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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Nov 20. 2019

뇌, 몸과 마음의 중간 지점

여자의 뇌, 남자의 뇌 따윈 없어 

어쩌면 몸과 마음은 생명이라는 하나의 불꽃이 서로 다른 두 개의 벽에 비춘 그림자일지도 모르겠다.  


- 여자의 뇌, 남자의 뇌 따윈 없어 - 





도파민과 세로토닌 분비가 철저히 빈약했던 시절. 

아니 그 '시절'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과거형이라기보다는 요 근래도 종종 세로토닌 분비가 억제되려 하는 순간, 나는 뇌에 주문을 외운다. 다시금 다가오라고. 그 신경전달물질들이 비타민처럼 하나의 캡슐 안에 모두 들어가 있어서 알약을 복용했을 때 조금 더 시간을 견딜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신생아 초기 시절 그 약을 먹었어야만 했다. 그러나 먹지 못했고 먹으려 하지도 않았던 '나 '때문이리라. 그 모든 '뇌'와 '몸'과 온 감각과 인지를 '관리' 하는 주체는 분명 '나' 이기에.  



책을 찾는 이유는 수만 가지겠지만, 나로 하여금 '책'을 찾게 만드는 계기는 의외로 '결핍'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 답이나 길을 찾고자, 레퍼런스를 찾든가 현인들의 지혜에 빌리고 기대려 할 때였다. 뇌과학이나 과학 서적을 보기와는(?) 다르게 찾곤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우울증이 깊었을 때 한때 과학 서적을 탐독했었고, 그때 행동경제학이나 인지 심리, 뇌과학 등의 영역에 대한 '얄팍한'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그때 알았다. 아니 '그 단어'를 외워버렸다.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전달되는 뇌신경전달물질 중 하나인 노르아드레날린이 더 많은 분출을 해낼 즈음 (난 왜 이런 단어를 알고 있게 되고 만 걸까 싶고) 난 그 단어를 인식적으로라도 물리치고 싶었기 때문에 어떤 엉뚱한 고군분투(?)를 해내고 있었다. 단어라도 알고 있으면 무찌를 줄 알았던 좀 우습고도 유치한 행동이었으리라. 그래서 이 책도 '그런 줄' 알았지만,  페이지를 넘기면서 '아차' 싶었다. 저자에게 죄송했다. 얄팍한 지식이 정말이지 얼마나 얕은 수준이었는지를 알게 되었으니까. 



여자의 뇌 남자의 뇌 따윈 없어, 송민령, 동아시아, 2019.11.05.




저자는 말한다. 뇌를 살펴보지 않아도 되는 심리학, 인지과학, 행동경제학은 마음과 행동의 여러 측면을 뇌과학보다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따지고 보면 뇌를 열어보지 않고, 일일이 신경세포들을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정량적 수치에 의한 어떤 팩트 기반 근거 하에 '탐구' 하는 영역이 '아닌' 또 다른 영역에 속하기에. 어쩌면 그래서 전자는 그나마 속 편할(?) 수 있는 걸 아닐까, 반대로 손에 잡히지 않는 그런 '마음'이라든가 '인지'를 연구하는 학문보다야 '뇌'와 같이 구체적인 물질을 연구하는 '과학' 이야말로 조금 더 편한 영역에 속하는 걸까.... (결국 읽다가 질문만 쌓이고 만다. 이렇게 생각은 곧잘 튀어 버리고 만다) 




뇌과학이 인기를 끌면서 심리학, 인지과학, 행동경제학의 성과까지 모두 뇌과학으로 포장되고 있어서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에 관한 학문을 모두 뇌과학에 포함된다고 간주하면, 심리학, 인지과학처럼 꼭 필요한 학문들이 평가절하 될 수 있다. 또 뇌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현상까지 뇌의 생물학적인 특징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만연하면, 우생학이 그랬던 것처럼 사람을 차별하고 뜯어고치는 데 뇌과학이 악용될 수 있다. 



가끔은 과학이 '예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학문의 경계는 붕괴되어 다시 재탄생될 수 있는 것이라면, 분명 뇌는 예술작품.... 일 테다.



뇌 속의 신경 세포들이 정보 처리를 할 때

그 안에서 첨예한 네트워크가 연결되어 결국 어떤 '운동'과 '신경' 들이 '나'에게 전달되어 '안다'라든지 '모른다'라든지 '슬프다'라든지 '기쁘다'라든지, 그런 인지와 감각을 생성하게 만드는 걸까. 여전히 책을 읽고도 모자란 해석과 이해력 덕분인지 질문은 쌓아내려 가지만, 그 안에서도 어떤 선명한 생각이 두둥실 나를 찾아오고 만다.  쉬운 건 어디에도 없다는 것, 쉽고 당연한 것은 결국 어디에도 없이 끊임없는 질문과 그로 인한 누군가의 치열한 탐구 덕분에 새로운 진리들이 탄생될 수 있다는, 뭐 그런 진리들.... 




안다는 말은 이미 아니까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는 뜻일 때가 많다. 우리가 이미 안다고, 당연하다고 여기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실을 우리는 정말로 알고 있는 것일까? 과학은 그렇게 당연해 보이는 사실들의 아귀를 맞춰보고 질문하는 데서 시작된다. 


860억 개의 신경세포를 세는 이 모든 과정은 24시간 안에 마칠 수 있다고 한다. 참 쉽게 들리지만, 이 방법을 알게 되기까지 수십 년간 어려움이 많았다. 신경세포가 1,000억 개라는 말이 널리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뇌 속 신경세포는 1,000억 개라는 주장을 한 최초의 논문이 뭔지도 불확실하다고 한다. 뇌를 얇게 잘라서 일일이 세는 방법 등 여러 방법이 시도되었고, 추산 방법에 따라 편차도 컸다. 때로는 숫자 하나를 밝히는 데도 많은 사람의 노고와 재치가 필요한 모양이다. 




개인적으로는 '여성 과학인'의 이런 인문학적 접근 방식과 동시에 객관적이고 정교한 과학 지식서에 대해서. 

손뼉을 쳐 드리고 싶기도 하다. '랩 걸'을 참 인상 깊게 읽었던 나로서는, 잠시 비교도 되었고, 아래와 같은 문장들을 읽으면서 어딘지 모르게 미소도 지어졌기에. 다만 작가님의 지식 탐구와 학문 몰입의 그 서사가 조금 더 생생한 경험담과 함께 문장으로 나열되었다면 읽는 독자로서는 조금 더 반갑지 않았을까 싶은 개인적인 애정 하에 기어코 아쉬움마저도 드러내 보게 된다. 




전기 요금을 내기 위해 돈을 버는 것도 쉽지는 않지만, 생명체가 신경계를 감당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충분한 에너지를 섭취하며 먹고사는 일은 생명체의 크기와 모양과 삶의 방식을 바꿀 만큼 절실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뇌는 몸의 일부이면서 마음과 긴밀하게 관련된 기관이다. 그래서인지 만성 통증, 우울증, 불안처럼 뇌의 상태와 마음 둘 다에 영향을 받는 질병에는 플라세보 효과가 유난히 강하게 일어난다. 그래서 플라시보 효과보다 나은 약을 개발하기가 어렵다. 오죽했으면 거대 제약회사들이 신경정신질환 치료제 개발에 투자하는 비중을 줄이는 대신, 유전적 치료 등 다른 방법을 모색할 정도다. 


많은 사람이 몸과 마음이 분리된다는 생각에 익숙하지만, 모든 문화권의 모든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몸이 마음의 그간이라고 보고, 몸을 통해 마음을 수양하려고 한 경우도 있다. 실제로 마음과 긴밀하게 연관된 기관인 뇌는 온몸에 퍼진 신경계를 통해 몸과 상호작용하며, 몸이 주는 에너지와 물질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서로 연결되어 의지하는 것들, 그건 나약한 게 아니라 아름다운 것 아닐까... 서로 지탱해 주는 관계, 참 근사하니까.




책을 읽다 반가운 단어와 만났다. '도파민' 

심리학에 대한 얄팍한 지식 쌓기와 자가 학습을 책을 통해 병행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그때 도파민이라는 것이 뇌에서 분비되는 신경전달 물질 중에 '예상보다 많은 보상이 확인될 때 분비' 되어 '보상 심리' 로서 종종 사용되는 단어라는 것 정도 (까지만..)의 지식을 습하게 되면서, 나는 검색어로 '도파민 분비 음식'과 같은 키워드를 검색해보기도 했었다. (우습다 지금 생각해보니..) 



결국 열심히 살려했던 거였으리라. 그렇게 해서라도. 

고칠 수만 있다면 뜯어고치고 싶은 행동, 습관, 인지, 하물며 뇌까지도. 과학적인 시스템 앞에서는 어쩔 도리 없이 인간이라는 동물은 '흔들리고 휘둘리기'마련 이언정, 그 과학의 힘으로 고칠 수 있는 것이라면 의지를 내서라도 고쳐내서 오늘을 지켜내야 하는 게 태어난 생에 대한 일정 부분의 '자기애'가 근본이 된 '책임'이지 않을까. 




다수의 뇌과학자들은 중독을 도덕적 해이가 아닌 뇌를 손상시키는 질병으로 간주한다. 실제로 약물 치료를 의지로 극복하려는 노력과 병행하면, 치료 효과가 더 높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된 바 있다. 


도파민은 보상을 추구하는 회로다. 보상이라고 하면 흔히 감각적인 쾌락만을 떠올리지만, 성취감, 희망, 이해받고 통하는 느낌, 자연과의 교감, 아전 등 많은 것이 삶에 동기를 부여하고 색채를 더하는 보상이 된다. 생명체는 자신에게 유익한 보상을 추구하며 진화해왔다. (중략) 자기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을 조금씩 늘려가면서 기뻐할 수 있는 개인과 사회에서는 중독도 줄어들지 않을까. 




도파민과 세로토닌의 이동경로라고 한다. 내 안의 오늘의 도파민들과 세로토닌들도.. 길을 잘 찾아갔으면 싶다... (해마도... 사랑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안다. 도파민을 관리하려 한다는 건 역설이라는 것을. 

결국 나의 어떤 중독들을 더더욱 도파민 분비가 '그 중독'을 위해서 내면에서는 이미 어떤 보상들을 세팅하게 되고 그 목표를 향해 있는 힘껏 달려 나가게끔 이미 시스템화 시켜 버린 '나'라는 걸 이젠 외면할 수가 없기에. 병적이고 삶을 갉아먹는 중독이 아닌, 조금은 힘겨워도 결국엔 성장의 한 퀴로 삼을 수 있는 '좋은 중독' 들이 세상엔 분명 있다고 믿고 산다. 가령 활자 중독이라든가 편집증이라든가, 이런 것들은 좋게 해석하고 운동신경(?) 들을 최대한 발휘해 내어 선순환시켜내면 결국 좋은 하루들을 유지하게 만들어 줄 수가 있기에. (전제는 선순환시켜야 한다는 것...) 




뇌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은 어떤 식으로든 뇌를 변화시킨다. 우리가 누군가와 대화할 때, 협력할 때, 공감할 때, 상대방과 동기화된 나의 뇌 활동은 나의 뇌를 변화시켜왔다. 오래 함께한 부부가 서로 닮아가는 것, 닮고 싶은 사람과 가까이 지내라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신경조절물질인 도파민은 동기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도파민의 분비가 많을수록 신경 네트워크가 움직임을 일으키기 쉬운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파민 신경세포가 괴사 하는 질병인 파킨슨병에 걸리면 움직임을 시작한 어려워지고, 동작도 느려진다. 반면에 도파민이 과잉 분비되면 충동적이고 성급한 행동을 하기 쉽다. (중략) 




불완전해서 인간일 수밖에 없는 우리들은. 

그 불완전들을 끌어 앉고서 '오늘'을 산다. '나'라는 사람을 지켜내기 위한 행동이든, 나 이상의 '너'를 지키려 하는 책무 속 시간들이든,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채 방황하는 시절이든, 결국 저자의 이 표현에서 잠시 동안 과학서 안에서의 어떤 든든한 위로를 느끼고 만다. 




조금이나마 더 바르게 살아가려는 불완전한 이들의 불완전한 노력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바꾸어 왔다. 




불완전해서 더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라고 믿고 산다.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목소리들은 언제나 옳다. 

작가님의 '과학'을 향한 깊은 애정(증)과, 세상을 향해 어떤 메시지를 내뿜고 싶었는지를. 책 속 문장들과 문단들을 통해서 엿볼 수 있었듯이. (그래서 제목이 이렇게 되었나 싶고) 




과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인간 사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이뤄지려면 시민과 소통하는 과학, 과학과 소통하는 시민이 필요하다. 시민과 소통하는 과학, 과학과 소통하는 시민을 통해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실현해가는 것, 그것이 내가 이 책을 통해 여러분과 함께 이뤄가고 싶은 목표다. 




사랑하는 대상을 찾고 그것을 연구하는 이의 뜨거운 시간을 응원해보게 되는 시간 속. 

잠시 닮은 두 대상을 향한 응원 또한 살포시 보태 본다. '몸'과 '마음' '뇌'와 '신경'이라는 걸 가지고 있는 '나'와 내 주변인들의 모든 건강한 '상태'와 '현존'을 바라는 오늘. 잠시 헤매려 하는 마음을 이렇게 속절없이 아무렇게나 기록으로 풀어내는 시간 덕분에 조금은 평온을 되찾는다. 읽는 누군가로 하여금 미안해질 정도지만 어쩔 도리 없이 읽고 난 이후의 '나'를 성찰해 보는 기록의 시간들은 참으로 반갑고 감사해서 다시금 뇌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된다. 



기억을 붙잡으려는 듯한 노고이자 노동, 한편으론 이 '몸과 마음의 시간' 자체의 감사함만을 간직한 채. 



그 몸과 마음의 시간, 기억이라는 것도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끝'이라는 게 있으니, 그처럼 소중한 게 없는 것...


매거진의 이전글 지워지지 않으려, 쓴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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