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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Nov 11. 2019

혼자의 시간, 어른과 아이 사이

새벽 1시 45분, 나의 그림 산책 

어른이 어른다울 수 있는 것은 분명 그 안에 어린이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어른도, 아주 오랫동안 아이였다. 


- 새벽 1시 45분, 나의 그림 산책 - 





허를 찔렸다는 느낌이 들 때는 으레 예상치 못한 것을 뜻밖의 곳에서  발견했을 때다. 

왜 '그림' 이야기가 담겨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한 점 의심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이토록 매력적인 개인의 생각과 서사가 담겨 있는 책일 거라곤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겉 표지에서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느꼈고, 그래서 조금 끌렸을 뿐. 그러나 목차에서 한번 흠칫했고 페이지를 넘기면서 한 권을 뚝딱할 수밖에 없었던 건, 분명 문장 안에 담긴 작가의 고운 생각, 그 마음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새벽 1시 45분, 나의 그림 산책, 이동, 홍익출판사, 2019.10.25.




좋은 책은 보통 필사를 하면서 문장 줍기를 서슴지 않는 편인데. 

최근의 '정여울' 작가님의 책에 이어서 이 책 또한 어디지 모르게 짧은 단문 속속 들이 마음에 닿았던 문장들이 많았다. 이 사람은 어떤 아픔을 느꼈던 걸까, 고독이라든가 혼자의 시간을 어째서 이렇게 쿨하게 대할 수 있을까. 나는 아직 멀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상실과 실연의 고통과 마주하더라도 유연히 대처할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의 소유자 같다고. 미술을 다루는 인문학자의 생각이 어딘지 모르게 예쁘게 느껴졌던 건, 작가가 세상을, 사람을, 삶을 다루는 태도들이 문장 안에 고스란히 담겨 내 안으로 깊숙이 다가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마음을 다친 이들을 몸을 다친 사람처럼 대해야 한다. 마음의 고통은 눈에 보이지 않아 가볍게 보기 쉽지만, 마음의 아픔을 토로하는 사람을 꾀병이나 의지가 약한 사람의 유난한 반응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보고, 스스로를 돌보는 가까운 사람도 잘 돌봐야 한다. 


화가 폴 세잔은 '고독은 나와 어울린다. 고독할 때만큼은 아무도 나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라고 했다. (중략) 세잔은 남프랑스 엑상프로방스의 고향마을에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풍경을 관찰하며 보냈다. 자연의 독창적인 일부가 풍경이 되고, 풍경은 세잔의 내면으로 흘러들어와 이미지로 압축되고, 그의 캔버스는 위대해졌다. 그것은 외로움을 극복한 고독의 결실이었다. 




[폴 세잔, 그림을 그리는 화가] 문득... 화가들의 다른 그림들을 찾아보다가, 등을 바라볼 수 있는 누군가의 따뜻한 시선이 정겹다




새벽 1시 45분, 내 안의 어린이와 만나는 시간 

하루를 온전히 한 명의 나로 살기는 버겁다는 작가의 문장에서 어딘지 모르게 깊은 위로를 건네받았다. 나만 그런 건 결국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에게 대신 전해 들은 기분이었으니까. 누구든 수많은 얼굴들을 가지고 사는 삶이라는 것을 말이다. 여러 얼굴들 중에서는 '혼자' 가 되는 시간만큼 욕망에 근접한 솔직한 시간이 어디 있을까 싶다. 어른으로 지내다가도 (지내려 노력한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도) 결국 완벽한 민낯의 욕망에 충실하게 되는 '나'를 발견했을 때. 어른의 몸을 하고 있지만 천진난만한 발상이 위험하기 짝이 없을 지도 모르는 '아이다움'을 비로소 드러내고 마는 혼자의 시간, 그는 그림을 산책한다 했고 나는 '책'으로 여러 삶을 산책하는 편을 택한다. 뭐가 됐든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렇게 삶을 지켜낸다. 





돈을 벌어야 하는 시간 동안은 돈 버는 나로 산다. 퇴근과 동시에 돈 버는 나도 퇴근시킨다. 

그리고 시간을 돌려 어린 시절의 나를 꺼낸다. 


아무 목적 없이 그저 떠돌듯이 걷는 사람을, 프랑스에서는 '플라뇌르' 로 부른다. 정처 없이 도시를 걸을 때, 시간을 흘려보낼 때, 평소와 다른 생각이 머릿속으로 밀려든다. 




오랫동안 아이였던 우리들은 아이를 숨긴 채 어른이 되려한다. 그 고군분투함 조차 사랑스럽다. 둘 다 지켜내려는 마음 같아서.




'식상하지만 의외로 위로가 되어주는 말' 들을 곁에 오래 두고 싶었다. 

티베트의 속담이라 했던 '걱정을 한다고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다'라든지, '최선의 결과를 기대하되 최악을 대비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열심히 살면 된다'라든지. 다가오는 이 말들을 오래 품고 지낼 수 있다면, 알지 못하는 미래의 어떤 막연한 불안이라든가 원치 않은 순간들과 마주했을 때조차, 그리 많이 아프지 않을 지도 모를 일이다. 




티베트 속담의 가르침대로, 걱정이 우리를 행복으로 데려가지 못한다. 그러니 고민은 하되 걱정은 말자. 어른들이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이 걱정하느라 시간을 허비한 것이라고 하니 말이다. 최선의 결과를 기대하되 최악을 대비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열심히 살면 된다. 




작품을 보는 예술 인문학자의 시선이라서 그런 걸지 모르겠다만. 

세심하고 섬세한 그의 시야가 어딘지 모르게 부러워진다. 조용한 예민함을 감추면서도 드러내기 일쑤인 나는, 이 뾰족하게 날 선 예민함이나 섬세한 감성들을 한때 버려버리고 싶었지만, 어쩌면 이 성격 덕분에 더 빛날 수 있는 나만의 문장들과 마주하게 되는 건 아닐까 싶은 마음에, 조금만 더... 간직하고 살아보려 한다. 날 선 반응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작은 일상 속의 소박한 것들에 마음을 건네줄 수 있는 따뜻함이 살아 있다는 반증일지도 모를 테니까. 




예술 작품을 가까이 두고 나를 비추고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얻게 된 예리한 시선으로 세상을 살다 보면, 나는 섬세하고 세심한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지 않을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제 나이에 맞게 세상을 보고 행동하는 태도를 갖추는 것이다. 


예리하게 세상을 보고 예민하게 느끼되 상대를 따뜻하게, 즉 섬세하게 느끼고 세심하게 반응하는 내 삶의 태도로 삼고 있다. 빈센트 반 고프의 자화상을 바라보고 새끼손가락을 꼬집으며 그것을 되새긴다. 



늘 똑같은 시간들의 연속일지라도 그 안에서는 매일 크고 작은 성장통들이 자라난다. 그렇게 혼자로 우뚝 서게 된다.



아마도 오늘 새벽 1시 45분은 얼마 남지 않은 공모전을 위해 손가락을 부산스레 놀리는 시간일지 모른다.

아니, 아마 그러할 것이다. 왼쪽 손등 위에는 어김없이 볼펜으로 잊어버리지 않기 위한 어떤 메모들이 선명히 적혀 있는 '오늘'이니까. 한껏 들뜬 어린아이마냥 준비하는 들뜨는 시간들을 통과하다 보면, 숱한 고배를 마셨던 과거가 떠올라 그 들뜸은 금세 사라지고 어느새 잿빛 불안이 다가온다. 그러면서도 '이번에는'이라는 어떤 알 수 없는 진지한 각오들이 묘하게 중첩되어 나를 찾아온다. 이번 주의 새벽은, 산책하듯 마냥 편안하게 읽는 시간을 가질 순 없지만, 대신 여전히 뜨거워질 수 있는 어른이자 아이의 시선으로, '나의 시간'을 산책하려 한다. 



새벽 1시 45분, 누군가의 그림 산책이 

사실은 살아온 뜨거운 삶의 기록들로 만들어져 내게 선물처럼 다가온 것처럼. 



언제나 커서가 깜빡이는 백지를 대하는 마음은.... 아프지만 옳았다. '나' 를 잃지 않으려는 나에게만큼은.



#새벽에_쓸수밖에_없는사람에겐_그_새벽을_지켜냄이_애틋하다_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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