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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Nov 13. 2019

강경하지만 다정한, 그녀의 원더랜드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 

하루하루 여전하지만 움직이고 있다. 미세하게. 


-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 - 




매력적인 누군가를 책 안에서만 만나는 건 늘 아쉽다. 

'고복희'를 만나면서 이 짧은 소설 읽기의 시간이 이토록 아쉽게 느껴졌던 건,  허구가 아닌 현실 속에서 '고복희'와 같은 인물로 살기를, 아니 그런 이들을 곁에 두기를 바라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 문은강, 다산책방, 2019.10.25.



까칠해도 원칙대로, 자신의 세계를 지키는 사람. 

'복희'를 표현하는 주변 시선들은 가령 이런 것들 일지 모른다. 까칠함, 원칙주의, 이기적, 딱딱함.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선량하듯 차별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시선들. 반대로 복희는 그저 자신의 '소신'을 지킬뿐이다. 대학생 때는 다들 시위할 때 학생의 책무를 다 하기 위해 끝까지 책상을 지켰던 사람. 그로 인해 친구들에게 갖은 핍박을 받음에도 끄덕하지 않는 인물. 근 20년 이상을 중학교 영어교사로 일하며 '로봇'이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스스로만큼은 교편을 잡으며 '정직' 하게 그 일터를 지켰을 것 같은 사람. 


매력적인 '고고함' 이란 결국 존경받을 만한 신념과 원칙을 끝까지 지켜내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일 테다.




세상과 쉽게 타협하지 않는 복희는 밤 12시 통금 시간이 있는 호텔 '원더랜드'를 운영한다. 

이 어디 쉬운 일인가. 호텔업에서 통금이 있는 '규칙'과 '안전'을 고수하는 신념이라니. 고객과 시장, 자본주의의 논리에 의해 '적당히 타협' 할 줄 아는 융통성조차 그녀에게는 쉬이 발휘되지 않는다. 




고복희의 강경한 태도에 손님들은 입을 다물고 돌아섰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다른 게 아니다. 바로 그런 일을 하는 게 고복희의 역할이다. 단지 몇 가지 원칙만 지키자는 것이다. 그게 그렇게 어렵단 말인가. 


고복희는 텅텅 빈 원더랜드의 객실을 노려보다 고개를 저었다. 하나같이 한심한 놈들뿐이라고 생각하면서. 




까다롭고 별나지만 반박 불가한 그녀만의 사랑스럽고 곧은 매력이 듬뿍 느낄 수 있는 이야기는. 

몇 가지의 문장들로 인해 쉽게 서사를 따라가더라도 잠시 멈추고 주변을 돌이키게 만든다. 신춘문예로 적지 않은 나이에 바로 첫 장편소설에서 가감 없이 문장으로 자신의 소신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드러내고 마는 이 젊은 작가에게 앞으로도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는 건 바로 이런 말들이 내게 전해져 왔기 때문이리라. 조금 더 충분한 용기를 가지고 세상을 대해도 괜찮다는 어떤 위안을 느꼈기에. 




지금까지 좋은 일만 있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충분히 감수할 수 있던 나쁜 일들이었다. 어려움을 극복하게 되면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기분이 든다. 그러니 나쁜 일마저 결국엔 좋은 일이다. 사람 대하는 법도 배웠다. 좋았어요. 덕분에 여행이 더 행복해졌어요. 그런 말을 들으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말해주셔서 제가 더 감사해요. 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원더랜드에 숙박하는 손님들 모두 다정한 마음을 품고 떠났으면 좋겠다고.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치열하게 공부했고 성실하게 일했다. 누군가에게 힘이 될 때 가장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건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머지않은 미래는 찬란하게 빛나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소설 속에서 나오는 '지우'와 '복희'는 다른 듯 닮은 것도 같다.. '바라보는 시선' 만큼은. 늘 '질문' 하는 사람들인 것 같아서.




소설일지라도 그 소설 안에는 가상의 인물을 가장한 '작가'의 또 다른 진짜 모습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공정하지 않은 어딘지 모르게 불합리한 세계의 부조리함 들, 이 젊은 작가의 세심하게 관찰하여 예리하게 펼쳐 놓은 문장들과 만났을 때, 나는 늘 그러하듯 볼펜을 든다. 단어와 문장을 놓치지 않고 싶은 마음 때문에. 아니 어쩌면 그 문장과 만났던 나의 '그때의 생각' 들을 조금 더 덧붙여 보고 싶다는 바람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세계는 절대로 공평하지 않다. 더 잔인한 것은 마치 공정한 것처럼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당연한 사실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조력은 정확하고 확실해야만 한다. 두루뭉술한 건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한다. 아프다는 사람을 붙잡고 '기도하겠습니다'라고 해서 그가 낫는 건 아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제대로 갖춰진 의료 시스템이다. 아이들에게는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청년들은 일자리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돈, 돈이 필요하다. 


박지우는 정말 그랬다. 기분이 나빴다. 사람 죽은 사건이야 포털 사이트 메인에만 들어가도 주르륵 쏟아진다. 온갖 나쁜 이야기를 전해주려고 안달 난 친구 같다. 일가족과 함께 목숨을 끊은 가장, 졸음운전으로 가드레일을 박은 운전자, 스토킹에 시달리다 살해당한 대학생, 성적 비관으로 투신한 수험생, 삽시간에 사고를 당한 어마어마한 사람들, 21세기는 안전하지 않다. 오히려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덜 죽었을 거다. 그때야 고작 매머드에게 밟혀 죽는 게 다 아닌가. 





소신을 지킨다는 건 그만큼 스스로 자신과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가능한 영역 이리라. 

고복희의 '원더랜드'는, 어딘지 무례한 익숙한 타인들과 이웃들의 시선에서도 자신의 세계를 지켜내는 단단함이 들어있다. 그럴 수 있는 건 바로 '원더랜드'를 지켜내고자 하는 그녀의 원칙이 아직 무너지지도, 흔들리지도 않았기 때문이겠다. 참 부럽다. 그럴 수 있는 그녀의 면모가. 




그 속에서 고복희는 리듬을 깨는, 이기적인 이탈자였다. 고복희에게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원더랜드가 먼지투성이인 공간이 돼선 안 된다. 린의 월급이 밀려선 안 된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하루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사람들은 고복희를 두고 이기적이라고 비난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세계의 질서가 그런 것이라면, 그리고 거기에 순응하지 못한다면, 결국 낙오될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혼자 남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고복희의 선택이었고 기꺼이 감당해야 할 자신의 몫이었다. 고복희가 이영식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 나는 앞으로도 계속 원더랜드를 운영할 겁니다. " 



그녀가 지켜내는 그 공간이 누군가에겐 큰 위안이고 편안함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픔을 아픔으로 그치지 않고 그걸 수용하고 인정한 그 이후의 시간이 어쩌면 '성장' 이 아닐까 싶다. 

복희와 원더랜드는, 그녀의 생각과 세계를 지키고 그 안에서 자신을 비롯한 자신의 사람들을 지키려는 그 마음결에 감탄하듯 재빨리 페이지 한 장 한 장을 넘겨 내면서도, '지금의 나'를 잠시 되돌아보았다. 읽고 쓰려는 이 악착같음을, 일상 속에서 자주 마주하는 가족들의 뜨겁고도 차가운 조용한 시선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내려는 이 소신을 언제까지고 용기만으로 이겨낼 수 있을까 싶기도 했기에. 그래도 포기하지 못하는 건 결국 포기할 수 없고, 삶은 그렇게 강물처럼 흐를 뿐이리라. 




원더랜드는 낙원이 아니다. 예상치 못한 순간 틈입해 평화를 뒤흔들어놓고 떠나는 사건들이 넘쳐났다. 무엇보다 힘든 건 그로 인해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다고 느껴질 때였다. 너는 별로인 사람이야, 세상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알고 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놓치는 순간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는 걸 


고복희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으면서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항상 그랬다. 누군가에게 조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못 된다는 생각이었다. 다만 최선을 다해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모양의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모두가 떠난 원더랜드에 고복희는 홀로 남겨졌다. 




마지막이 아쉬울 정도로 '원더랜드'가, 아니 '복희'가 그리워졌기에. 

'프놈펜'이라는 곳을 이미 검색한 나를 발견하고 말 때 잠시 피식 웃었다. 그곳에서 약 8개월 동안 머물면서 글을 썼다던 작가는 어떤 생각으로 첫 문장을 시작했던 걸까. 글을 쓰는 사람들은 결국 토해내야 비로소 살아지는 그런 경지(?)에 이른다던데, 비슷한 유경험자인 나로서는 자꾸만 이 젊은 작가님의 차기작이 기대되며, 반대로 다시금 읽는 '나'에서 쓰는 '나'로 변하고 싶다는 일념이 물밀듯이 솟구치고 마는, 읽다가 쓰는 '나'를 지키는 마음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프놈펜에서 팔 개월 동안 머물면서 글을 썼다. 신선하다고 여겼던 것이 평범한 일상이 되는 순간, 그때부터 본격적인 소설 쓰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내가 세상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고복희는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인간이었고 나 역시 그녀의 방식으로 소설을 쓰려고 노력했다. 생각을 교묘하게 헐거나 장황한 문장에 숨는 일을 경계했다. 두꺼운 화장을 벗어던진 나를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썩 마음에 든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오래 나아가겠다는 작가의 말은 지켜질 것 같다. 아니 지금도 지켜지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쓰고 있다면. 

아침의 맞이하고, 저녁을 닫으며, 읽고 쓰고 사랑하며 살려하는, 그 마음을 지켜내려 하는 지금의 '나'처럼. 



해가 짧아진 요즘의 저녁, 늦은 밤 시간을 지켜 내려는 그 시간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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