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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Mar 23. 2020

치매에 걸려도 일상은 계속될 테니까  

웃픈 상상에 목이 메었을 때

행복은 말이 없는 반면, 고통은 말이 많다. 

언어가 가장 절실한 순간은 우리에게 도래한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을 때이다. 


- 행복이 거기 있다, 한 점 의심도 없이 - 





삶이 고달파도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그 생각을 달고 산 지 이제 햇수로 두 자릿수가 되어 가는 중이다. 오늘이라는 일상을 한 점의 이탈 없이 평탄하게 유지한다는 것이 때로는 얼마나 무거운지를 더욱 절실히 알고 난 이후부터. 우리들의 삶은 때때로 무대 위의 '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유자녀의 기혼녀, 맞벌이를 병행하다 급 퇴사를 하여 경단녀의 시대를 맞이한 지금조차도. 나의 그 생각이 좀처럼 바뀌려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 '쇼'에 치명적인 '자극' 이 외부 세계로부터 밀려오게 되면, 우리의 삶은 결국 어긋나고 흔들린다. 내면이 튼튼하지 않다면 더 거칠게 흔들리고 만다. 



그러고 보면 정신이 멀쩡한 '현재'에 감사해도 모자랄 삶이 아닐까 싶었다. 

어제, 짧지만 아주 강렬한 '경험' 덕분에. '유한한 삶'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해볼 수 있었다. 아이들과의 주말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귀가하던 중, 주머니에 뒀던 집 열쇠가 없어졌다. 아직도 도어록이 아닌 열쇠를 가지고 다니는 초아날로그 감성인 나를 탓하기 전에, 그저 머릿속이 하얘지고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그이, 그리고 마냥 해맑은 아이 둘...  등에 엎은 첫째 둥이를 내려놓고 나는 다시 가던 길을 헤매듯 가려했다. 




- 나 미쳤나 봐. 열쇠가.... 없어.

- 가방에 없어?

- 없어.... 하.... 애기 등에 엎을 때 떨어졌나 봐. 

- 둥이 데리고 집 근처 공원에 가 있을 테니까 잘 찾아봐. 없음 할 수 없지 

-...... 정신 진짜... 엄마 말대로 나 다 그만둬야 할까 봐. 

- 다녀와. 어서. 침착하고. 




변화 없는 평탄함에 변화가 생기면 그것은 우리를 성장하고 깨닫게 만든다... 하찮은 것이라도. 




없었다. 

어디에도 열쇠는 없었다. 오던 길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다. 중간에 들렀던 제과점 바닥을 허리를 반 이상 숙인 채 바닥만 바라보며 눈 똥그랗게 뜨고 다녔음에도. 열쇠는 보이지 않았고 나는 플랜 B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묘하게 어떤 차오르는 분노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일상의 고요함이 깨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하찮은 변화들이 우리를 더 튼튼하고도 아프게 단련시키는 것처럼. 



쌍둥이 육아를 시작하며 숱하게 구멍이 나버리기 일쑤인 기억들... 

오죽하면 손 등에다 그 날의 할 일들을 볼펜으로 몸에 새기듯 적고 다녔을까, 워킹맘으로 회사 다니면서 자연스레 생긴 그 '기억의 안간힘' 들은 매일 손등의 글자들이 대신 말해주곤 했었다. 그렇게 잘 잊는 게 다반수였다. 병인가 싶을 정도로... 한참을 찾다 못 찾고 일단 집으로 돌아가던 길, 그이에게 전화가 왔다. 그리고 나는 결국 눈물을 감당하지 못했다. 



-.... 열쇠 못 찾았어....

- 열쇠 여기 있어. 현관문 앞에 꽂혀 있네. 안 빼고 그냥 나왔나 봐. 걱정 마 

- 거기 있어? 분명 주머니 속에 넣고 나왔는데. 열쇠가 거기 있다고? 

- 여기 있으니까 어서 와 

- 왜... 왜 열쇠가 거기 있지......

-?

- 나... 치매인가 봐. 정말 미쳤어... 애 키우는 사람이 정신 어디 팔고 다니는 거야 정말. 엄마 말이 딱 맞나 봐. 나 정말 퇴사당해도 싼 가봐..... 

- 침착해. 괜찮아. 별 거 아닌데 왜 그래 또. 




별 거 아닌 일이 별 거처럼 느껴지는 것도 한순간이다. 

책무로 인한 원치 않은 안간힘, 그로 인한 기억의 밀려옴, 그로 인해 눈물이 울컥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아마 터무니없는 상상 끝의 감정들 때문이리라.  애써 열심히 살아보려는 이 막중한 '역할' 이라든지 '책임' 이라든지, 그런 것을 훌훌 벗어던지고 싶어도 쉬이 도망조차 칠 수 없는 어떤 역할의 고통들이 더해지면 할수록. 아주 잠시였지만, 아이들을 탓했고 독박 육아를 탓했고 퇴사를 탓했고, 기혼을 탓했다. 그러다 결국 예민하면서도 완벽하려는, 역할에 최대한의 애를 쓰면서도 쉬이 행복보다 상처를 더 잘 느끼고 마는 여전히 어떤 자아를 부정하는 '나'라는 존재를 탓했다. 



가족들을 챙기면서도... 때로 밀려오는 삭막함과 외로움에, 석양만을 그리워했다. 여전히 가끔 그러하다. 




그렇지만, 이런 잠시의 커다란 '자극' 들은 선명한 삶의 교훈을 떠올리게 한다. 

예상치 못했던 삶의 블랙스완처럼, 어떤 변화가 다가올 수 있는, 예측할 수 없는 삶이기에. 매일 매 순간의 살아있음을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잘 살려할수록, 사랑을 하면 살 수록, 진짜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낌없이 주다 보니 어쩔 도리 없이 스스로 아프기 마련이라는 것을. 하물며 정신 멀쩡하게 살아 있음에... 나는 이상하게 안도라는 감정보다 이 정신이 미우면서도 또 온전하게 버티고(?) 있는 정신에 걱정 서린 고마움을 느끼고 말았다. 치매에 걸려도 일상은 계속될 테니까. 내가 치매에 걸렸을 때의 대비책(?) 들마저도 생각하고 마노라면 어떤 걱정이 앞섰지만.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집으로 들어가니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그이는 태연하게 사과를 깎으며 나를 맞이했다. 세 사람을 쳐다보며 다시 한번 눈물이 일렁이려 했다. 결국 홍수처럼 쏟아 내리던 눈물 흘리던 나를 그이는 어이없듯(?) 껴안으며 괜찮다 했다. 그러나 나는 자꾸만 일렁이는 모자란 생각을 말로 내뱉지 못했다. 그대로 안긴 채 다만 생각할 뿐이었다.




부모의 삶은, 아내의 시간은, 그렇게 메마르다가도 적셔지곤 하다는 걸.. 당신은 알고 나를 앉아줬던 걸까...



치매에 걸리지 않고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

아울러 반대로 내 기억 속에 사랑의 기억과 추억이 남아있음에, 뭉클하면서도 축축한 서글픔이 밀려왔다. 치매에 걸려도 일상은 계속되기에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은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의 삶은 유한하고 예측 불가하다는 것을. 그렇기에 불시에 닥쳐 드는 어둠도 통과할 수 있는 유연함을 평소에 지녀야 한다는 것을. 



여전히 아들 쌍둥이 유자녀 기혼녀로, 워킹맘에서 경단녀가 되어 버린 이 시절이 조금은 버겁고 낯설다. 

그렇지만... 아직 온전한 정신으로 하루의 시작과 끝, 아침과 저녁을 보다 더 잘 보살피려는 나는 

조금 더 매 순간에 감사함을 지닌 채 지내보려 한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우리 삶에서 남는 '일' 이기에....  




계속 추울 리가 없다. 봄이 옴에 감사하다.... 시간이 걸릴 뿐, 아주 오래 걸려도... 끝은 있기 마련이고 다시 시작도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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