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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ul 11. 2019

'평균'과 '평범' 이 '정상'입니까

평균의 종말..

이제 더는 평균의 시대가 강요하는 속박에 제한당할 필요가 없다.

이제는 시스템에 대한 수응이 아니라 개개인성을 중요시함으로써 평균주의의 독재에서 해방돼야 한다.

우리 앞에는 밝은 미래가 펼쳐져 있으며 그 시작점은 평균의 종말이다.



- 평균의 종말 -





시부님은... 오늘도 나를 유령 취급하셨다.

웃으며 출근을 했지만, 요 근래 마음은 내내 우울하고 고통스럽다. '거절' 당하거나 암묵적인 어떤 '비난'을 받는 데 익숙해질 법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취약한 인간이라는 걸 느낀다. 현재의 노출된 환경 속에서 삶을 유지하며 때때로 무너지고 파괴되는 마음을 나에게만은 들키고 말 때. 키우고 보듬고 살리는 양육의 시간에서 '짐승' 이 되어 버리고 말 때,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에 둘러싸여 결국 속수무책으로 감정에 '당하고' 만다.



나를 둘러싼, 내가 소속된, 이 세계가 나를 제외하고 모두 '평균'이고 '평범'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하나.. 나는 오늘'도' 혼자만큼은 선언하고 확언했다. 이제 나를 둘러싼 '그들' 이 내게 엇비슷한 태도로 다시금 삶의 상처를 남겨 주신다면, 이제는 당당히 반문해보고도 싶다. '평균이 정상입니까'라고...



정상과 비정상, 그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누가' 어떤 '기준'으로 정하는가.

타인에게 나의 '정상' 범위를 '부정' 당할 때 혹은 당하려 '할 때'의 그 느낌은, 실로 유쾌하지 않다. 정상의 기준이 무엇인가, 당신들이 말하는 그 '평범'의 기준과 거기에 부합하지 못하면 '비정상'으로 바라보는 그 관점은 얼마나 예의 바른 태도라고 볼 수 있는가...라고. 여전히 말을 하려 하는 인간이기에. 나는 나의 마음을, 솔직한 이중성을, 도덕적이지도 양심적이지도 않은 날것의 내면을 외면하지도 않기에. 그래서 '나'는 고통스러운 걸까...



창 밖이 '여름' 이어도 바깥은 '여름'이나 안은 '겨울' 일 수가 있다는 것.  우리는 얼마나 이해하고 사는가



드러나지 않는 분노나 어떤 고통에 쌓이면 쓰거나 읽는 편이고, 사실은 그렇게 '도망쳐' 왔던 것 같다.

지금처럼... 차오르는 어떤 감정들과 생각이 부유할 때면 이렇게 서툰 문장과 글로 남길 수밖에 없는 것도 마찬가지고. 하나 감사한 건 그 덕분에 읽고 쓰는 삶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되었다고. 그것이 비록 누군가에겐 평범하지 못하고 '비주류' 마냥 보일지 몰라도, 일단... 나는 스스로 평범을 파괴해 보기로... 한다. 여전히. 여전히도.



평균의 근사치에 들지 못하면 '비주류'로 평가받는 세상.

사실은 '평균의 종말'을 읽어 내리면서 저자의 시원한 태도와 문장들을 읽어가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안타까웠다. 결국 아무리 '평균은 없어져야 하고 이미 없어지고 있다'라고 알고 있다 한들 커다란 어떤 세계를 뒷받침하는 '시스템'을 개개인들이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것 또한 인정하기에. (그래서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건 다만 '나의 생각' 뿐일 테다)



평균의 종말, 토드 로즈, 21세기 북스, 2018.03.27. p. 324



'평균'과 '평범'이라고 하는 것들은 여전히도 존재하겠다.

교육의 현장, 업의 현장, 하다못해 인간과 인간들의 관계를 맺어가는 그 시간과 공간 안에서도. 그리고 그것들은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맞닿아 돌아가게 되는데 그 '맞닿다'라는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면 결국 어긋나고 돌아가지 않는다. 때로는 그 맞닿는 것이 톱니바퀴의 세계 안에서 '주류'로 비치며 그렇지 못하고 튕겨 나가고 마는 것들은 소위 평균의 근사치에도 들지 않기에 '비주류'로 낙인찍힐 수 있다. 아니 찍히기 '쉽다' (는 표현이... 좀 더 적절한 걸까. 모르겠다..)


평균이라는 게 애초에 있던가. 평범이 평균이고 그것이 '정답'이고 '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저자는 말한다. '창의성을 죽이는 주입식 교육'에 대해서.

그리고 또 강조한다. '재능을 평가하는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라고. 아이의 타고난 재능을 발견해 능력을 발휘하도록 가르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나... 내가 자라온 교육세 계도 그러했지만 나는 현 교육시스템의 바람직함을 별로 경험하지 못하고 자랐다. 다만 스스로 어떤 궁금증을 지속해서 '반발' 하려고 노력했던 나는 '평범' 하지 않은 좀 '어딘가 특이한' 아이라 불리는 쪽이 좀 더 많았다. 사람이기에 그런 내가 잘못된 줄 알고 나는 '평범' 하려고 노력했고 그 평범을 조금 더 우상향 하여 뛰어넘으려는 어떤 알 수 없는 긴장감을 느끼며 지냈던 것 같기도 하다. 누구나 그렇게 학창 시절을 보냈던 것처럼..



"우리는 누구나 가능한 한 평균을 훌쩍 뛰어넘으려는 압박감을 느낀다. 우리가 평균 이상이 되려고 그렇게 기를 쓰는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좀처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평균 이상이 되려고 기를 쓰는 이유가 아주 분명하기 때문이다. 즉 평균의 시대에서 성공하려면 다른 사람들에게 평범하거나 아니면 평균 이하로 평가받아서는 안 된다는 강박에 내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양육자의 시선과 관점으로 세계를 대하다 보니. '교육' 이 일생의 과업으로 느껴지는 요즘.

책을 읽으며 저자의 경험담과 기타 여러 정보들을 알고 또 고심하며 취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나도 결국 자라나는 나의 쌍둥이들에게 어느새 평범이나 평균을 '강요' 했던 건 아니었는지를. 유독 고집과 성격이 '강한' 아이의 요 근래의 거칠고도 자유로운 행동들을 어느새 '모난 돌' 취급하면서 '미운 오리 새끼' 마냥 대하려 했던 나를 떠올리며... 그건 결국 둘째 아이에게는 '폭력' 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하기에 깊은 죄책감에 적잖은 고통을 느껴야 했다.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이렇게 생각에 빠지고 또 미안한 슬픔과 고통을 느끼기는... 실로 오랜만..이다. (내가 '부모'의 입장이 되어보니.... 읽는 세계에서 이렇게도 변하는가 싶다)



"당신은 평균적인 사람이 아니다. 당신의 아이도 동료도 학생도 배우자도 평균적인 사람이 아니다. 이 말은 기분을 띄워주려고 꺼낸 빈말도 아니요, 겉멋만 부린 빈 구호도 아니다. 무시하려야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실질적 귀결들이 뒷받침하고 있는 그런 과학적 사실이다. "



'인간의 재능은 다차원적'이라고 책은 말한다.

또한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의 '원칙'을 다루고 있는데 잠깐 되짚어보자면 한마디로 공부 잘하는 사람이 일도 잘하라는 법은 없으며 각 개인이 지닌 지능은 분야에 따라 그야말로 '들쭉날쭉' 하다는 것. (들쭉날쭉의 원칙) 공부든 일이든 개인이 (아이든 어른이든)  뛰어난 지능을 가진 분야에서 더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너는 내향적 혹은 외향적, 혹은 사고형인지 감정형인지. 사실 이것들을 '구분 '짓기에 우리는 '다양성'을 가진 존재다. 책이 말하는 '맥락의 원칙'에 따르면 결국 우리 인간들은 내향적인 동시에 외향적이고 이성적인 동시에 감정적인 모순적 성향을 둘 다 갖고 있다고 말한다.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는 말이지 않은가.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은' 우리들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감추고 있을 뿐

드러내지만 않을 뿐. 더군다나 단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반응할 뿐. 도덕성도 인내심도 성실성도 모두 마찬가지라는 것... 그러하니 '개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개인'의 기준으로 적절한 상황과 맥락을 '만들어 주려하고 이끌어 주려 하는' 것이 실로 '리딩 하는 자들, 부모나 교사'의 역할이겠다.. (그래서 리더가 중요하다. 어떤 환경에서든 '리디 오자'의 역할은 그 영향력이 적지 않다.)



"기업계와 별로 다를 것 없이 우리 고등교육 시스템의 교육 모델도 테일러 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현재의 대학들은 앞선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평균주의 시스템의 관리인 구실을 하면서 평균주의 시스템이 개개인보다 더 중요하다는 확신을 더욱 강화시키고 모든 교육과정의 표준화로 강요하고 있다. 우리 교육 시스템의 단점들은 오래전에 자리가 잡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런 평균주의식 구조 때문이다."



평균이 말하는 '정상적인' 경로가 있다고 한다.

아이가 가령 빠른 성장을 보이면 더 똑똑할 것이라 예상하고 그보다 뒤처지면 인생의 낙오자라도 된 양 걱정하는 것. 결국 이 또한 평균의 허상에 갇혀 착각하는 것이란다. '개개인에게 적절한 발달 경로가 따로 있다는 것. 경로의 원칙'이다. 삶의 경로에 들어섬에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지는, 무엇이 평균치이고 아닌지는 (평균을 기준 짓는 건 여전히 아이러니 하나) 일단 '가봐야' 알 수 있겠다. 그리고 직접 개인이 '느껴보고 자각하고 결국 깨달아야' 알 수 있는 것 아닐까..




유화 안에서 여러 색채가 뭉쳐져 하나의 그림을 완성시킨다지만, 그렇지 않은 채 완성되는 작품도 있다..





이제는 그 무엇도 '안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오늘이다.

누구를, 그 현상을, 환경을, 그것을 감히 '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평균'이라는 '기준'을 짓는 행위.. 이제는 '함부로' 그러지 못할 것 같다. 최소한 이 책을 읽고 난 이후의 시간들에 있어서는. 아이들을 시험 점수로 그 개인의 우수성을 메길 수 있는가. '생존'을 위해 살려 애쓰는 직장인에게 소위 조직이 정한  KPI 적 정량화된 결과, 매출 기록과 영업 달성률로 인한 개인 퍼포먼스의 '등급'매기기'가 정녕 완벽히 타당한 것인가? 그 등급 매김에 환경적 오류는 없는가? 애초에 그 판단 - 평균 그 이하와 그 이상이라는 - 을 거론하고 그에 맞추려는 '인식' 자체가 우리의 '허상'이고 발전을 '저해' 하는 기준이 된다면? (아... 글이 산으로 가려한다. 분노를 잠시 멈춘다)



평균, 그리고 평범이란 무엇인가.

(이왕 글이 산으로 가니 조금 더 산으로 가 보자면) 나는 평균뿐 아니라 소위 '평범'이라는 것도 파괴하기를 감히 바라는 걸지 모르겠다. 평범하다는 것이 좋은 의미인가? 그것이 어떤 가치와 의미를 지니는가. 트랜스젠더는 평범하지 않은 인간이라고 우리는 감히 이야기할 수 있는가? 왜 그것이 비범하거나 '특이' 해야 하는가?



다자간의 자유연애를 주장하는 '폴리아모리'를, 모노 가미인 이들이 '평범' 하다며 본인들이 '주류' 마냥  

감히도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을수 있는가. 본질적으로 사랑이라는 것이 평균치와 평범하다는 것이 허락되는 세계던가. 도덕으로 외면하는 여러 사랑의 형태가 숱하게 인간의 세계 안에 도사려 있음을.... 우리는 그 수많은 허구의 콘텐츠들 (영화, 드라마, 소설, 문학 등등등)에서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자각' 하지 않는가. 인간의 '욕망'을. 그 욕망의 세계에 평균이란 있던가. 그것이 평범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인가... (진짜 산으로 갔구나......... 오늘은 그냥 그러려니 하자.. 이 화두는 다른 글에 좀 더 '자유' 롭게 남겨 보기로 한다..) 



각설하고, 오늘 나는. 한 번 더 스스로 '확언' 해 본다.  '나'에 대한 예의를.

그것은 '기억'하는 것.  절대 알 수 없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숨겨진 보물을 '나'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믿고 기억하는 것. 세상에 단 한 사람. '나'라는 사람이 그 '나'를 믿고 또 기억해 주는 것 말이다. '너는 잘하고 있고 너의 기준에서 그것은 우수하고 평범하고 또한 옳은 기준'이라는 것을. 물론 누군가의 평범이 누군가에게 타당치 못한 평범이 될 수 있지만, 그래도 작은 위로를 받았던 건 '평균은 없어져야 한다'라고 말했던 저자의 목소리가, 그리고 어떤 소설의 제목이.. 한데 어우러져 내내 떠올려진다.



'나는 나를 둘러싼 평균과, 나의 평범함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고.



하늘은 파란색이라고 가르치고 싶지 않은 나는, 아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하늘은 여러 색일 수 있다고. 시시때때로 변하니 그걸 즐기며 살라고..



#미안하다_이런_나라_그러나_사랑한다_너를_엄마가_그리고_또다른_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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