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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Dec 15. 2019

10년으로 연결된 당신들에게

사십 대의 그, 삼십 대의 나, 그리고 이십 대의 그녀에게 

그 해 나의 얼굴이 서로 닮아 있었던 것처럼 

혹은 첫인사의 안녕과 끝인사의 안녕이 그러한 것처럼 


-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두 얼굴 - 





- 결혼한단다. 



수화기 너머로 들린 친정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그녀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분명 약간의 미열기를 머금은 사람인 양, 상기된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건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결혼'이라는 단어가 그녀에게 주는 무게감은 분명 그리 가벼운 것만은 아니었으니. 둘 있는 자식 중 개혼이었던 나 때문에. 나는 남동생이 내심 말했었던 농담을 정말 진담으로 받아들이고 마는 우를 범하고 말았던 것임에, 나 또한 적잖이 당황했었다. 설마 했었으니까. 



한편으론 진심으로 축하하고 싶었지만 말이 쉽게 떨어지진 않았다. 

사실 나는 그 '진심'이라는 걸 쉬이 내뱉지도 못하는 인간이 되고 말았기에. 그럼에도 나는 있는 힘껏 이야기했다. '같은 말이라도 조금 따뜻하고 예쁘게 하려 노력하는 편'에 나도 속하고 싶었기에. 한때 내가 모친에게 두고두고 '말'로 상처를 주고받았던 기혼 제도 전후로 들어가기 직전의 비수 같은 말들을 기억하기에. 또 한편으론 동생의 새 출발을 진심으로 축하해주고도 싶었기에. 다만.... 다만 어딘지 모르게 정말이지 '말'이라는 게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동생은 내심 내게 말했었기에.  '누나를 보면 결혼 생각이 가끔 달아나기도 해'라고 했던 그 말이... 여전히 내 마음속에 부유하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타인에게 별생각 없이 건넨 말이 내가 그들에게 남긴 유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조금 따뜻하고 예쁘게 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 



얼어붙은 말은 쉬이 녹지를 못 한다. 그래도 천천히 녹아들어 간다. 시간이라는 약과 함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결혼 전에 읽었더라면 

이십 대의 마지막을 통과하는 그 시절,  '운다고 달라지는 건 정말이지 별로 없다'라는 깡으로 조금은 더 열심히 신혼 초를 버틸 수 있었을까 싶은 어설픈 상상을 문득해봤다. 아울러 회사 생활을 하면서 만났던 그이와의 만남이라든가 관계를 떠올리던 중, 문득 사회 초년생 시절 생각에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를 그 시절에 읽었더라면 조금은 더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으로, 어설픈 위로라든지 위안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그 긴긴 '회사 인간'으로 사는 시간의 서사를 조금은 더 '홀로'  묵묵히 견딜 수 있었을까 싶었다. 





매일 나 자신에게 물었다. 도대체 얼마나 더 노력해야 바라는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걸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대답할 수 없었다. 

늘 나중에 올 행복을 위해 현재를 희생했던 나는 그토록 바라던 행복이라는 게 대체 뭔지도 몰랐으니까. 

그런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였다. 행복할 수 없다면 더 이상 불행해지지라도 말자 


-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 




그랬다면.. 정말 혼자서 잘 버티고 있었다면 

그이를 만났어도 누군가에게 '의지'를 은연중에 한다든지 그로 인해 싹트는 어떤 연정이라든지, 하여튼 타인을 향한 어떤 기대감과 같은 설레고도 그리운 감정이 조금은 덜했을까 아니면 더 싹텄을까 뭐 이런 엉뚱한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모두 그 '결혼한단다'라는 문장이 내게 안겨준, 현재로선 모두 무쓸모 한 상상들에 지나지 않으리라. 이미 지나간 과거에 답은 없고 다만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짓궂은 생각일 뿐. 



가보지 못한 길은 그저 희미하게 그리워한다. 모두가 그러하겠다. 나만 그런 건 아닐 거라고.




한때, 나는 지독히도 외로움을 탔고, 혼자를 두려워했다.

혼자가 무서웠다. 혼자서 사회생활을 견디는 일도, 혼자서 이별을 감당해야 하는 시간도. 그 어리석은 시절의 나는 곁의 가족들의 존재는 그야말로 아웃 오브 안중, 생각해보면 그들이 나를 지탱해준 유일한 비빌 구석이고 버팀목이었으며 이성적인 시선을 늘 관철시켜 준 고마운 관계였음에도, 나는 하물며 '가족'으로 맺어진 그들에게조차 떨어지려 했었으면서도 동시에 혼자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누군가를 하염없이 찾으려 했었던 것도 같다. 정말이지 역설적으로. 삶은 이렇게 아이러니함의 연속인 걸까. 부모님께 떨어지고 싶었던 그 철없던 시절의 내가 '결혼'이라는 약속과 함께 기혼 제도에 편승하듯  '그이'와의 생활을 유지하면서도 여전히 '혼자'라는 느낌 탓에 어쩔 도리 없이 속수무책으로 아파해야만 했던 그 시절. 



그 시절이 생각나서 나는 무슨 오지랖에 

나와 거의 십 년의 거리를 두신 동생의 반려자가 될 그녀에게 감히 이 문장을 건네고 싶어 졌다. 물론 동생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만나고 싶은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다'라는 문장은 살면서 정말이지 아주 깊게 믿고 싶은 문장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만나고 싶은 사람에 대한 기준은 '나'라는 사람의 단단한 마음이 보다 바른 사람, 괜찮은 사람으로 이끌어주는 게 아닐까 싶은 마음에. 그들에게 '만나고 싶은 사람' 이 바로 동생과 그녀라면, 그들의 선택에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을 보내주면서도 한편으로는 대조적으로 나와 그이의 그 시절, 우리는 만나고 싶은 사람이었던 걸까, 그랬다면 왜 그렇게 서로를 아프게만 했던 걸까 싶어서. 자꾸만 과거로 돌아가려는 나를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차에서 잠든 쌍둥이들을 보면서 내내 어떤 생각에 사로잡히는 나를 막아내야 했다. 





이 삶을 장악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인생길 위에서 누구를 마주칠 것인가 기다리지 말고, 

누구를 마주칠 것인지를 정하고 내 인생길 위에 그 주인공을 세워놓아야 한다. 

만나고 싶은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다는 믿음이 우리를 그 사람 앞에까지 ‘데려다준다’.


- 혼자가 혼자에게, 만나고 싶은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다 -




참 아름다운 문장이어서, 몇 번을 입 밖으로 흘러내 보았다. '데려다준다'라는 그 귀한 문장을... 날 데려가라는 듯이.




집으로 돌아오는 귀갓길, 차 안에서 나는 그이에게 말을 걸었다. 


- 여보, 내가 스물여섯에 마지막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비혼'을 선언했다면, 그래도 우리는 만났을까? 

- 또 무슨 꼬투리를 잡으시려고 그러시나

- 아니 그냥.. 준영이 결혼한다니까, 여러 생각이 앞서서. 

- 서운해?

- 그냥... 나처럼 힘들진 않았으면 싶어서. 

- 흠.... 지금은 불행해?

- 모르겠어. 둥이들하고 요새 대화하면 완벽히 행복한 것 같으면서도 혼자의 시간이 힘드니까 불행해지는 게 쉬운 것 같고.  예전엔 혼자라는 외로움에 괜히 많이 울고 그랬었는데, 한편으론 지금은 혼자가 참 희소해졌잖아. 양육하고 일하고 집안 대소사 챙기면서... 역할극이 많아지니까.. 그래서 혼자인 시간이 너무 행복한데 그래도 눈물은 여전히 나. 

- 앞으로 덜 울면 되지. 조금만 더 힘내자. 




그이는 언제나 그 말을 했었던 것 같다. '조금만 더 힘내'라고. 

신혼 초, 유산으로 인한 아픔을 겪을 때도, 퇴사를 하고 싶어서 때로 견디지 못하는 극심한 스트레스가 치솟는 시절을 관통하던 시절에도. 곁에 '그이'의 존재가 있기 시작했을 때 그는 나에게 '조금만 더'라는 말을 했었던 것 같다. 그랬던 그이에게 내가 요즘은 반대로 그 말을 건네곤 한다. 나와 십 년 여의 세월을 더 산 그이에게 어떤 위로를 건네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살면서 베어든 잔정과 애달픈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인 셈일까. 회사 생활의 적잖은 고충과 다소 큰 환경 변화, 아울러 시부님의 건강 악화로 인해 드라마틱하게 변해버린 요 근래의 현실 생활 속 무게들이 적잖게 그이의 어깨를 무겁게 하리라는 걸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아는 '배우자'가 되어 버렸기에. 



십 년 전의 나에게 건네고 싶은 책들은 

사실은 십 년의 세월을 더 많이, 혹은 아직 덜 지낸 그들에게 건네고만 싶어 지는 12월이다. 그들이 덜 울기를 바라는 마음과, 그들의 행복을, 아울러 이제는 혼자의 시간이 아주 많이 희소해진, 가끔은 애틋할 정도로 '혼자의 시간'을 그리워하는 나에게. 나는 이 세 권의 책을 떠올리고 말았다. 



오늘의 우리들이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결국 행복하고 싶어서 열심히 살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듯 삶을 지내며 아픔을 느끼더라도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라는 담백하면서도 스스로에게 경건한, 괜찮은 마음으로, 그렇게 '혼자가 혼자에게' 때로 관대한 시선과 따뜻한 애정을 스스로 건네주며 아울러 '나'를 비롯한 내 곁의 사람들에게도 긴 애정을 보낼 수 있는 마음 그릇의 소유자로 새해를 맞이하기를. 



10년을 두고 연결된 우리들은 다른 듯,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었던 것은 결국 마음이겠다. 만나고 싶은 사람, 그리고 사랑을 향한 

그때의 그 얼굴, 그 마음이겠다... 



우리가 보다 투명한 마음으로, 서로의 시간을 따로 또 같이 걸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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