠에는 그간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것들을 되도록 '다 해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어쩌면 음악, 반신욕, 스트레칭, 여유로운 아침의 꾸밈 노동과 같은 것들은 (그마저도 못하고 출근하는 경우가 대부분인지라) 내가 누릴 수 있는 일상의 여유이다. 우울감은 조금씩 희미해져 간다. 이런 순간들 덕분에. 



아침의 생기가 참 좋았었는데. 요 몇 분 전의 살아있음을 느낀 누군가에 반한 누군가가 있다는 걸 모른 채...



출근 이후 노트북을 켠다. 

회사 사서함에서 들어오는 메일 확인을 위해 아웃룩을 열어 둔다. 급한 메일 교신 몇 건을 처리하고 바로 브런치의 백색 흰 공간을 띄워 둔다. 어제 핸드폰으로 스케치 해 둔 글감들을 정리하면서 초고를 조금씩 만든다. 요 2년 내, 보통 그런 아침의 시작이었다. 글로 시작하는 아침이란 이렇게 산뜻하고 뿌듯할 수 없다. 



그러던 찰나였다. 그렇게 산뜻하게, 오늘은 어제저녁보단 덜 우울하리라고 다짐을 하던 그 오늘 아침. 

메일 한통이 들어왔다. 회사 동료의 부고 소식이었다. 한데.... 뜻밖에도 동료의 아드님의 상이 었다. 우울증으로 세상을 떠난 아이의 소식에 나는 움직이던 키보드에서 손을 잠시 떼었다. 그리고 한동안 모니터를 뚫어지게 고정시켜 버린 한 단어가 머릿속에서 맴맴 거리듯 울려 퍼진다... 마지막 순간에도 아이는 우울했을까... 아니면 돌파구는 단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한 걸까. 그게 아니고서야. 그렇지 않고서야. 




가만히.... 슬퍼할 시간이. 충분한 시간이 그에게, 그의 곁, 남겨진 이들에게 주어지기를...





우울증을 앓다가 세상을 떠나버린 그 아이의 마음은 어떠했을지.

우울증을 앓는 그 아들을 보는 그 부모의 마음은 또한 어떠했을지. 순간... 복받치던 어떤 감정이 금세 밀려오면서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눈물이 금세 툭 하고 흐를 것만 같았던 건, 아마도 비슷한 증상을 몇 년 전에 겪었던, 과거의 모지리였던 나 때문에. 아니면 오다가다 간간히 웃으며 인사를 나누었던 그 동료를 생각하자 갑자기 이상하게 미안해져서. 사무실에서 마주하던 그의 소탈한 미소와 자주 마주칠수록 '저분은 별 걱정 없으시겠다'라는 생각을 했던 바보 같은 내가 너무나도 미안해져서..... 



어떤 문장으로도 표현되지 못하겠지만. 

언제나 젊은 죽음, 어린 죽음은.... 여러모로 비참하다. 그 자체로 비극이고 막을 수 없는 어른의 탓을 해 보기도 한다... 한 아이를 키우는 건 온 마을의 정성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인디언의 속담은 정말이지 맞는 말이라고. 아울러 내가 아닌, 그냥 스치고 지나갈 법한 남에 불과한 타인의 문제, 남의 가족 문제가 아닌, 어쩌면 이 사회에 깊이 박힌 '우리'의 병이라고. 나의 일이고 너의 일일 수 있다고. 



버리고 싶었을 때... 그럼에도 살 아내 보는 '꽃' 같은 무언가가 소년에게 주어졌다면... 달라졌을까...



애도로 가득 찰 오늘 하루는. 

충분히 슬퍼할 기력이 그나마 이 참담한 현실과 마주한 그에게, 그리고 그의 남겨진 가족들께 남아 있기를 깊이 바란다. 우리는 충분히 슬퍼해야 한다. 그럴 수 있을 때. 아낌없이..... 그렇게 편할 수 없는 죽음을 그럼에도 편히 보내주려 노력이라는 것을 있는 힘껏 해야만.. 그래야 남겨진 이들은 살아질지도 모를 일이니까. 




삶의 환절기 같은 시간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나는 '생'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본다. 남겨진 결말은 하나. 결국에 마지막에 이르기 전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사랑' 뿐이라고... 사랑하기도 모자란 시간이라, 정말 순식간에 마지막이 찾아왔을 때 덜 후회할 수 있는 건 그저 그것뿐일지도 모를 거라고... 




#승찬군의_명복을_마음깊이_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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