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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Nov 12. 2019

차이는 차별이 될 수 없다.

3n의 세계 

저항과 마찰 없이 완성된 것은 없다. 

지금 구간에 붙들린 하나의 장면 뒤로는 만 개의 배경이 있을 것이다. 


- 3N의 세계 - 





'골골이'라는 별칭을 붙여 자전적으로 여성으로 태어난 '자신'을 드러내는 작가의 문장과 만나면서. 

'에세이'를 쓰는 이들의 용기에 한 번 더 감탄하게 된다. 고백의 서사니까. 출간까지의 이유가 어찌 되었든 에세이를 쓰기로 마음먹은 이들에게는 삶의 얕은 수면 위 밝은 면만 보일 수는 없을 테다. 심연 밑에 가려진 이야기, 필요하다면, 아니 스스로 쓸 수밖에 없다면 결국 철저히 '민낯'으로 세상과, 타인과 정면 승부할 수밖에 없을 테니.



결국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그 작가의 경험과 삶을 통과했던 시간들의 서사, 에세이겠다. 

특히 '3N의 세계'와 같이 '여성'으로 태어난  누군가의 시선으로 '여성'이라는 개인과 '몸'을 다룬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아리면서도 통쾌한 듯 짜릿하다. 어쩌면 가려져있는 어떤 부분들을 누군가가 시원하게 긁어내 주면, 특히 한없이 무거울 수 있는 소재조차도 자연스러운 폭소를 자아낼 만큼의 깨알 웃음을 선사하는 이미지와 함께 전달된 텍스트를 가만 읽고 있자니, 어느새 깔깔거리다가 숙연해졌다가 시종일관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책, 이처럼 매력적인 에세이는 언제나 나로선 반가운 선물이겠다. 


3n의 세계, 박문영, 한겨레출판사, 2019.10.30.



'더 많은 이들, 더 많은 여성들이 자기가 부딪혀본 세상을 무절제하게 들려줬으면 좋겠다'라고 했던 

작가의 사려 깊음이 어딘지 모르게 정겹다. 반 삭발을 하게 된 에피소드와 주변의 반응을 읽으면서 빵빵 터질 수밖에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에게는 여전히 보이는  '외모'라는 것이 (특히 여성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니 뷰티산업이 여전히 대세를 끄는 걸지도 모를 일이겠다만) 은연중에 꽤나 중요하게 판 박혀진 '편견' 들이 여전히 있구나 싶어서 조금은 생각을 곱씹어 보게도 된다.




근래의 나는 365일 중 355일 정도는 브라 없이 지낸다. 철칙이란 걸 세우는 것도, 그걸 강건하게 고수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브라를 안 찬 게 더 신경 쓰일 것 같으면 가끔 착용하기로 했다. 누구와 상의할 것도 없다. 공인인증서 설치도, 구청의 승인도 필요 없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남성 문인들은 누이의 젖가슴, 고향의 젖줄기, 봉긋한 젖무덤 어쩌고 식의 삼엽충만큼 오래된 표현을 제발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노브 라이프 중 - 



성별을 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로 현존한다는 건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선 여전히 뚫기 힘든 과제일지 모른다.



노브라에 대한 '아니 왜'라는 시선도 마찬가지고, 화장도 스스로 즐기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꾸밈 노동'의 일상이 돼버리고 말면, 그처럼 피곤한 현대사회의 시스템이 또 없을지 모르겠다만. 직장이라는 사회적 조직 인간으로 평일 주 5일 8시간 정도를 제외하고 그야말로 선크림 하나에 의존하는 '민낯'과 노브라 혹은 브라렛과 헐렁하게 편안한 티셔츠와 청바지를 걸쳐 입는 게 일상인 나에게는, 가끔은 평일의 '꾸밈' 들이 또 다른 나로 '변신' 하고 마는 일종의 활력소임엔 아직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역시 '공적인 장소'에 가야 할 때 편한 민낯으로 가게 되면 과연 주변의 시선은 어떨까 싶다. '관리 못한다'는 평이 대다수이지 않을까 싶어서, 어딘지 모르게 때로는 외모지상주의가 퍽이나 애석하며 벗어나기도 쉽지는 않겠다. 아직까지의 속물근성과 외모지상주의자이자 나쁜 페미니스트인 '나' 로서는... 




화장을 안 한 지 오래다. 머리카락은 늘 B보다 짧다. 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꼭 알아내고 싶어 하는 행인들을 더러 만난다. 컨디션이 유례없이 좋은 날도, 생기가 돋는 날에도,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벗들은 묻는다. (중략) 


세상과의 불화와 긴장이 저항과 건강으로 해석된 일은 드물었다. 나와 동료들은 여체 아닌 인간으로 봐달라는 정당한 요청을 괴이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나는 더 괴이했다.  민얼굴이면 어쩌라고 중- 




이렇게 유쾌하게 문장을 이끌어 내는 그녀에게도 아픈 사연은 결국 있었다.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시간이 많이 지나서야 가볍게 툭 하고 내뱉을 수 있었던 것처럼, 어쩌면 그녀의 세상을 지그시 바라보고 조금은 더 무뚝뚝한 척 사실은 사려 깊고 세심하게 예민하듯 따뜻하게 상대를 대하려는 시선들은 바로 이런 사건들이 아픈 원인들이 되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세상을 조금 더 세밀하게 바라보려는 마음이 탄생된 건 아닐까... 




숱한 연인들처럼 우리도 어느 기점에서 결별을 앞두고 갈팡질팡했으며 일부 남성이 그렇듯 그가 헤어지자는 내게 폭력을 썼기 때문이다. 나의 안면을 가격한 뒤에 그는 호루라기를 기억해냈을까. 그 밤은 몸의 통증보다 정신의 충격이 컸다. 현실감이 사라지고 없었다. 허망과 허탈로 새까만 머릿속엔 어떻게 이럴 수 있지란 반문뿐이었다.     - 격투기, 안녕 중 - 


내게도 5세부터 아는 사람들이 의아한 접촉 그러니까 범행을 저질러왔다. 그때부터 현재까지 내가 만난 성범죄자 중 초면인 자는 드물다. 외모, 옷차림, 이동 시간대를 묻고 싶다면 그게 질문이 아니라 폭력이란 걸 깨닫기 바란다. 그들이 가까이 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내가 그 짓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만만한 대상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중략) 


삼촌, 사촌, 촌수도 모를 친척부터 이웃, 교사, 목사에 이르기까지 아동에게 접근이 용이한 이들이란 너무 많았다. 이전, 그 이전 세대들에게는 더 만연한 악행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안전하지 않은 곳에 쉽게 맡겨졌다. 말해도 묵살당했다. CCTV는 없었다. 


- 자판으로 쓰는 비명 중 - 



누군가 그랬다. 폭력은 드러나야 비로소 없어지는 것이라고. 가려진 것이 용기 내 장막을 걷히면 빛이 들어올 수 있듯이.



미혼 시절의 나를 가끔 회상하다 보면, 그렇게 편협적이고 이기적인 '여자'가 따로 없어서.

지그시 입술을 깨무는 '기혼녀'가 되고 만다. 반복된 유산과 임신, 가임기와 출산기를 거쳐서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던 다둥이 신생아 육아기라는 터널을 빠져나와 이제는 양육의 첩첩산중을 겪어 내면서도 '여성'으로 살아가는 데 미혼시절에는 절대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신기하게도 왜 하필 기혼 제도에 들어서자마자 더 선명하게 아프게 박히는 부조리함 들과 마주해야 하는지. 차라리 '인식'이라도 덜 하다면 속 편할까 싶지만, 반대로 인식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은 '여권'과 '약자'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박인 지 오래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아야 골치 안 아픈 삶이겠지만, 여전히 이 사회는 노인과 아이, 여성을 위한 나라의 근사치로 가려면 '한참' 도 모자란 듯싶어서...




여성 스스로가 충분히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는 곳에서 선택이 끝났는데도, 결혼과 출산을 종용하는 사람들 속에서 저출산은 강화할 것이다. 어머니 연습을 하고 있는 사람과 성장 중인 아이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사회에서 누가 섣불리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세상에 나온 아이들에게 닿아야 할 보호와 존중, 애정과 책임도 아직 턱없이 모자란데. 


- 아이들은 많은데 - 




책을 다 읽고 나서 '다행이다, 알게 되어서'라는 안도를 내쉴 수 있는 책들은 흔히 이렇다. 

조금 더 괜찮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 '질문'이라는 것을 하게 만드는 이야기는, 특히 그냥 읽고 그치는 게 아니라 어떤 생각의 변화와 또 다른 관점이 서려진 신세계의 발견, 하다못해 '반성'과 자기 성찰을 이루게 만드는 책들은 그야말로 삶에서 '무기가 되는 독서'가 아닐 수 없다. 3N의 세계는 불편했던 여성들의 세계를 비틀어서 유쾌하면서도 진지하게, 삶을 곧바로 정면으로 대하려는 작가의 튼튼한 자세가 담겨 있기에. 그녀의 이 문구를 11월 한 달 동안만큼은 마음에 품고 오늘이라는 시간을 지내게 될 듯싶다. 




미래의 빛이 여성성에 있다면, 내가 지니고 가야 할 여성성의 특징은 이런 게 아닐까. 다른 이와 늘 수평적으로 만나는 것, 이곳을 여행객으로서 횡단하는 것, 여정을 통과하는 이들과 가능한 연대하는 것. 차이가 차별로 번지는 걸 주의하는 운동은 호흡만큼 중요하다. 존재의 우열을 줄 세우지 않고 각각의 현성과 잠성을 보려는 훈련은 매일의 식사만큼 필요하다. 




차이는 차별이 될 수 없다. 다름은 틀림이 아닌 것처럼...



세상엔 다양한 색깔의 삶이 있듯-모두 소중하고 진귀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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