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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Feb 21. 2020

써야 하는 시간, 여성의 글쓰기

여성의 글쓰기 

제대로 살기 위해, 나는 써야만 했다. 


- 여성의 글쓰기 - 





십몇 년 이상의 집필 노동자

기자로서의 역할적 숙련된 글쓰기 노동을 거듭한 작가님의 서사가 모두 담긴 이 책은 그야말로 '여성의 글쓰기' 그 이상의 모든 내면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페미니즘이라는 화두가 거론되기 때문이 아니다. 지극히 한 인간으로서, 여성으로 태어난 인간의 내면적 고통과 현실 순응 그 안에 숨겨진 날 면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에. 때론 어떤 문장에서는 격렬한 통감을, 때론 애잔한 슬픔을, 그리곤 말미에 힘찬 응원과 진지한 각오마저도 못내 품어보게 되고 말았다. 단행본 한 권은 때로 사람에게 큰 위로와 단단한 연대를 선물해준다. '여성의 글쓰기'가 나를 찾아와 준 이 선물 같은 시간처럼. 



여성의 글쓰기, 이고은, 생각의 힘, 2019.11.25.



한때, 절실해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사실 처음 책을 출간했을 유산 수술 그 전후의 시절도 그랬고, 이후 쌍둥이 출산 이후 지독한 산후 우울증을 통과하고 있던 그 시절이 그랬다. 출간된 책의 장르가 전혀 다른 쪽의 장르라서 나도 적잖은 곤경스러움을 느끼곤 했으나 어쨌든 누가 읽어주든 아니든 나는 쉼 없이 틈날 때마다 쓰곤 했었다. 아니 거의 '토해냈다'라는 동사가 더 맞는 표현일 정도로. 부끄러움은 없었다. 다만 빈곤한 현실, 피하고 싶은 나날들, 바닥으로 치솟는 감정과 괴물과 분투하려는 내가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작가님도 그러하셨을까, 돈 한 푼 되지 않는 글을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그 열의는 어쩌면 그런 '절실함'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장 직관적이고 솔직한 이유부터 말하자면, 내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절실함에서다. 

돈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에 가치를 매기지 못하는 자본주의의 한계 때문에 나를 존재케 하는 일을 멈출 수 없음을 명백히 하고 싶었다. 


누구나 크든 작든 인생의 부침을 겪는다. 

억압받는 여성의 삶 속에서 비료적 물리적으로 자유로이 행할 수 있는 노동인 까닭이다. 




쓰기의 시간은 누군가에게는 돈 한 푼 되지 못해도 쓸 수밖에 없는 필연적 이유가 있으리라.



어쩌면 글쓰기라는 것은 외로움과 고통을 이겨내려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도구가 아닐까 싶다. 

책으로 엮이지 않더라도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쓰는 사람들은 분명 그러할 것이라고. 드러나지 않은 가면을 쓰고 적절히 주어진 역할극을 무사히 소화해내며 일상을 지내는 우리들의 내면 속에는 그늘진 외로움과 아픔이 있다고. 그 가려진 구석을 속 시원하게 긁어줄 순 없어도 최소한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게 만들 수 있는 것, 내겐 그것이 바로 '글쓰기'였다. 




곱씹을수록 고통과 불안의 강도는 잦아들었고, 삶을 개선하려면 무엇을 건드려야 하는지 조금씩 알 듯했다. 혼란은 줄어들었고, 무엇을 어떻게 행하며 살 것인지에 대한 또 다른 과제가 남았다. 




숙련된 글을 쓰고 싶으나 여전히 부족한 '나'를 발견한다. 

지루하고 상투적인 문장을 반복하지 않으려 애씀에도, 퇴고를 하다 보면 어쩔 도리 없이 좌절하고 말지만, 한편으로는 '그래도 오늘도 썼다'라는 어떤 안도감이 느껴지곤 한다. 글을 쓰고 싶은 순간들 중 가장 절실한 순간은 바로 '기대고' 싶을 때다. 단어에, 문장에, 그렇게 어떤 현상들의 적어 내림으로 인한 감정의 토해냄, 적절한 묘사와 사실 기반의 관찰된 장면, 그것을 객관적으로 정제된 텍스트로 한 글자 한 문장 적어 내릴 때마다 알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만다. 현재 '퇴사'를 앞두고 매일 써 내려가는 중인 에세이들은 알 수 없는 쾌감과 동시에 어떤 안도와 위안마저 선물해주곤 한다. 감사하다... 쓸 수 있어서. 못난 문장들과 장면일지라도, 나에겐 그 자체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크고 작은 모험이든 타인과의 상호작용이든,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은 그 결과를 나만의 것으로 소화하는 일이다. 바로 기록이다. 기록은 자신을 더욱 선명하게 규정한다. 인생을 눌러 담아 쓰는 글에는 확장된 나의 세계가 담긴다. 꾸준한 성찰의 결과가 쌓이면서 내 삶의 반경이 넓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건 결혼, 임신, 출산, 육아를 이유로 일터에서 내몰린 여성이 얼마나 많았던가. 아예 취업 시장에서 배제된 여성이 얼마나 많았던가. 교육의 기회가 제한되거나, 타고난 기질을 억압받거나, 혹은 아예 세상에 태어나지조차 못했던 여성은 얼마나 많았던가, 그저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의 글쓰기'는 다양한 면모를 지닌다. 

여성 그 자체, 몸의 서사, 그리고 주어진 역할. '엄마'라는 특유의 모성 감정과 동시에 사회가 정한 육아시장과 양육도 모의 현실, 주체적인 인간이어도 지원과 서포팅의 댁 내 '보조자' 역할을 거듭할 수밖에 없이 전락하고 마는 노동 현장의 실상. 유지하고 싶어도 유지되기 쉽지 않은 커리어, 일, 경력의 단절, 그 이후의 나날들까지도. 뭐하나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민감하고 예민한 문제임에도 최소한 '여성' 으로서의 글은 그래도 더 힘이 깃든다. 변화하고 깨어나려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토록 절실한 투쟁을 선언하듯 비로소 깨어나 세상 밖으로 목소리를 내 보내는 것처럼... 




나의 존재는 그대로인데, 외피가 바꾸자 세상은 나를 다르게 대했다. 차별은 이미 구조적으로 면밀하게 설계된 사회 질서에 따라 작동했다. 내가 어떤 계층, 어떤 층위로 분류되느냐에 따라 세상이 나를 대하는 운영 체계가 자동으로 바뀌었다. 


때로 연차가 높은 여기자 선배 중에는 성적 농담이 오가는 자리에서 남성들보다 더 강력하고 질펀한 이야기를 꺼내거나, 거꾸로 남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농담을 던져 분위기를 압도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그런 선배들을 보면 더욱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 바닥에서 여성으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란 게, 불편한 현실 앞에 침묵하거나 혹은 스스로 명예 남성이 되는 길뿐일까 싶어 막막해지기도 했다. 




나는 오늘도 이 서평을, 그리고 퇴사 D-7일의 서사를 기록하려 노트북 앞에 앉아 있다. 

아이들을 재우고 난 이후 녹초가 되고 만 몸을 기어코 식탁으로 이끌어 엉덩이를 의자에 붙였다. 키보드에 손을 얹고 그렇게 잠시 백지를 쳐다본다. 한 문장이 시작되면 그다음에는 그저 의식의 흐름 속은 시간의 순서대로 나만의 문장들이 기록된다. 제대로 쓸 수 없을 것 같은 피곤함이나 우울감, 어떤 결핍감과 슬픔에 휩싸일수록 나는 어찌 된 영문인지 글이 더 잘 써지곤 하는 모순을 경험하고 만다. 울고 싶을 때 쓰고 싶은 것들이 많아지더라. 어쩔 수 없는 지금의 나인 듯싶다. 한때 '오늘의 이름이 나였으면 좋겠어'라는 여성 수필을 써 내려갔던 그 시절의 나처럼... 




낮에 아이들을 돌보다가도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으면 스마트폰의 메모장에 적어두었다. 조금 더 나아간 정돈된 이야기나 에피소드는 소셜 미디어에 기록했다. 여러 상념이 모이고 모여 긴 호흡의 글을 쓰고 싶어 지면 새벽녘에 노트북 앞에 앉아 집중해서 썼다. 그러다 잠결에 엄마를 찾는 아이들을 다시 재우고 침대 한구석에 이불을 뒤집어쓴 채 쪼그려 누워 모바일에서 글쓰기 서비스를 제공하는 어플에 접속했다. 퇴고와 윤문 등 반복해 새롭게 읽는 작업이 필요할 때면 모바일이라는 여러 기기를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이 무척 유용하게 느껴졌다. 




쓰는 건 고통스럽고 읽는 건 즐겁다. 그 두 개를 번갈아 유지할 수 있음에 그저 커다란 감사함을 느끼며 산다...



올해는 '퇴사'를 하는 기념비적인 해이다. 

올해가 아니라 이번 달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위험이고 위기에 처했다고 생각했었다. 아니 과거형이 아니라 어쩌면 아직은 '현재형' 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론 어떤 알 수 없는 설렘에 휩싸인다.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전업'의 세계와, 그 전업 가사 노동의 충실한 책무를 다하면서도 '나의 일'에 대한 끊임없는 생산자적 생각을 놓치지 않는 '나'가 있다면, 나는 뭐라도 새로운 '일'을 향해 심신을 던질 각오 또한 되어 있다. 그러하니.... 이 위험에서 벗어날 방법을 모색하는 '나'는 더더욱 '글'을 포기하지 않을 것만 같다. 



집필 노동이라 할지언정 나로선 현재로서의 최선은 '글쓰기' 다. 나라는 여성의 글쓰기를.   

그러니 오늘도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문장에 다가가려 한다. 

더 굳건하게, 쓰겠노라는 그 열망적 믿음으로... 



올해는 쓰기로 인한 '꽃' 같은 시간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꽃을 피워내고 싶다. 어떤 꽃이든... 향기로 점철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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