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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Nov 21. 2019

아버지의 꿈

빅피쉬 

그는 언제나 나를 웃게 했다. 나의 웃는 모습을 기억하기를 원하고, 

또한 자신도 그러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원했다.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아버지는 나를 웃게 할 수 있었다. 


- 빅 피쉬 -




아버지는 꿈이 없다 했었다. 

있다면 그것은 '너희들'이라고 했었다. 나와 남동생. 그것이 아버지의 꿈이라 했던 그의 목소리. 이십 대의 그때는 슬프게 들리지 않았다. 그게 '당연' 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가 짊어지는 무게가, 꿈이 '자녀'를 향해야 하는 그 책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던 거다. 



그러나 사실 당연한 게 절대 아니라는 것, 당연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이제는 그의 입장이 되어 보니 선명히 알 것 같다. 그래서 때때로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이 난다. 아버지가 쌍둥이들과 함께 놀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손주를 품에 앉은 채 나이도 잊은 채 같이 거실 바닥에서 뒹굴며 소년 같은 웃음을 짓고 계시는 모습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그칠 줄 모른 채, 그치는 방법을 잊어버린 채로. 



미성숙하고 이기적인 '나' 좋자는 생각으로만 가득했던 그때.

'꿈은 너희들'이라 했던 아버지의 그 말이 어떤 아픔과 슬픔, 현실의 무거움과 고통을 감추며 말했던 문장이었는지 나는 알 수도 없었고 알려하지도 않았었다. 그랬던 나는 현재 그의 입장이 되어 보았고 그와 비슷하게 '부모'의 책무가 생겼고 이제는 그 말의 깊이가 어느 정도의 진심이었는지를, 얼마나 '자신'을 감출 수 있는 대단한 용기가 있지 않고서야 절대 나올 수 없는 문장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이 소설이 유난히 다르게 읽힌다. '빅피쉬' 에 나오는 아버지 '에드워드'는 나의 아버지와는 사뭇 다른, 정 반대의 캐릭터임에는 분명하지만, 아들인 '윌리엄'에게 넌지시 고백하는 그의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아프게 느껴졌던 건, 나의 아버지 때문일 테다. 



빅피쉬, 대니얼 윌리스, 동아시아, 2019.11.13.



빅 피쉬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는 많이 다른 모습일 띈다. 

'에드워드'는 자영업자로서 자신을 위한 일을 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만도 아닐지언정) 나의 아버지는 철저히 개인이 배제된 다수를 위한 노동을 일삼았었고 종속되어 있는 업장의 노동자였고 여전히 그의 노동은 현재 진행 중이다. 그런 면에서 뭐랄까, 에드워드가 조금은 이기적으로 보였지만 반대로 나의 아버지가 에드워드 같은 모습이었다면, 지금의 내가 있었을까 싶기도 해서 이상하게 마음이 아파진다. 




아버지는 자기 소유의 사업을 운영했다. 이런 것들 말고 그 이상의 뭔가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항상 뭔가를 끊임없이 추구하며 살았다. 무엇이든 그것을 성취하는 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성취하기까지의 투쟁이 중요했다. 결코 끝나지 않는 싸움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하고 또 일했다. 




때론 생존과 보이지 않게 투쟁하는 전사 같기도 하다. 우리들의 '부모'라는 이들의 모습은.



일하고 또 일하고, 끝이 없는 '노동'을 일삼는 건 어느 아버지나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같다. 

노동의 책무, 그 본연의 이유가  '다수'에 집중되는 삶이 대부분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다수라 함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개인이 아닌 가족이라는 굴레. 그 테두리 안에서 지켜내야 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지켜낸다는 것은 먹고사는 것과 자연스레 연결된다. 인간 본성상 기본적인 욕구 충족이 돼야 삶이 유지되고 그 기본적인 요건이라 함은 의식주, 즉 생계를 말한다. 그러나 생계를 위함에도 '자신' 본연의 주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고군분투하는 개인으로서의 아버지의 모습을 우리는 에드워드를 통해서 발견하게 된다. 




'나는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 큰 연못에서 노는 큰 물고기, 그게 바로 내가 원했던 거란다.' 




나는 알지 못한다. 여전히 아버지의 속마음을. 

윌리엄 (주인공)처럼 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들려준 이야기를 근거로 아버지의 삶을 '빅피쉬'  속 신화처럼 재구성할 수 있다면 나는 과연 어떤 서사를 써 내려갈 수 있었을까 잠시 상상하자니 갑자기 마음이 울컥 알 수 없는 울렁거림이 느껴졌다. 나는 아버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그에 대해서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한 채 삼십 년을 지내온 것만 같더라. 그래서... 또 이 글을 쓰면서도 눈물이 곧장 흘러 내려올 것만 같다. 아마도 그와 나눈 최근의 대화 때문일지 모르겠다. 



- 요즘은 갑자기 경력 단절이 훅 하고... 금방 올 것 같은 예감이 들기도 해. 

- 김서방은 뭐래.

- 배우자로서 할 수 있는 내조는 해줘 봐야지. 그것도 내 선택의 도리니까. 그런데 아빠. 나 지금 쌍둥이 육아 꽤 잘하고 있어서.. 단절돼도 뭐라도 할 것 같아. 공부... 준비라는 것도 조금씩 하고 있고. 

-.... 

- 그래도 아빠. 좀 무섭기도 해. 또 그때처럼 우울해하면... 어쩌나 싶어서. 

-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고, 안되면 아빠가 도와줄게. 

-....

- 못할 게 없다. 자식들 있으면. 




대신 죽을 수도 있는 그 마음은 쉽게 생기지 않는다. 정말 사랑으로 단련된 '부모'가 아니고서는...



내 아버지의 꿈은 여전히 '자식'이다. 

그의 과거와 오늘과 미래는 여전히 우리에게 맞춰진다. 윌리엄의 문장이 스쳤을 때 내가 오열할 수밖에 없었던 건 나의 아버지가 생각나서였다. '딱딱한 껍질' 속에서 자신의 진짜 '꿈'을 잃어버린 채, 잊어버린 채, 개인이 아닌 다수를 위한 삶이 이미 자신의 것이라 순응하고 인정하는 삶인 것만 같아서. 어딘지 모르게 그와는 전혀 반대의 삶을 지내보려는 내가 너무나도 모자란 부모인 것만 같아서. 



그는 자신을 '잃었다'라는 표현을 절대 하지 않았다. 

내가 보는 삼십 년의 세월 동안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개인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어서, 그래서 나는 이 문장을 보자마자 그렇게 울었던 걸까. 당신이라는 개인을 보고 싶어 하는 자식이라, 한편으로 미안하고 또 미안한 존재의 내가 정말이지 미안해서....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그는 평생을 거북이처럼 살아왔다. 감정의 등껍질 속에 숨어서 완벽한 방어를 한다.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절대 없다. 내가 바라는 건 이 마지막 순간에나마 그가 딱딱한 껍질 속의 연약하고 부드러운 부분을 보여주는 것이다. 




빅피쉬 속 에드워드는 더 넓은 세상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꾸준한 성취욕을 인정받고 사랑받으려 한다.

외부에서 '자신'을 찾아내려 하는 욕구가 역동적이고 대단히도 보였지만, 반대로 소설 속 아버지의 그런 모습에서 잠시 거리감과 동시에 역설적인 면을 보았다. 그리고 그건 소설 속 아들인, 그의 자식인 윌리엄도 희미하게 보았으리라. 결국 우리가 추구하는 그 사랑과 성취는 넓은 세상이 아니라 '집'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리가 가끔 외면하고 사는 그 진리를. 삶의 본질을. 사랑의 정수는 거기서 나와야 한다는 것을. 




아버지는 그 위대함을 더 넓은 세상에서 추구했지만, 

놀랍게도 그것은 내내 바로 여기, 바로 집에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요즘 아이 둘과 다 늙은(?) 나이에 놀아주려는 그이를 볼 때마다 뭐랄까... 안쓰럽고 미안하고 고맙고 그렇다. 힘내라 둥애비.



부모라면 자식에게 남겨주고 싶은 어떤 유산들이 생길 테다. 

나도 아직은 한참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았을 쌍둥이들을 보면서도, 문득문득 어떤 상상을 하곤 한다. 아이들 곁에 남겨있지 않은 나의 죽음에 대해서. 때로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문득 어떤 유산을 남겨줄까를 엉뚱하지만 자주 생각하는 편이다. 경험, 시간, 태도, 상상력, 용기, 자신감, 마인드, 사람, 그리고 최후에는 결국 '사랑'까지. 



그래서 반가웠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인 에드워드가, 아들인 윌리엄에게 남겨주고 싶었다던 덕목들을 읊조리면서, 나의 아이들이 오버랩되었으며 동시에 나의 아버지 또한 내게 물려준 몇 가지의 소중한, 증여세조차 붙지 않은 인생 최고의 '태도'를 남겨 준 것처럼. 




어머니가 매일 이런저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일을 할 때, 아버지는 거기에 희망과 가능성을 보탰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성향 중 내게 물려주고 싶은 덕목들의 목록을 만들었다. 


인내, 야망, 좋은 성품, 낙천성, 힘, 지적 능력, 상상력 




우리는 너무 자주, 나중에 해도 된다고 말을 하며 산다. 

나의 아버지는 그 나중이라는 것을 '개인'의 삶 안에 두었다. '나'를 위해서는 나중에 해도 가족이라는 다수의 삶을 지켜내기 위해 오늘을 살아낼 뿐이었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지금에 와서도, 종종 아버지는 '우리'라는 다수를 더 위한다. 한편으론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나'라는 존재 때문인 걸까 싶어서 마음이 저려온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의 몫 대신해서 더 열심히 개인과 다수, 두 쪽을 모두 잘 지켜내려는 고군분투뿐...  아버지든 어머니든 결국 '부모'라는 책무 안에 길들여진 두 사람을 위한 나의 이기적인 '최선' 일지도 모르겠다. '나'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나를 위함을 아직도 외면하지 않은 나이기에. 그들과는 달리... 말이다. 



삶의 초점을 '자신'의 틀 안에서 지금 여기에 맞추려 살았던 '에드워드'는 진정 행복했을까. 

그랬다면 죽음을 앞두고 말미에 아들 윌리엄에게 계속해서 '자신'의 감춰진 서사를 고백하듯 인정받으려 했던 걸까. 반대로 '우리'의 틀 안에서 다만 최선을 다하려 했던 나의 아버지는 행복했을까. 정량적으로 비교 기준이 애초에 되지 못할지 모르지만, 다만 단 한 가지는 분명히 알 것도 같다. 



우리의 이 모든 '삶' 은 그 나름대의 가치가 '충분' 하다고. 

막연히 먼 미래가 아니라 오늘 여기에서 행복하려는 최선의 열심을 행하는 모든 이들의 삶은 그 자체로 존귀하다고 말이다. 그리하여 '죽음' 이 다가왔을 때 보다 열심히 '오늘'을 살려했던 사람들은 더 웃으며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라고... 


고단한 하루 끝의 석양 그 이후의 지고 뜸은 계속 반복된다..



부모님은 조금씩 나에게서 멀어져 갈 것을 요즘 더 느끼곤 한다. 

시간이 흐르고 또 흘러, 내 앞에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그들'을 생각할 때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만큼 여전히 눈물이 차올라서 가슴이 답답해지지만, 한편으론 그 마음을 간직한 채 소중한 '우리'를 지켜내려 하는 나는, 오늘 그에게 그리고 그녀에게 전화를 해 보려 한다. 이 말을 건넬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하지만, 여전히 쉽게 입술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말은 문장으로 대신 전하는 나일지도 모를 일이다. 



눈물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이런 내가 당신들의 딸이라, 고맙고, 또 많이 미안해요. 정말 많이.  '

내가 조금 더 강해질 때까지. 그때까지 아프지 말아요.

당신들을 아프게 한 만큼, 비로소 당신들을 사랑할 시간, 내가 만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해요... 

그러니  잘 있어야 해요. 곁에서. 되도록 오래.... 말입니다. 


좋은 걸 볼 때면 이젠 당신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더 잘 살려합니다. 지켜내고 싶어서... 우리의 기억을. 우리의 시간을. 


#고마워요

#사랑...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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