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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an 06. 2020

스텝이 엉키지 않았으면 몰랐을

이제 나는 믿는다. 보이지 않더라도 같은 시간 속에서 성장하고 있을 그녀들의 존재를. 

엄마들의 시간이 함께 흘러가고 있는 것을 말이다. 


- 스텝이 엉키지 않았으면 몰랐을 - 





독감으로 아이들을 친정으로 피신시키듯, 맡기고 돌아오며 

엄마와 잠시 주고받았던 대화가 어찌 생생히 떠오르는지. 눈물은 나지 않았지만 굉장히 뒷맛이 쓴 사탕을 오물거리면서 평생 이 쓴 캔디를 먹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인생' 같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심지어 그 인생의 캔디 중 나는 아주 쓴 캔디 하나를 내내 입에 물고서 어서 닳아 없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인 것 마냥...



- 그러니까 애 키우는 엄마가 체력 관리를 진작에 했어야지. 건강 있을 때 챙기라고. 

- 미안해 엄마.. 매번 엄마 신세 지네 

- 하여튼 요새는 한 명 키우기도 벅차다던데 쌍둥이 엄마가 됐음 각오를 해둬야지

-.... 내가 원해서 된 건 아니니까

- 그만해라. 애들 듣는다. 하여튼 잘 먹고 기운 차려. 

- 엄마도 아픈데 미안해. 




여전히 때로 나는 삶이 난감하다. 

이토록 난감한 상황에 '자주' 봉착하곤 하는 이유는 바로 내가 아프기 때문이고 그 나라는 사람의 역할이 바로 온전히 '나'가 아니라' 엄마'로 살아야 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스텝이 엉키지 않았으면 몰랐을, 은수, 이비락, 2019.12.05.



'엄마'라는 입장의 작가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섣불리 모든 것을 다 이해했다고도 말하지 못할 것도 같았다. '명함 없는 삶' 조차도 스스로 살림을 지키고 집안의 식구들의 건강을 지키는 것은, 내 눈에는 그 '과업' 이야말로 워킹 맘보다 훨씬 더 엄청나게 힘든(?!) 일이라고 생각되기에. (그래서 내가 전업주부를... 할 수가 없다. 성향 상 그러면 더 탈이 날 것 같아서)  일을 해서라도 사회생활을 다시 재개하고 싶은 작가님의 고군분투도 책 속 에피소드들 안에서 그려지지만 한편으로는 짠하게 마음을 울리는 현실의 장벽을 글자로 보고 있으려니 이상하게 마음이 답답해져 옴을 느꼈다. '경단녀'가 된 이후에는 저임금 노동시장에서 노동 착취가 뻔히 보여도 달리 선택의 길이 협소한 것이 바로 이 시대의 자명한 '현실' 이니까. 취업시장이 얼어 있다고 하나 그 얼어 있음에 아예 길 조차 뚫리지 못하는 것이 바로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 여성들의 현실이고 사회적 불평등과 시스템이 낳은 모순의 결과일지 모른다. 




제2의 커리어를 준비할 시간도, 체력도, 마음의 여유도 없으면서 그렇다고 아이를 키우는 데 온전히 집중하지도 못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이대로 나이 들면 어쩌나 초조함에 일을 구하기도 했지만 경력을 살리는 일자리를 선택하기보다는 '아이 어린이집 갔다 올 동안 할 만한 일자리'를 찾는 데 급급했다. 불안정한 저임금 노동 시장으로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사회가 많이 변했다지만 아직까지도 엄마가 일하려면 많은 장애물이 있고 그 장애물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헌신과 희생이 필요하다. 어린이집 선생님이든, 친정 엄마든, 시어머니든 엄마의 노고를 대체할 사람이 있지 않고서는 엄마가 일하기 힘든 환경이다. 





미혼의 글쓰기와 기혼의 글쓰기, 아울러 아이의 유무는 인간에게 삶의 관점을 바꿔 놓는다고 보는 편이다. 

아울러 지독한 편견이 내게는 이제 붙어버리고 말았다. '나'라는 사람의 모든 심신 에너지를 '희생' 하면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살아보는, 그 양육의 세계에서 온 힘을 다해 자신을 내던져보지 않은 이들은 진짜 '어른' 이 아닌 것 같다는.... 같잖은 생각을 하는 편이다. 쉽게 말해서 육아해본 사람과 해보지 않은 이들의 '관점' 은 어디가 달라고 다르다는 것. 하다못해 '배려'와 말 한마디에서 오고 가는 뭐랄까.... 표현이 쉽지 않지만 상대를 생각하는 '세심함'이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왜냐하면... 결혼 후에 아이를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부모'라는 이들이 행해야 하는 온갖 인고와 정신력의 싸움은 그 무엇도 바라지 않은 '이타심' 이 없고서는 도저히 해내기 힘든 것이기 때문에... 



'나'를 어느 정도 포기할 줄 알아야 '남' 이 길러지기 때문이리라. 

신생아 육아 시절엔 현실을 버티는 것도 여간 고문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잃어버리고 살았던 (그래야 또 살아지긴 했다만) 창살 없는 감옥이었기에.... 그 감옥을 다녀와보지 않은 이들의 생각과 사람 대함은 다녀온 사람의 그것과는 조금은 다른 것 같더라. 회사에서도 말을 몇 번 주고받아 보면 알 수가 있었다. 이 사람이 아이를 기르는 데 동참을 하고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철이 있는지 없는지.. (내가 뭐라고...) 




결혼하고 아이를 키운다는 건 이기적인 본성을 거슬러 완전히 이타적인 존재가 되어 보는 경험이었다. 단순한 이해득실로 따지기 어려운 시댁이나 이웃과 맺은 복잡한 관계를 풀어 가야 했고 그 와중에 당장의 사회적 성취에서 밀려난 초조한 마음까지 다스려야 했다. 누구나 겪는 일상 같지만 그 내면의 결은 누구도 똑같지 않다. 



아이를 사람 만들어서 키우고 살리고 보살핀다는 것은 말이 쉽다. 하물며 커리어를 지키면서 애를 키워내는 워킹맘의 심정은... 할 말이 없어진다....




끈질기게 자신을 찾으려 하다 보니 그녀가 책을 읽고 글을 쓰게 되었듯이. 

나는 그 마음과 행위를 충분히 이해한다. 아마도 읽고 쓰는 '엄마' 들과 '아빠' 들은 다 비슷하지 않을까. 자신의 삶을 아주 조금이라도 지키고 싶고 '자유' 로운 사유와 사색의 시간을 간직하고 싶기 때문에. 그래야 조금은 숨통 틔고 살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렇다면 스텝이 엉켜 버리는 것 같은 엉망진창인 삶의 연속도 사실은 크게 보면 모두 다 경험의 산물이고 그로 인해 얻는 교훈 하나가 있다면 그 시간들 또한 값진 보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본다. 




뒤엉켰다고 생각한 시간 속에서 오히려 더 끈질기게 나를 찾았다. 엄마와 나 사이에서 길을 찾으려고 몸부림쳤다. 누군가의 지혜와 경험이 등불이 되어 줄까 싶어 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엄마가 되었지만 나를 지키고 싶었고, 나를 잃지 않으면서도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 고민한 시간들. 작가들의 삶의 여정에서 책 속 인물들의 일상에서 그 시간이 밀도 있게 드러났다. 




올해는 그 '엄마' 노릇을 조금 더 제대로 야무지게 스스로 해낼 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정초부터 아파지니 여간 신경이 곤두세워지는 요즘의 나날이지만, 그로 인해 친정 부모님의 소중함과 감사함, 죄송함이라는 감정이 찾아들어오니, 일단 삶이 불어닥치는 이대로 흘러가 보며.... 조금은 마음을 너그럽게 더 먹으려는 연습을 행해본다. 아니 그것보다 먼저, 어서 나아야 할 테다. 



그래야 다시 '쇼'는 시작될 수 있을 테니까. 

삶이라는 쇼는.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그 쇼는 멈추지 않기 때문에. 



내용과 달리 책 디자인이 어딘지 모르게 많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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