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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an 28. 2020

계속 써 봅니다. 당신과 나의 서사를.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기록하며 적극적으로 내가 되어간다. 

타인의 글을 읽으며 적극적으로 각자가 자기 자신이 되는 과정을 지지하면서. 


-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 






행복하다고  느꼈던 순간 속 '나'를 관찰하자니

흔히 이런 장면들 속의 내가 있음을 이제 나는 알게 되었다. 새벽에 일어나 건강히 잠든 아이들에게 이불을 덮어줄 때, '엄마 울지 마'라든가 '엄마가 걱정돼서'라는 목소리에 눈시울을 붉힐 때. 읽다만 책을 집어 들어 몇 분이라고 읽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벅차오르게 만드는 순간은 다름 아닌 '쓰는 나'를 발견할 때. 조금 더 표현하자면 의무나 책임이 수반된 글쓰기가 아니라 완벽하게 마음 깊숙한 곳에서 쓰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의 어떤 감정 혹은 글감이 떠올랐을 때 냉큼 써 내려가는 혼자만의 시간... 그 시간 속의 '나'를 발견하면, 나는 이번 생이 어느 정도는 망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것을.... 몰입할 수 있는 것을 비로소 찾았다고 믿기에.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홍승은, 어크로스, 2020.01.30.



그래서였을 거다. 그녀의 다음 신간을 내내 기다렸던 것이.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를 읽고 냉큼 그녀의 '팬' 이 되어 버렸고 작가님의 일상을 틈틈이 공유받으며 그 거칠고도 힘겨운 삶 속에서도 무언가의 따뜻하고도 단단한 문장들이 삶 속에서 적잖은 '힘' 이 되어 주었기에. 이미 그녀는 내 마음속에서 용기 있는 '고백'을 할 줄 아는 진정한 서사를 보여주시는 '진짜 작가'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하니 단언컨대 이번 책이 '글쓰기' 책이라는 사실과, 읽어 내리는 그 시간들이 얼마나 벅차올랐는지는.... 아마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내가 아니고서야.  퇴근길에도 계속해서 그녀의 문장에 밑줄을 치고 한 페이지가 넘어가기 무섭게 필사를 하고 싶을 정도의 마음이었으니까. 





나는 이혼한 집 딸, 전문대 출신, 성적으로 문란한 여자라는 몇 가지 단어로 간편하게 설명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중략) 손쉬운 판단은 귀를 통해 몸으로 성큼 들어온다. 편견을 지속해서 덧입는 사람은 자신이 편견 자체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어떤 글은 존재를 입체적으로 증명하지만, 어떤 글은 존재를 납작하게 만든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도, 읽는 사람에게도 그렇다. 글쓰기에서 가치판단이 적용되는 기준이 있다면 바로 이 부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의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는 글, 고유한 개개인을 하나의 덩어리로 뭉개는 글은 위험하다. 나의 첫 글쓰기는 위험했다. 




어떤 부분에서 나의 글쓰기 또한 여전히 나에겐 안전하나 그만큼 위험.. 하다.



여성의 서사는 어쩔 수 없이 '가족'이라든가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기에 어떤 젠더보다도 여성 서사가 빛날 수 있고 애틋하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또한 그 안에 들어있는 온갖 희비가 생생하게 살아 있기에.  무엇보다 작가님의 '폴리아모리' 고백을 통해 나는 내심 '뜨끔' 했었다. 한편으로 그 단어를 온 천하에 공개하시는 그 뜨거운 용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또 한편으로는 아주 오래전 (어쩌면 아직까지도) 상당한 고민을 해 온 '나'를 은연중에 겹치듯 발견했기에... 그렇듯 누군가의 '글'로 인해 누군가는 위로를 받는다. 힘을 받고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용기마저도 전해받는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적든 크든 해냈던  누군가의 글을 읽으며 우리는 위로받듯이. 




'너 순결한 여자 아니잖아, 문란한 창녀잖아. 그러니까 내가 도망친 거야.'


환멸감에 스트레스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내 섹슈얼리티의 역사를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더럽다는 말, 몸을 막 굴렸으니 평생 벌 받을 거라는 말, 입 닥치고 살라는 말, 공공연하게 사적인 일을 떠들지 말라는 말, 더러운 창녀니까 당할 만하다는 말. 그 말들 때문에 나는 입을 떼기로 마음먹었다. 말하는 고통보다 말하지 않는 고통이 더 클 때 사람은 말하게 된다. 나는 내 몸의 역사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뱉는 만큼 나는 가벼워졌다. 그렇게 용기가 일으킨 연쇄 작용으로 계속 글을 쓰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나는 가정폭력, 데이트 폭력, 임신 중단 수술, 섹스, 자위를 비롯한 다양한 경험과 욕망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만약 한 여성이 자신의 삶에 대해 진실을 털어놓는다면, 아마도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라고 뮤리엘 루카이저는 말했다. (중략) 적어도 성폭력에서 '때린 놈은 발 뻗고 못 잔다'라는 말은 거짓이다. 때린 놈은 편하게 자지만, 맞은 사람은 모든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며 밤을 지새운다. 내가 그를 믿지 않았더라면, 내가 더 강하게 거부했더라면, 내가 밤늦게 돌아가지 않았다면...




말하지 못한 비밀 혹은 상처는 내면에서 곪다가 일순간의 계기에 툭 하고 터져 버린다. 

나의 고름은 딱지가 되었고, 지금의 고름도 시간이 흐르면 굳어지리라. 하나 그 과정에서 나를 지탱해주는 '글쓰기'가 있기에 그 고름을 견딜 수도 있는 것이라고. 나는 요 근래의 개인 서사를 고백하듯 부끄러움도 모른 채 써 내려간 몇 편의 에세이들을 쓰면서 그렇게 치유받고 스스로 마음을 챙겨가는 중이다. 글쓰기는 그래서 위대한 것 같다. 좌절과 절망, 상처를 완벽하게 정면으로 대한 사람의 글쓰기가 그래서 어떤 글보다도 빛나고 위대하듯이. 그렇게 내일을 살아갈 힘을 만들어 주는 '글쓰기'라서.. 




내 세계를 타인에게 보이는 일, 타인의 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일, 타인과 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에 고개 돌리지 않는 일, 나에게 읽고 쓰는 과정은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이었다. 아직 나에게도 깨지 못한 편견이 많고, 사회에도 깨지지 않은 침묵이 많다. 강요된 평화가 아닌 정직한 불화를 위해, 나는 앞으로도 계속 쓰는 사람이고 싶다. 


빈 종이 앞에서 헤맸던 내 혼란의 시간이 하나의 길잡이가 되길 바랐다. 나에게 글쓰기 수업은 누군가 자기 이야기로 쏙 들어갈 수 있게 돕는 사랑의 방식이었다. 차마 하지 못했던 내밀한 글을 쓰고 읽으면서 용기를 키워나가는 일. 서로의 글과 삶을 돌보는 시간. 나를 쓰는 사람으로 만든 집필 공동체의 품을 나누고 싶었다. 



쓰면 알게 되는 것들이 있고, 한편으로는 쓰면서 '살리게 되는' 것들도 있다고 믿고 산다..



어쩌다 팔자에 경제서를 쓰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 현실이지만 

마음 한편엔 여전히 문학이나 에세이를 포기하지 않고 산다. 언젠가의 '책'으로 엮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 이야기' 조차도 일정 부분 드러내듯, 한편으론 완벽히 투명하게  드러내지 못해도, 쓰는 행위는, 글을 쓰고 있는 그 시간만큼은 진정한 내가 되는 것 같기만 하다. 배우자는, 나의 가족으로 인연 맺은 이들은 때때로 글을 쓰는 나를 위험하게 걱정(?) 해 주시지만, 그런 보이지 않는 따가움에도 불가하고 나는 나를 속이지 못하고 만다는 걸 안다.. 



결국 어떤 트리거들에 의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고 마는 이 마음들은 

'글'로 인해 그렇게 나를 살리고 또 살아가게끔 만들기에. 비록 '하루 10분 엄마의 돈 공부'라는 쉽게 잊힐 경제 에세이를 써 내려가는 시간 안에서도, 한 문장을 써 내려가며 몇십 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을 생각하고 마노라면, 이상하게 눈물이 절로 흐르곤 했었으니까.. 그 눈물은 아마도 '써 본 사람' 만이 알 테다. 




출판사 대표와 편집자를 마주하고 원고의 방향을 이야기하는 뒤에 계약서에 사인했다. 웃으며 인사를 하고 문밖으로 나서자마자 이상하게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벅차서 흐르는 눈물이 아니었다. 내 자격에 대한 의심, 스멀스멀 올라오는 두려움에 압도되어 흘린 눈물이었다. 




나는 여전히 글을 쓰면서 울곤 한다. 

힘들어서 우는 것보다는 뭐랄까, 좋고 안도되면서도 홀가분하고 한편으론 이 고백 이후의 일들이 두려워서 운다. 그렇지만 눈물의 근원은 사실 여기에 있겠다. '사랑'.... 나는 '이런 나'라고 해도 '사랑' 하고 싶기에. 사랑하면서 살고 싶어서. 단지 그것뿐이라. 오늘 이 순간조차도 누군가에게 1분도 채 되지 않아 읽히거나 혹은 읽히지 않은 글을 혼자서 쓰고 있지만, 나는 이젠 이것으로 충분하지 싶다. 이렇게 좋은 책과의 연결을 통해 '당신이 글을 썼으면 좋겠다'라는 눈물이 절로 나올 만큼의 제목이 담긴 책을 읽을 수 있고, 그로 인해 '나'의 서사를 한 번 더 고백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기에. 



손에 꼭 쥐고서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들로 인한 쓰라림을 뒤로한 채 

나는 그렇게 오늘도..... 고백하며 쓴다. 당신의 '계속 써요'라는 목소리를 기억한 채로. 



글을 쓰면 좋겠다는 작가님의 말이 어찌나 상냥한 위로로 들리던지요. 그래서 난 또 울고 말았습니다..



#작가님_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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