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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Sep 03. 2019

게으름의 품격

게으름 예찬 

노는 것은 당신 시간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특정 장소에서 특정 기간 동안 특정의 규칙을 관찰하면서 

당신은 당신의 시간이 주는 즐거움을 위해 어떻게 시간을 쓸지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다. 

노는 것에 그 이상의 목표는 없다. 


- 게으름 예찬 - 




살면서 제대로 쉬어 본 적, 사실 손에 꼽는다. 

그 손에 꼽는다 하는 유일할 것만 같은 기억, 그러나 여전히 선명한 추억. 7년 전 미혼 시절의 샌프란시스코, 5년 전 기혼 시절 홀로 급 떠나 버리고 말았던 뉴욕, 필라델피아 곳곳. 많은 것을 했지만 또 아무것도 하지 않기도 했었던 시절들. 시끌벅적한 내면의 소리를 마음 한편에 숨겨둔 채 떠났던 시간들. 생각해보니 그때 혼자였던 나는 역설적으로 고되게 일하고 스스로 채찍질해댔던 나에게 작은 쉼표를 선물해 준 것이나 다름없었겠다. 태생이 게으르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남들은 잘만 다닌다던 '여행' 조차 내게는 사치 같았던, 어렸던 날들..


게으름 예찬, 로버트 디세이, 다산초당, 2019.08.16. p.296



곰돌이 푸가 말했단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냐고.

생각해보면 그렇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시간을 어떻게 흐르거나 혹은 채우거나 하는 것일까. 아니 생각 자체가 '채우려' 하지 않고 그저 정말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진정 쉬는 것일까. 여전히 잘 쉰다는 것에 대해서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 다만 게으르고 빈둥대는 것이 마냥 한량이 된 듯이 유유자적하는 시간으로만 정의 내리기에 어딘지 모르게 찝찝하다. 이미 내가 속해 있는 세계는 물질 만능 자본주의 무한 경쟁 시대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어쩌면 이 시스템에 나도 모르게 녹아들어 져 있었기에 계속 나사같이 스스로 움직여야 '생산적'으로 '자기 계발'을 잘하면서 그게 바로 진정 잘 사는 삶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듯' 살아왔던 건 아닐까 싶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 걸까. 실제로 사람들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두 시간 아니 일주일, 심지어 남은 삶 전체가 통째로 주어진다고 해도 그 빈 시간에 무엇을 해야 좋을지 잘 모른다. 


바쁜 사람이 사는 것만큼 덜 바쁜 삶은 없다. 2천 년 전 세네카의 말이다. 세네카는 자녀를 위해서든 미래 세대를 위해서든 일하느라 바쁘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의 말에 별로 공감하지 않았다. 그는 이것을 '다른 사람을 위한 낭비'라고 보았다. 




짧았어도, 긴 시간으로 남았던 미국에서의 시간들..... 여전히 그리움이 있기에,  다시 가 볼 테다... 꼭.




미혼 시절의 나는 잘 쉬지 못하는 젊은 청춘에 속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안쓰럽다. 대견하고 기특해 보기이고 할 테지만... 그 시절의 나는 '너무 열심히' 살았던 건 아닐까...  일하고 공부하고 아르바이트 두세 개씩 달고 살며 돈 벌고, 모으고, 아끼고 불렸다. 그 와중에 연애라는 것도 했다. (이게 삶에서, 특히 청춘에서 빠지면 앙금 없는 단팥빵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뭔가 하여튼 지간에 바빴다. 그러나 그 시간이 난 정말이지 좋았다. 

젊어서 고생을 사서 해야 하는 것이라면 충분히 사서라도 되도록 많은 경험을 하고 싶었던 어떤 똘끼가 있지 싶다.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그저 좋아서 했던 모든 행동들, 심지어 조금은 스스로를 힘들게 몰아낼지언정, 노예라고 생각은 되지 않았었는데. 그 생각은 직장이라는 곳에 들어가고 소위 조직 생활이라는 것을 시작할 무렵 조금씩 변모해갔다. 내 시간이 내 시간이 아닌 시간의 연속을 맞이했기 때문에.. 



일이 아무리 즐겁고 유용하거나 필요할지라도, 본질적으로는 일종의 노예 상태다. 그렇기에 여가의 첫째이자 으뜸가는 목표는 우리를 우리 시간의 주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일할 때 결코 시간의 주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간에 메여 있다는 생각으로 하루 매 반복.... 그랬던 시절... 그래도 아깝지 않다. 그 힘들고도 치열했던 시절들을.




게으름을 '찬성' 한다지만 저자는 게으름에 대해서 마냥 한량 짓을 하는 것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빈 시간을 주체적으로 '주도' 하는 의식 하에서 진정한 게으름이 나온다는 것. 어쩌면 내면에서 가장 편안하고 고요하며 가장 기쁨을 주는 행위들. 그것을 찾은 이들이야말로 진정 '빈둥거릴 줄 아는' 마치 게으름의 품격을 일상에서 활용하는 현명한 자들 일지 모른다. 순수하게 자신의 시간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 말이다. 나는 그 '즐긴다'라는 동사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얼마나 순수한가, 여전히 얼마나... 즐길 수 있을까. 



내가 지금 이해하기로 여가란, 결코 물질적 이익을 바라지 않고 순전히 그 즐거움을 위해서 자유로이 선택한 것, 빈둥거리고, 깃들이고, 단장하고, 취미 활동을 하는 등 광범위한 영역을 두루 아우를 때 쓰는 단어다. 여가를 누릴 때에는 가치보다는 기교가 훨씬 중요하다. 현명하게 선택한 여가는 아무리 짧은 삶에도 깊이를 준다. 느긋하게 있을 때 우리는 가장 치열하고 유쾌하게 인간 다울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란 말의 의미를 콕 집어 설명하기는 힘들겠다. 

다만 밀란 쿤데라에 따르면 개 한 마리와 함께 언덕 비탈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에덴으로의 회귀였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그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위해 우리는 무언가를 또다시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스스로 연출하는 건 아닐까. 결국 완벽히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인간이라는 태생은 할 수 없는 존재일지도 모를 일이고. 



사람들은 고요에 관해 바쁘게 글을 쓰면서, 고요에 관한 강좌를 만들고 그런 수업을 듣고 고요하게 있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세계 곳곳으로 떠난다. 


어떤 경우든 머리를 온전히 비운다는 건 엄밀히 말해 불가능하다. 머리라는 게 원래 그렇다. 머리는 온갖 것들을 생각하다. 상상하고 계산하고 기억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온갖 감각과 감정으로 넘친다. 



계속해서 지침 없이 흘러야 되는 건 줄 알았다. 조금 덜 그래도 괜찮았을까.. 그랬다면 지금과 같은 '나'는 존재했을까. 궁금하다..



가장 마음이 편안할 땐 생각했던 것들이 정리가 되거나 목표 과업들의 수행을 마음먹은 대로 해냈을 때. 

결국 사회적 동물로서 태어난 이상 소위 말해서 '할 건 하고 노는 것' 말이다. 어쩌면 나로서는 이것이야말로 진정 어른 다운 한량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만 같다. 어떤 게으름의 품격이랄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고상한 습관은 결국 스스로 떳떳하게 할 것들은 다 해놓고 난 이후에 찾아온다.

그렇게 마음의 평정심을 갖게 되고 그 이후에 찾아오는 일상 속 소중한 '빈틈'과 같은 시간을 그저 물 흐르듯 순리대로 즐기는 것.... 예컨대 요즘으로서는 읽고 쓰는 이 시간이야말로,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지만 머리와 마음은 이만큼 쉬고 있는 시간을 좀처럼 찾기 힘들다. 고맙고 소중한, 애틋한 시간이다. 아마 저자도 나와 비슷한 마음이셨을까..



나는 내가 무감각을 떨쳐버리기 위한 오락거리로 책을 읽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책을 읽는 건 세상을 보는 방식에 어떤 참신함을 회복하기 위해서, 아마도 내 감수성을 갈고닦기 위해 서지 단순히 무감각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결국 독서는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하는 가장 멋진 방법이다.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고 양육을 하며 나의 과업들을 해내가는 이 시간들 속에서

나이를 먹으며 나는 조금씩 더 나은, 조금은 더 균형 잡힌 인간이 되어 감을 느낀다. 아주 미묘한 나만의 방식으로. 최소한 당분간은 스스로 편안해지는 방식을... 이제는 찾은 것만 같아서 스스로 어떤 상쾌함을 느낀다. 지금 이렇게. 읽고 쓰고 생각하고 상상하며 잠시 웃어보는 이 시간처럼. 



여전히 나의 24시간 중 완벽히 이 시간을 지배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회사와 집이라는 공간 또한 일정 수준에서는 시간의 노예이니까. 그만큼의 시간의 명령을 받기 때문에. 끝내 그 흐르는 시간을 붙잡지 못하다는 걸 알면서도 때로 그 공간들로부터 멀리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제는 안다. 이 순차적인 시간조차 내 주변 여기저기에 찾아보면 얕은 빈틈이 있다는 것. 그것은 마음먹고 생각하기에 따라 만들어지고 또 나오는 것. 



만약 그게 스스로 시간을 속이는 것이라 한다면. 

그래. 나는 앞으로 조금 더 시간을 속여보려 한다. 열심히.... 살면서도 스스로 즐거운 빈둥거림을 해내고 있다는 어떤 발칙한 속임수를 내게 선물하고자 한다. 이왕이면 아이처럼, 순수하고도 천진난만하게. 치열하고도 빈둥거릴 줄 아는 그 시간들 모두 내 편으로 만들어보리라고...




여가여, 지나간 시절의 여신이여.

시간은 길고 하루하루가 충분해서 천진한 기쁨을 붙잡던 시절

짧아진 순간이 즐거움을 억제하지 않던 시절, 근대의 유산.

다하지 않은 의무의 황량한 전조가 우리 행복한 마음을 괴롭히지 못했던 시절은 지나갔으니,

그대는 지나치게 바쁜 이 세상에서 존재를 거두었나요....  


(에이미 로웰,  여가, 1912)




빈둥거림과 치열함 사이에서 균형을 계속해서 잡아 나가다 보면 결국 자유로운 시간도 다가올 테다. 

가령 눈을 감았을 때, 나를 부르는 당신이라는 기억이 찾아오는 순간, 자유로운 상상들, 그것을 기록해보는 시간. 이야기와 만나는 시간. 이 순간 모두. 존재 자체만으로 귀하다. 소중해서 계속 지켜 나가고 싶은 것들. 멈추지 않고 흐르는 시간처럼 나의 이야기도, 나의 리듬에 맞춰, 조용히 그러나 뜨겁게.... 흘러가 본다.


차를 마시고, 편지를 쓰고 자연에 마음을 돌아볼 줄 아는 조금의 여유가 이제는 생기려 한다.. 감사한 성장.. 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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