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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Nov 20. 2019

지워지지 않으려, 쓴다 했었다.

엄마의 글쓰기, 사람의 글쓰기 

우울한 글은 우울한 대로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 준다. 


- 엄마의 글쓰기, 사람의 글쓰기 - 





한때, 나는 내 인생이 망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아이 없는 기혼 시절, 깨가 쏟아져도 유분수여야 마땅하다던 그 신혼초, 그와 나 이외의 이들은 우리들의 보이지 않는 비극을 알 턱이 없었다. 유산을 거듭하고 우울증에 빠져있는 배우자를 상대하는 그도 몹시 힘들었으리라.  그야말로 미쳐버릴 것 같아서 일로만 도망쳤던 우리였다. 



우리들은 생산자였다. 철저히 타인들을 위한 생산자. 

돈을 벌고 모을 줄만 알았지, 정작 자신을 위해 푼돈조차 제대로 쓰는 것이 그리 어렵게 생각했던, 한편으론 기특하면서도 또한 불쌍한 영혼들. 그중 한 사람은 남몰래 이혼소송을 준비하고 각종 서류를 알아봤었다. 그녀는 부끄러운 과거의 서사를 혼자 기록했다. 간접적인 꼬인 문장들 사이사이를 통해. 일기장에, 모두가 읽을 수 있는 공적인 공간에. 부끄러움은 없었다. 그래야 살아낼 수 있었으니까. 기록과 글로, 책으로 도망치는 것이 일상이었던 시절,  내 인생이 망했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여자. 한 번뿐인 나의 인생은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져 나가는구나 싶었다. 



엄마의 글쓰기 사람의 글쓰기, 백미정, 박영 스토리



'엄마'라는 책무가 생기기 이전엔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해서 다 안다고 생각하며 지냈다. 

철저히 '나'의 입장만을 생각했던 이기적이고 못난 한때였었다고, 지금에서야 고백하게 된 이유는 바로 '아이들' 덕분이겠다. 나의 슬픔과 기쁨의 원천수, 고통이자 희열의 오리진... 나의 '아이 둘' 덕분에. 그래서일까. '엄마의 글쓰기 사람의 글쓰기'라는 미니북 사이즈의 작은 책 속에서 발견한 작가의 문장들에서, 어딘지 모르게 그녀의 글쓰기 동력은 다름 아닌 그녀 자신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감히 예상되었다. 타인의 삶을 함부로 예상하고 그리는 것이 얼마나 예의 없는 일인지를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린 것이다. 몇 문장들 속에서 한때의 내가 오버랩되어 다시금 과거의 '나'와 만나게 해 줬으니까. 




지지 않겠다고 두 주먹 불끈 쥘 수 있었던 요인은, 질 수밖에 없을 것 같았던 극한 상황 덕분이다. 지지 않겠다는 야무진 각오는 죽음뿐만 아니라 삶의 다양한 부분들 속에서 빛을 발해 준다. 지랄 맞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한 인간의 양면성, 조금 더 고상한 표현으로 나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통합적 사고, 연약함 속에서 진실된 삶의 방향이 만들어지는 아이러니함, 나의 연약함, 우리의 연약함이 예쁘게 보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글쓰기. 




지금 되돌아 예전의 글들을 다시 읽고 있노라면, 낮이 뜨겁고 부끄럽지만... 그것도 모두 '나'라는 걸 이제는 알고 안아주려 한다.



스스로에게도 관대하지 못했던, 돌봄이라는 것이 낯설었던 나에게. 

'양육'은 그야말로 제3세계나 다름없었다. 아니 여전히 신세계다. 낯설고도 버겁다. 아들 쌍둥이의 가임기와 출산기를 거쳐 양육의 무거움을 짊어져야 하는 책무에 조금씩 길들어가는 현재의 시간들조차도. 현실에서의 비수 같은 시간들과 마주하고 나면, 으례껏 쓰기 시작했다. 미혼과 아이 없는 기혼 시절의 그 시간들과는 깊이와 결이 '철저히' 다름을 느낀다. 시간은 더욱 모자랄 수밖에 없는, 결핍적인 상황의 연속에서도. 틈새 시간을 이용하는 읽고 쓰는 행위는 더더욱 뜨거워지고 만다. 



어쩔 수 없이 책무에 갇혀야 하는 무력감을 더더욱 느끼고 마는 순간이면.

악착같이 쓰려하는 나를 발견하고 말기에. 쓰면서 희열을 느끼고 그렇게 감정을 정화시키면서 객관적인 시야와 이성을 되찾고 마는 나 자신일 수밖에 없어서. 작가도 비슷한 마음이었을까.... 아들 셋을 키우며 제대로 된 글로 소득이 기반이 되지 않은 환경에서도, 누구 하나 알아주는 이 없이도 끝까지 쓰려하는 그녀의 심정을. 어딘지 모르게 나는 알 것 같았다. 안다고. 그 무례하기 짝이 없는 타인의 삶을, 감히 알 것 같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글쓰기는 이미 내 몸, 내 눈물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느끼는 지진 같은 감정을 써야만, 타인과 공감하며 타인의 행복을 돕고 싶어 하는 소명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슨 글 한편을 공유함으로써, 나와 비슷한 고통에 처해 있는 지구 반대편의 또는 내 코앞의 한 영혼이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본다. 아픈 나의 글쓰기가 아픈 나의 엄마와 아픈 나의 동생을 위해서도 힘을 발휘해 주었으면 한다. 



한 여성의 서사 치고 아프지 않은 기억 하나 없는 이들이 있을까 싶다. '엄마'라는 책무는 그러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면.



노출된 환경들, 양육자로서의 역할, 풍족하지 못한 일상, 그 안에서 터져 나오는 사건 사고.

제대로 된 노동 소득 및 일감 하나 없는 그 시간들 속에서 지지 않으려는 작가가 되어 버린 '엄마'. 어쩌면 저자가 되어 버린 그녀 자신 때문이었으리라고. 책을 단숨에 읽어 내린 이후에, 생각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던 이 책 한 권을 통해 나는 감히 누군가의 삶을 예상해봤다. 타인의 삶을 함부로 예상해서는 안 되는 것이 예의겠지만, 어쩐지 나는 그려졌기 때문에. 얼마나 힘겨웠는지, 얼마나 악착같이 읽고 쓰는 삶을 유지하려고 비루하고 초라한 그 일상 안에서 얼마나 지지 않으려고 했는지를. 




빌어먹을 년들, 왕년에 우리 엄마가 나이 어린 내 동생들에게 자주 써먹던 욕이다. 문자적으로 격 떨어지는 표현이긴 하나, 해석적으로는 엄마의 삶을 대변하고 있다. (중략) 


뾰족한 답은 아니나 조금 둥그스름한 답 같은 걸 말해 보자면, 자식과 엄마의 맞물려 있는 상처는 엄마만 나무랄 수 없는 이유가 될 수 있다 지나친 애착이든, 평생 안고 가야 할 지울 수 없는 고통이든, 그것이 엄마인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고 아이를 되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짢은 상처들을 승화시켜 보려는 엄마의 몫을 도와주는 도구가 있으니 이를 '글쓰기' 라 칭해 본다. 





이제 곧, 또 한 권의 책이 세상에 이름 붙여져 나오게 되는 시간을, 나는 기다리는 중이다. 

원고 계약을 해냈던 작년 10월, 그 이후의 1년의 긴 기다림 끝. 지우고 적고 다시 쓰고 고쳐 쓰고 새로 쓰는 시간들을 거듭하는 동안. 사실 나는 '1촌'이라는 가족 관계 내의 혈연들께 감히 이야기하지 못했다.  아니. 일부러 하지 않았다. 여전히 읽고 쓰면서 결과물들을 만들어 내는 생산자로 살아내고 싶다는 이 뜨거운 의지를 감출 수 있다면 여전히 일정 부분 감추며 산다. 당신들이'걱정'이라는 포장으로 1절부터 4절까지 구구절절 읊퍼댈 것을 모르지 않기에. 



나를 둘러싼 '어른' 들의, 그들의 아픈 목소리가 들릴 것이 뻔히 예상되었기에. 

그들에겐 여전히 아이를 키우고 일을 유지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버거운 딸이, 며느리가, 아내를 '걱정' 한다는 핑계로 나의 정체성을 역할에 가둬두려 하는 상냥한 '폭력'이라는 것을 모른 채, 기어코 걱정의 목소리를 내뱉고 마시는 다정한 그들 앞에서. 특히 나의 하나뿐인 여자, '나의 엄마'의 진심을 때로 외면해버리고 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자식 생각하는 그 마음의 아픈 진심이 때로는 정말이지 아프게만 들려서. 




엄마는, 선택의 여지없이 자식을 사랑해야 하는 묵직한 사명감을 부여받게 된다. 많고 많은 나의 역할이 있건만, 엄마로서 자신의 모든 것이 설명되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크고 복잡한 존재




엄마의 한 때를 종종 상상하곤 한다. 젊은 시절 그녀의 사진은 말도 안 될 정도로 놀라운 아름다움이었다... 내 존재가 미안할 정도로.




지워지지 않으려 쓴다고 감히 그녀 앞에서 말했었다.

여전히 이번 생에 비빌 구석은 나와 비슷한 듯 다르게 아픈 '여성'의 시간을 통과해냈던 하나뿐인 모친, '친애하는 나의 당신'의 걱정에 반문하고 대항하듯, 어째서 사람들은 아픈 말을 가장 소중한 존재들에게 잘도 내뱉고 마는 것일까. 나로서도 어쩔 도리 없이 이렇게 헛똑똑이 어리석은 인간으로 변하고 만다.




- 나중에 하고 싶은 거 해도 되잖아. 나는 너희 둘, 그렇게 키웠어. 나 다 버리고 키웠어. 

-  엄마... 나는 버릴 수가 없어. 지워지고 싶지가 않아. 엄마가 대단한 데... 나는 그렇겐 못 살겠어요.

- 터진 입이라고 말은 잘하는 못된 년, 나쁜 년, 헛똑똑이. 

- 미안해요... 나 되게 못됐어... 





여전히 누군가에겐 헛똑똑이로 물가에 내놓은 못된 '년'으로 사는 나일지언정. 

이런 '나'를 사랑하며 보듬고, 살피면서 기어코 이 생을 지켜내려는 유일한 방어책은 다름 아닌 '글쓰기'라는 것을. 이제는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남몰래, 말하지 않은 채로, 그렇게 읽고 쓰는 삶을 유지해보고 있는 중이다. 어디까지 쓸 수 있는지, 어디까지 고백할 수 있는지를, 자신에게 반문하듯 매일 같이 읽고 쓰는 시간 이후에 남겨진 질문들과 마주할 때면. 




우리들의 연약함을 진실의 한 조각으로 만들어주는 글쓰기를 통해 또 다른 연약함과 또 다른 진실 한 조각을 찾아보련다. 그래서, 죽음을 이겨내려는 나의 변화와 성장을 자축해도 될 것 같다. 




작가의 문장 모두가 다 와 닿았던 건 아니지만. 

'엄마의 글쓰기'라는 고정된 틀 안에서 읽힐 수 있었던 짤막짤막한 여성 서사의 문장들을 대하며. 나는 책 한 권의 몇 시간 이후에 며칠의 질문들을 내면에서 남긴 채, 기어코 이 글을 이 아침에 써 내버리는 나를 발견한다. 글을 잘 쓴다는 건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편집자나 방송작가가 진정 글을 잘 쓴다고 정의할 수 있는가. 편협된 시선과 약자들에게 열린 마음이 아닌 권력자들의 잘나신 전문가적 글쓰기는 과연 잘 쓴 글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가. 잘 팔리는 글이 모두 잘 쓴 글인가. 



자신의 고백 서사 하나 없이, 화려한 상식과 삶의 결과물'만' 드러낸 이야기 가득한 책이 잘 팔린다 하여.  

베스트셀러가 결국 그 시대의 잘 쓰는 사람들이라고 진정 정의할 수 있는가. 하물며 작가 중에 양육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무라카미 하루키와 김연수가, 김영하와 이병률 작가님이 양육을 했다면 어떤 문장들이 나올 수 있을까. 강원국 작가님의 아내가 글쓰기를 했다면 어땠을까. 어째서 여성 양육자들은 고통을 견딜 수 있는가, 여성의 글쓰기는 남성의 그것과 어째서 다를 수밖에 없는가, 글 쓰는 여자, 여성 서사를 고백하는 이들 중에 페미니스트 아닌 이들이 과연 있을까 등등 등등... 꼬리를 물고 맥락 없이 늘어나는 질문들만 한가득 남긴 채. 



속절없이 흐르는 온갖 차오르는 감정의 물결 속에서 허우적대듯 살아남을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동력. 

내일을 보다 더 괜찮게 살아내려 하는 의지는, 다름 아닌 일상 속 악취 나는 순간과 마주하고 나서 더욱 지지 않으려, 지워지지 않으려 하는 '나'로 인한, 손끝에서 번져 나오고 마는 '글' 일지 모르겠다. 이렇듯 긴 질문 끝 일상 속의 서사를 거쳐서 비로소 한 줄을 적어 내렸을 때. 갑자기 터지고 마는 눈물, 어쩔 도리 없이 이 시간들을 감싸 안은 채. 



오늘의 읽은 것들과 그 안에서 만난 새로운 마음과 '나'를 이렇듯 적어 내릴 뿐이다. 

어쩔 도리 없이, 내일의 일은 모르겠고 일단 쓰는 걸 택하는 '나'라서... 



가렸던 커튼을 걷고 나면 존재가 보인다. 그 존재는 드러낸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12월엔_글모임을_합니다_아크앤북_함께하기를

#엄마_미안해요_난_여전히_이러고_삽니다_당신_모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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