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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Dec 04. 2019

알을 깨고 나온다, 그래야 날 수 있다.

데미안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 데미안 - 





헤르만 헤세라는 작가 연보를 보았을 때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던 건 그의 유명한 대작들이 스쳐 지나감과 동시에 그의 약력 중 15세 때 퇴학한 후신경 쇠약으로 자살 기도를 했다는 문장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거장들은 일찌감치 그들만의 역사에서 굵직한 사건들과 조우한다지만. 여전히 상상이 잘되지 않는다. 15살의 나는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고 분식을 먹고 만화 이야기를 하기에 바빴었는데. 이분은 철이 일찍(?) 드신 거지 아니면 삶이 얼마나 굴곡지었던지. 그랬기에 이런 책들이, 대작들이 나올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데미안, 헤르만 헤세, 모모 북스, 2019.10.30.



29세, 그는 수레바퀴 아래서 예서부터 시작해서 매년 책을 출간한다. 

'속세의 이야기들', '이웃 사람들', '게르트루트', 맙소사 시집까지도. (진정한 '작가'의 장르는 바로 '시'라는 세계일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집필은 계속된다. 그러다가 42세가 되어 나온 책이 바로 '싱클레어'라는 필명으로 시작된 '데미안'이라는 것. 이루 말할 수 없는 경이로움과 존경과 대단함으로 가득 찬 어떤 인물들과 만나게 되면 으례껏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게 된다. 찬양이 너무 깊다 보면 때로는 아무 말할 수 없이 그저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이런 게 바로 팬심인 걸까..... 작품을 사랑하는 수준에 이르는 마음이라면 )  


쓰는 사람들은... 자신의 외로움과 세계를 지키기 위한 어떤 싸움을 부단히 해내는 듯싶다.. 겨울 같은 시간일지언정.



헤르만 헤세라는 작가의 이름이 처음부터 나오지 않고 '싱클레어'라는 필명을 통해서 세상에 나온 '데미안' 

그랬기에 나는 계속하여 데미안을 재독 하면 할수록 이야기에 빠져들기보다는 '헤세'를 생각하는 시간에 빠져들고 만다. 쓰지 않고는 못 배겼을 이 대단한 작가님의 줄줄이 이어지는 출간 활동들,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았던 그 시절에도 꾸역꾸역 써 내려갔었을 그 아픔과 고통의, 절망과 희열의 연속이 있었기에 그만의 독특하고도 울림 진한 문장들이 나올 수 있었으리라... 한 페이지가 흐를수록 필사하고 싶은 문장들은 여전히 가득해서 손가락은 부단히 움직이면서도 머릿속에는 아득한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 문장들을 다 외워버리고 싶을 정도의... 그런 끌림이겠다 




그 시절의 여러 가지 일들이 내게 향기를 뿜으며 다가와 슬픔과 기쁨의 전율로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어두운 골목길의 밝은 집과 교회 탑, 시계 소리와 사람들의 얼굴, 아늑하고도 따사로운 느낌으로 가득 찬 방, 비밀과 유령에 대한 공포가 가득 찬 방들의 추억이다. 


하나의 세계는 아버지의 집이었다. 그 세계는 매우 비좁아 오직 부모님 두 분만을 포함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영역의 대부분은 내게 매우 친숙하다. 


또 하나의 다른 세계 또한 우리 집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이질적인 세계였다. 냄새와 말씨부터 달랐고, 기대와 요구도 완전히 달랐다. 




부끄러웠다. 데미안을 읽어 내릴수록. 

나의 문장들이 이상하게 부끄럽고 책도 사실은 마찬가지다. 읽는 사람으로서는 꽤 만족하는 편이지만 쓰는 사람의 세계 안에서는 여전히 부족해서 늘 겸손한 마음을 지니게 된다. 정말 '제대로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단어의 선택과 활용폭, 문장의 깊이, 메시지 속 울림까지.

결국 '사유'와 '생각의 탄생' 은 바로 그 작가의 태도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삶의 연륜 와 경륜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어서.... 이런 문장들과 접하게 되면 그저 고개를 숙이고 계속 정진하는 수밖에, 쓰는 사람으로서 달리 도리가 없다. (한편으론 두려... 다. 다시 문학을 하고 싶어서........... 나는 이제 어느 정도 포기했음에도.... 마음은 아직 살아있는 걸까. 저 내면 어딘가에서만큼은) 




무엇이 오게 될지는 짐작할 수 없어. 유럽의 영혼은 오랫동안 쇠사슬에 맹 있던 짐승과 같아. 그것이 해방되었을 때 최초로 행할 행동은 분명 칭찬할 만한 일은 아닐 거야. 그렇지만 지금까지 오랫동안 기만당하고 얽매어 왔던 영혼의 진정한 고난이 온 천하에 드러날 수만 있다면 우리들이 지나온 길이나 돌아온 길 같은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그렇게 도면 우리들의 날이 오는 거지. 새로운 지도자나 입법자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의지자로서, 운명이 부르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동행하고 그곳에서 있을 각오가 되어 있는 그런 사람으로서 필요하게 될 거야. 




문장들을 '나의 알' 속에 다 담고 싶을 만큼의 사랑.... 이겠다. 이 마음은...




데미안 속 싱클레어 내러티브는 분명 작가 본인의 세계가 담겨 있는 것이라고

감히 짐작이라는 것을 하면서 읽다 보니 (세간엔 그러하다고도 하지만 진실은 작가 본인만이 알지 않겠나 싶고) 카인이라는, 그리고 베아트리체라는 여태껏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이질적인 세계의 또 다른 캐릭터들을 만나면서 조금 더 '삶'에 균열이 일어나는 싱클레어, 작가 본인의 성장기.



어쩌면 틈과 균열 덕분에 삶은 성장하는 걸지 모른다. 

그 안을 비집고 들어오는 신선한 경험들이 곧 우리 삶으로 하여금 어떤 '성장' 들을 이뤄내리라. 누군가는 그것을 성장통이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그것을 추억이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그것을 그저 스쳐가는 기억의 단편쯤으로 생각하리라. 갖다 붙이기에 어찌 되었든지 간에 나는 그 '틈'을 사랑하는 편이다.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신선한 자극, 충격, 그것이 고통스러운 추억으로 당시에는 느껴질지언정 시간이 흘렀을 때 그것들은 결국 모두 삶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들'로 자리 잡겠노라고. 



그리하여 고전을 계속해서 재독 하는 시간을 가끔 가질 때마다. 나는 현재의 삶을 되돌아본다. 

엉켜있던 현재의 삶 속 실타래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할지언정, 그 실타래를 풀어내는 현실의 과정 안에서 어떤 혜안들을 다시 건네주는 묘미는 바로 책을 읽는 시간, 특히 '고전에 기대는 시간' 일 테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들은 그래서 더 소중하다.... 더할 나위 없이 고맙다....




더군다나 우리는 그 유명한 구절을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알을 깨고 박차 나오라는 그의 진득한 이 문장은, 요즘의 나로 하여금 자꾸만 들썩이게 만든다. 새로운 세계로, 정글 밖으로 깨쳐 나오려는 이 숨 가쁘게 흘러가는 24시간 속에서 그의 문장을 다시 한번 다이어리에 적어 본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나오려고 했던 건 (아... 이 울보는 언제쯤에나 마를 수 있을까. 아이를 키울수록 눈물은 더해진다)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깨고 날아가야 한다. 일단 깨려 하는 '생각'을 해야 움직임이 생긴다. 

알을 깨고 비로소 굽혀진 날개를 펴고. 날개를 펴려고 하는 자만이 비로소 하늘을 바라볼 수 있고 그 하늘을 위해서 날을 준비라는 것을 할 테다. 나의 날개를 생각해본다. 아직은 여전히 보이지 않은 날개를... 그럼에도 스스로는 꼭 지키고 싶어 진다. 찾아내려 노력하는 요즘의 시간들은 그리하여 더욱 치열하고도 뜨겁게, 그렇게 어떤 움직임들을 해낸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한 요즘...이다... 



양장본의 매력을 요즘 들어 엄청 느끼는 중....



싱클레어를 성장시키는 건 결국 삶을 통과하며 만나게 되는 '인물들' 덕분일 테다. 우리 삶도 그러한 것처럼.



머리말의 전율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알을_깨고_다가갈께_기다려_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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