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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Aug 29. 2017

82년생 김지영

안아주고 싶고 안기고 싶다. 이 세상의 모든 '지영'이들을..

82년생 김지영과 만나다. 

 불편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으나 읽는 시종 일관 점점 나를 숨죽이게 만들었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다. 내 이야기인가 싶을 정도로 빠져 들었으니깐.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민음사, 2016. 10. 14, 192p    

 

처음 구절부터 숨이 턱 막혀 오는 건 왜 였을까. 

 한 여자의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낸 이 소설은 올해의 작가상을 받았다. 그리고 곧 영화로도 개봉될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만큼 우리의 공감대를, 우리의 오늘이라는 현실을 여실히 잘 문학 작품 속에 담겨져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와 현실을 생각할 여지를 남겨 준 좋은 작품이라는 반증이다.

  여기저기서 만날 수 있는 '김지영' 들은 남성들에게도 결코 이롭지만은 않은,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사회 구조적인 시스템과 환경이 만들어 낸 우리들의 자화상으로 보인다. 2016년 10월에 세상에 나온 '김지영'은 지금 2017년 9월 가을을 맞이하는 여전히 존재하는 우리들의 모습일 테니깐.


맘충이라는 단어가 어딘지 거슬린다. 맘충이 아님에도 여자를 엄마는 낮아질 수 없는 존재인데...


오늘 이 문장

사람들이 나보고 맘충이래.   
그 커피 1500원이었어. 그사람들도 같은 커피 마셨으니까 얼만지 알았을 거야   
오빠 나 1500원짜리 커피 한잔 마실 자격도 없어? 아니 1500원 아니라 1500만 원이라도 그래.   
내 남편이 번 돈으로 내가 뭘 사든 그건 우리 가족 일이잖아.
내가 오빠 돈을 훔친 것도 아니잖아.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돼.   

정대현 씨는 가만히 김지영 씨의 어깨를 끌어다 안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이 그저 등을 토닥이며 아니야 이런 생각 하지마 라는 말만 반복했다.  
김지영 씨는 한 번씩 다른 사람이 되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기도 했고 죽은 사람이기도 했는데, 모두 김지영 씨 주변의 여자였다.
아무리 봐도 장난을 치거나 사람들을 속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감쪽같이 완벽하게, 그 사람이 되었다.     


서른 네 살 김지영

 소설 속 김지영은 딸 하나의 지금은 전업주부가 된 여자다. ‘얌전히 있다가 시집이나 가’ 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여자다. 어느 날 갑자기 이상 증세를 보이고 이를 발견한 남편은 그녀에게 정신 상담을 주선하고 그녀가 정기적으로 의사를 찾아가 자신의 삶을 이야기 하는 형식이다. 돌연 시댁 식구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친정 엄마로 빙의 되어서 마음 속 말을 뱉어 내고, 남편의 결혼 전 애인으로 빙의해 그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기도 한다.   


예뻤을 텐데... 진짜 지영이가 살고 싶은 삶은 그런 어두운 모습이 아니었을 거란 걸 알고 있다

 

 김지영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전업주부로 살면서 더 이상 김지영으로 살지 못한다. 나름의꿈을 갖고 있었던 82년생 김지영은 사실 태어나면서 여전히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일상 곳곳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조금씩 잃어버렸을 지 모르겠다. 알 게 모르게 남자가 여자보다 우선시 되는 다분히 우리가 겪을 수 있는 그러나 눈에 쉽게 보이지 않는 현실들 말이다.   


 지영이라는 이름을 어느 순간 잃어 버린 채 살았을 거다. 

 누군가의 딸, 아내, 며느리, 엄마로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점점 더 김지영의 자리는 축소된다. 그러다가 자신이 아닌 자기 안의 다른 사람들의 모습들이 일상 곳곳에서 툭툭 튀어 나와 남편을 적잖이 당황시키기 시작하는 그녀를 남편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 소설의 일상을 바라보고 있자니 고구마 100개는 먹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일까. 나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름 그대로, 김지영이 김지영이라는 온전한 한 사람, 한 여자 그대로 살지 못하는 현실과 마주하여, 수많은 역할 놀이에 충실해야 함을 강요 받는 때가.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다. 그건 자연스럽게 삶을 파고 들어 왔을 지 모르기에.  


눈에 가려져서 진짜 살아가고 싶은 모습을 어느 순간 놓쳤을 지 몰라. 그래도 가려진 장막을 한꺼풀 벗어내 볼 용기..내주기를..

 

'자유'가 있긴 한 걸까.    

 자유란 타자에게 간섭 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자유의 정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 최소한 육아라는 현실을 생각하자면 도와주는 조력자가 곁에 있다 한들 주체적인 육아의 부담을 고스란히 떠맏게 되는 여자들의 현실에서 ‘자유’를 찾는 다는 건 사치 그 자체 일 지 모르겠다.자유따위를 거론 하는 것 자체가 우스개 망상 이상주의자의 허무한 소리로 들릴지도. 때론 씁쓸하다. 어느새 우리의 삶은 자유를, 사랑을, 희망을, 꿈을, 이런 소리가 하나의 그저 철학자들이나 생각할 법한, 망상이자 공상으로 생각되는 팍팍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게 사실일 지 모르니깐.


 결혼을 하고 사랑을 속삭이고 아이를 갖지만 정작 배가 불러 오는 쪽은 여자다.

 임신을 하는 그 순간부터 출산을 하고 아이를 기르는 그 모든 과정에서 영향을 크게 받는 건 여전히 여자의 몫이다. 나 또한 아이를 잃어 보기도, 또 탄생시켜 보기도 한 나의 몸에 남겨진 건 자랑스러운 수술 자국이다. 나눠 가지고 싶어도 나눌 수가 없는 나의 현실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엄마가 되어 가는 과정은, 탄생의 순간을 직접 체득하고 경험한다는 건 얼마나 경이롭고 존경받을 일이다.


 지영씨도 나와 같은 비슷한 마음이 들었을지 모르겠다. 일상 곳곳에서 그녀가 억눌러야 했던 감정들이 다른 사람의 모습이 되어 일상에서 툭툭 튀어 나와 주변 사람들을 적잖이 당황시켜 나가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했을 지 모른다. 어쩌면 사실 가장 그녀가 원했던, 표출하고 싶고 발산하고 싶은 억누른 그간의 헤묵은 감정이 그제서야 자유를 찾아 터져 나온 것일 테니깐.


여자는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자유의 정의는 실제로는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타자에게 간섭 받지 않는 상태 즉 어떠한 권력에도 얽매이지 않고 주체적으로 존재하는 상태. 이러한 자유를 보통 소극적 자유라고 한단다. 그 다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음을 말한다. 내가 지향하고 선택하는 것을 주체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상태가 그것이다. 이러한 자유를 적극적 자유라고 한다. 그런데 김지영은 소극적이건 적극적이건 그 ‘자유’라는 걸 가지려고는 했었던 걸까. 어쩌면 그녀가 태어나서 노출된 사회는 여자에게 진정한 자유를 허락해 줄 만한 모습의 다정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주체적으로 존재한다? 무슨 개소리하는 지 모르겠을, 그저 하루 육아 하고 하루 살아 남기 버거우면 그런 소리 따윈 그저 누군가의 사치스러운 생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행복해야 한다는 개소리   

 어른이 되는 순간 먹고 사는 문제에 꽤 깊게 관여하게 되면서, 자유라는 걸 생각하는 게 정말 맞는 일인지 때론 헷갈린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 ‘어른 왕족’일 수 있는 아이를 온전히 최소한 엄마의 양육 아래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여자들이 처한 현실을 바라보면 말이다.   


 실제 내가 겪어온 신생아 쌍둥이 1년의 시간은 소위 지옥이었다. 뭐 동시에 둘이라는 특이 케이스 때문에 더 유별나게 신생아 육아를 겪어야 했던 건 사실이지만, 보편적으로 봤을 때 내가 들었던 꽤 많은 위로와 주변 소리는 대부분 ‘엄마는 행복해야 한다’라는 개소리였다.   


어쨌든 '내 마음'이니깐. 그게 잠시 일그러졌을 지언정 나는 나를 사랑할 줄 아는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마음이 생기기를 바라..

 

 그럴싸한 선입견에 쌓여서 행복도 해야 하고 아이도 낳아야 하고 키워야 하고 그러면서 가족도 지켜야 한단다. 이게 말이 되나? 사실 엄마는 행복해야 한다는 말이 따지고 보면 얼마나 폭력적인 말인지. 행복하지 않으면 그럼 엄마가 아니던가? 그냥 엄마라는 그 존재 자체가 존귀하게 비춰졌음 좋겠다. 엄마도 감정이 있는 동물이고 사람이고 인간이니깐.


물론 개 중에 이상한(?) 엄마들이 있는 것도 현실이다. 그래서 노키즈존이 화두인 요즘이기도 하니깐.
그럼에도 엄마들이 다 이상한 몇 몇 엄마들 때문에 다 쓰레기 맘충 취급 받는 건 더 억울하고 우리가 감싸주진 못할 망정 서로 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현실의 기이한 현상은 씁쓸하기 그지 없다.


 물론 그 말뜻에 숨은 의미를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은 현실인데 그 행복을 억지로 강요해서 내 감정이 아닌 사회가 규칙이 타인이 만들어 놓은 감정을 마치 내 감정인 양 연기하며 살아가는 삶이 과연 행복한 걸까 싶다.     


 그건 마치 생산수단을 스스로의 힘으로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가 실제로 노예의 상태에 있는 것으로 진정한 자유를 향유하지 못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뭐 그렇다고 엄마가 그럼 가사 노동자이고 실제 아이와 집에 얽매인 노예의 상태라고 내 입으로 대놓고 말하면 좀 많이 서글프고 슬프다. 그러나 사실인 걸 어쩌나. 물론 처한 환경과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사실 까놓고 말하면 참 자유로운 행복한 삶이라고는 또 할 수 없지 않을까 싶다. 최소한 82년생 김지영의 삶은 그래 보였다.   


 그럼에도 사회를 그리고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일 지 모른다. 현실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해서, 그녀가 처한 사회가 열라 남성 우월 주위이고 아무리 모계 사회가 되었고 이젠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한들 여자들의 삶은 여전히 순탄치 않다. 성차별을 곳곳에서 받게 되는 사회의 무거운 룰렛판 위에서 그저 생각하는 여자들은 위험한 것인 마냥 자신의 주체적인 목소리를 내는 여자들을 향한 시선은 그리 곱지는 않을 테니깐.  

 

 육아 휴직을 하고 진급은 누락되었다. 복직 전엔 강제 발령을 받았다. 

 내가 처한 현실이었다. 복직 이틀 전에 받은 인사팀의 전화 한 통 덕분에 그 날 나의 하루는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으니깐. 그럼에도 명분과 타당성은 납득되어 졌고, 시간은 지나가서 그 기억하고 싶지 않은 감정은 다행히도 내 마음에 이미 온데간데 없다. 단지 '오늘'을 꿋꿋하게 나름의 즐거움(?) 을 찾아가며 사는 삶을 택했기 때문에 82년생 지영씨에 비하면 난 꽤 복받은 여자일 지 모르겠다. 최소한 회사, 아내와 나라는 여자의 밸런스를 맞춰 가며 꽤 잘 지내고 있으니깐 (사실 그렇다고 믿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으나)


어쩌겠어, 이왕 '엎지러진 물'이라면 담아내지 못하면 대신 즐겨보면 대지. 물장난 쳐 대면서.. 쳇!


84년생인 나도 82년생 김지영씨나 별반 다르지 않다.

 칙칙하고 탁탁해서 바닥을 쳐봤던 한 때의 내 삶이 너무 가엽고 불쌍했다. 그 가여운 감정이 내 온 신경을 곤두세워서 내가 아닌 나로 살았었던 1년이라는 시간에 미안했고. 그래서 앞으로 주어지는 시간들은 최소한 계속 그렇게 미안하고 싶지 않아서 나름 악착같이, 그치만 화사하고 아름답게, 다시 나답게 살려고 (나다운 게 뭔지도 알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 84년생인 나와 82년생 김지영의 ‘오늘'을 또 이렇게 흘러가보고 있는데, 부디 소설 속의 82년생 김지영씨의 그 뒷 이야기가 좀 더 화사하게 다시 꽃 피워났음 좋겠다.


지영이가 화사하길 바란다.   

 그래, 사실 지영씨도 정말 그랬음 좋겠고 그럴 수 있다. 그렇게 태어난 사회에서, 누구 탓을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어쨌든 '내 삶'이니깐.


 이왕 주어진 빌어먹을 현실과 사회 시스템이라면 말이다. 오히려 그럴수록 스스로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화사하게 꽃피어 낼 의지와 깡따구가 좀 붙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때론 자신의 목소리를 우렁차게 내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싫으면 싫은 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10면이면 5번 정도는 그렇게 자기 마음을 표현해 내면 좋겠다.
물론 사람이 자기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다고, 참을 줄도 아는 게 어른이라고는 하나, 그럼에도 이렇게 말했음 좋겠다   


그런 개소리 집어 치우고 나는 지금의 내 마음이 원하는 건 싶은 건 되도록 하려 노력할거야. 하기 싫은 건 되도록 피할 거야. 라고   


 왜냐면 하고 싶은 걸 해내는 마음과 실행력,
그리고 원하지 않은 건 되도록 피하며 돌아갈 줄 아는 건
꽤 용기 있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멋진 일일테니깐.

지영씨가 스스로 그 용기를 좀 더 강하게 내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삶이 좀 더 화사해 졌으면 좋겠다.   


  오늘을 살아가는 소중한 나의, 당신의, 지영이들의 24시간이 부디 좀 더 과감히 용기 있기를 바란다. 

 그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할 수 있는 건, 우리가 처한 삶에, 나의 시간들이 마음에서 바라는 것들을 실제 이루어 내는 멋진 일에 좀 더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는 용기있는 인생을 살아갔음 좋겠다.

 행복이란 타인과 상대적인 비교를 할 필요도 없고, 그 타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삶의 모습도 하나의 소중한 그들의 삶일지니, 감히 누군가 뭐라 왈가왈부 할 처지도 못 될 테니깐 말이다. 옳고 그른 삶이 따지고 보면 어디 있겠는가. 성공하고 안하고는, 행복하고 불행하고는 그저 마음에 달린 문제일지도 모를테니깐.


정면승부, 이왕 흘러가는 시간이라면 정면으로 제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싶어. 그래서 이렇게 오늘도...글로 남겨 본다.


내 삶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를 오늘도  내 본다.

 아이들이 일어남과 동시에, 역할놀이에 충실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나라는 사람의 하루 시간을 흘러가면서, 잠에 드는 그 순간까지 나의 이 터무니 없는 어디서 나오는 지 모를 '마음이 바라는 행복을 향해 움직이고자 하는 용기'가 부디 나만이 아닌 우리들, 지영씨들도 용기를 내 보기를. 부디 우리들의 용기가 무사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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