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븐 Mar 24. 2020

지옥고, 공간에 갇혀도 존엄은 닫히지 않기를...

착취 도시, 서울 

빈곤 비즈니스를 다룬 '지옥고 아래 쪽방'을 쓴 기자로서는 

세상의 위선에 토악질이 나올 정도로 괴로운 심경으로 집회를 멀리서 바라봤다. 

내 기사가 응답하지 않는 국가, 가장 아래의 곳까지 시선을 두지 않는 정치라는 현실을 간과한 채 

주민들에게 기약 없는 희망만 심은 것은 아닌지, 괴롭고 또 괴로웠다. 


- 착취 도시, 서울 - 





2018년의 아동 주거 빈곤을 다룬 기획기사인 '단칸방에 갇힌 아이들

한 신문사의 기자는 1년 동안 한 편의 기획 기사를 완성하셨다 했다.  그리고 그 기자님은 작년, '지옥고 아래 쪽방'을 통해 세상의 극악무도한 착취의 현장을 세상에 내놓았고 그 이야기들은 한 권의 책으로 탄생했다. '착취 도시 서울' 이 바로 그 이야기다. 책은 '극빈층'의 '가난' 이 반대로 주류 상류층의 물리적 자산 증식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쪽방촌 착취의 잔혹한 연쇄 과정을 이야기한다. 순식간에 읽고 다 덮고 나서도 다른 책을 쉬이 읽을 수 없었던 건, 덕분에 잠 한숨을 못 자고 말았던 이유는, 내내 어떤 생각들이 밀려왔기 때문이리라. 가난에 대해서, 인간 본성에 대해서, 현실에 대해서...



착취 도시, 서울, 이혜미, 글항아리, 2020.02.07.



지옥고. 이것은 지하방, 옥탑방, 고시원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지하방에서도 옥탑방에서도 고시원에서도 살아보지 못했던 나는, 한때 그 세 군데에서 잠깐잠깐씩 살아봤다던 그이에게 물어보았다. 그때 어땠는지를...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했었다. 착잡하고 미안하고 씁쓸해서 내내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 몇 년 후면 50을 바라보는 그이의 얼굴에서 문득 20대의 청년의 생은 어땠을지를 생각해보니 절로 눈물이 나올 것도 같았다. 



생각해보면 그이가 학교를 다니던 그때 나 지금이나 '청년 빈곤' 은 개인의 안간힘과 엄청난 의지로 겨우 빠져나올 수 있는 그것이 아닐까 싶었다. 시스템이 많이 좋아지고 주거 복지와 사회적 약자, 그리고 청년층의 복지 예산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해서 그 복지의 온전한 혜택을 '모두'가 누리는 것은 또 아닌 듯싶고... 그러하니 청년뿐 아니라 저임금 일용직에 최저 생계 수급조차도 받기 쉽지 않은 극빈층 최전방 개인들의 삶은 이루 상상이 잘되지 않을 뿐이다. 




주거 비용은 나날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치솟고, 양극화와 저성장에 도시에서 도태되어 버린 이들이 근근이 먹고 자는 것만 해결하며 살아가는 곳. 불황에 일자리가 없어 노숙 위기에 내몰린 저임금 일용직 노동자와 독거노인 등은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지옥고에 들어갔다. p. 16,


열심히 살수록 가난해진다. 국일 고시원 화재 현장에서 만난 모든 사람이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계급 상승'이니 '성취' 니 하는 목표는 상향이 아니라 하루하루 밀려나지 않는 것뿐이다. 2019년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극단적 빈민이 최저 실존을 위해 몸 누일 공간 '한쪽'을 얻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들의 '가난해서' '괴로운' 상황을 이용해 폭리를 취하고, 착취에 가까운 임대업으로 부의 첨탑을 쌓아가고 있다. 이른바 '빈곤 비즈니스' 다.  p.18-19



가난을 사용한 비즈니스.... 못 배운 이들의 못 배움을 활용한 착취적 임대업...   그들은 정당하지만 그 정당함에 양심이란 있는가.



쪽방촌의 악랄함은 바로 평당 터무니없이 비싼 임대료의 갈취와 착취의 연쇄 고리 때문이다. 

기자가 취재하고 파헤친 잔인무도한 '가족 연계 사업'으로서 '빈곤 비즈니스'는 그야말로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든다. '쪽방 임대업'의 수하에 관리자를 둔 다단계식 평당 어마 무시한 임대료를 극빈층의 기초생활수급에서 그야말로 '갈취' 하는 수법, 중개대상물 확인 설명서에 보란 듯이 '불법건축 개조 물' 이 확인이 되든 말든 그걸 알 턱이 없는 임차인들을 상대로, 중간 부동산 중개인이 오히려 중개인 컨설팅을 한답시고 건물주들에게 '대학가 초미니원룸'의 '시세'를 알려주고 임차인들에게는 '여기가 그래요'라는 식의 판국이라니. 누군가의 골을 뺴내 누군가는 부의 첨탑을 쌓아 올리신단다. 그들은 한남동, 강남 등지에 사시는 건물주들의 이기적 본성을 감춘 채 숙박업이나 임대업이 아니니 '공중위생관리법'이라든지 '주택임대차 보호법'의 보호를 할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 지옥고는 법의 사각지대라 죽음과 폭력, 범죄가 일상인 또 다른 세계의 다른 말이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쪽방은 개인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공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겨우 한 사람 누울 수 있는 공간은 보일러도 없어 난방이 되지 않았다. 공동수도에서는 냉수만 쏟아졌다. 타지에 사는 건물주는 안전 관리는커녕 기본적인 수선 의무도 다하지 않아, 행정 당국에서 세금을 들여 땜질식 수리를 해주고 인근 교회나 쪽방상담소에서 뻗는 온정의 손길로 어설프게 사람이 사는 거처의 형상을 갖춰가는 곳. 이런 곳에서 세입자는 노숙을 겨우 면한 대가로 매달 22만 8188원 (서울 평균)을 세로 낸다. p.48


더 악랄한 건 뭔지 알아요? 이 사람들은 장애인이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더 좋아하는 거예요. 아무리 장애가 있어도 자기가 갈취당하고 있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어요. 그래서 같은 동네 다른 쪽방으로 옮기면, 또 기막히게 알아내서 다시 데려오고 한다니까요. 완전 '봉'이에요. p.63


쪽방촌 주민 가운데 4명 중 1명은 최근 1년 동안 심각하게 자살을 생각했다. 가난하고 병들어 소비를 하고 노동할 쓸모가 없으면 구조에 부담이 되는 비용으로 바라보는 사회에서 이들이 건강한 심리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사회안전망이 되어주는 '관계' 라도 있으면 절망에 빠졌을 때 누군가 건져내 줄 수 있으련만, 쪽방촌 주민 가운데 75.5% 가 가족 중 연락할 사람이 거의 없는 상태다. p.66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군가의 비극은 누군가의 희극이 될 수 있다. 

잔인함은 거기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누군가의 갈취와 폭력은 누군가의 기쁨과 자산이 된다. 텔레그램 n 빈방도 그 일환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빈곤층, 극빈층, 내몰리는 사람들, 빈곤의 고착화, 가뜩이나 돈 없고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의 심리와 물리적 약함을 노골적으로 이용하여 상업화하는 이들. 불로소득의 '폭리' 그리고 그 폭리를 선순환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악순환으로 자신들의 기름진 배만을 불리며 그것이 더군다나 후세대인 '자녀 대물림'까지 지속되는 현상...... 



문을 열어 희망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그 희망을 따라가자....



책을 다 덮고 이런 생각들이 순식간에 밀려오고 마니 머리가 아파지려고 했다. 

하물며 심장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던 건, 바로 아이를 키우는 입장의 사람이 되어 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살아갈 이 세계는 여전히 너무나도 첨예한 갭이 존재하는 것만 같아서. 따라가도 따라가도 잡히지 않은 어떤 '생존'과 '위기'에서 어떻게 하면 개인의 인권과 타인의 존엄을 잘 존중하며 살아낼 수 있도록 인도할 수 있을까 싶어서. 아울러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어디까지인 걸까 싶어서. 




정상 가족, 정상 주거만을 사회적 규범으로 받아들여온 세상에서 '쪽방' 은 소위 그 삶이 얼마나 처참한지를 드러내는 '빈곤 포르노'의 소재로만 쓰였을 뿐, 어찌 된 연유로 쪽방에 살게 되었는지, 왜 벗어나지 못하는지, 일을 하는데도 왜 가난은 더 가난한 이들에게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는지를 우리는 질문한 적이 있었나.


우리 사회에서 대체 '선' 은 어디에 그어져 있는 걸까. 그리고 그 선은 누가 긋는 걸까. 왜 하류 인간들은 선 밖에 머무르거나 쪽방촌이라는 특정 게토에 격리돼 살아야만 하는지, 그 기준은 무엇인지, 결국 '돈'과 사람의 '쓸모'인 건지 아니면 영화가 지긋지긋하게 말하던,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 탓인 건지. 당장 내릴 수 없는 질문들이었다.  


p.115-6



그래도 아침은 늘 반복된다.



누군가의 가난이 누군가의 터무니없는 부의 증식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그러나 쉽지 않을 일이다. 이 대한민국 부동산 공화국에서 투기가 아닌 실수요 투자와 실거주 대상자들 또한 그 '대상'이라는 층은 '극빈층' 은 아닐 것이기에. 결국 '아는 사람들' 이 '아는 행동' 들을 '합법적'으로 해서 이뤄낸 것들일 테지만, 그들의 합법에 꼼수는 없던가? 그들의 합법에 타인의 존엄과 생명은 존중되던가? 그들의 삶에는 '개인'만 있고 '이웃' 은 배제되는 게 당연한 건가? 어쩐지 나는... 요즘의 각종 미디어와 유튜브 속의 '부수입 올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현대인의 씁쓸한 모습과 아울러 그 현대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 조차도.  어쩌면 인간 본성은 이토록 잔혹한가를, '자유'라고 하는 가치와 의미가 완벽히 '개인'을 위한 것임에 후세대의 다음 세상은 좋아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갑자기 어지러워졌다.  여전히 서점엔 부동산과 주식 책이 즐비하고도 불티나게 팔려 나가고 그 와중에 지금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바이러스 팬데믹의 시대, 실물경제 최악의 위기, 예측하지 못하는 경제난들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니....



우리는 그렇게 떠밀리듯 자체적으로 서로 간의 '계층 차이'를 만들어 내는 걸지도 모를 일이다. 

내 손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시스템도 마찬가지고.... 뭐라 끝맺음이 쉽지 않은, 잔인한 동네 단상들만이 그려진다. 내가 주거하는 이 동네만 해도 임대 주택 반대를 자연스레 말하는 학부모들, 배우자의 월급 수준과 아이들의 학업 성적이 '레벨'이라든지 '수준'이라고 하는 것을 은연중에 가리는 이들이 여전히 즐비하니.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배우는 걸까... 브랜드 아파트에 살면 잘 사는 것이고 임대 주택에 살면 못 사는 것일까. 대기업에 다니고 많은 월급을 받으면 성공한 삶인가? 모르겠다. 머리가 어지러워질 뿐이다. 



너무 많은 것들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나려 했다. 

미안해서... 내가 가진 것들과 누리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또 귀한 것들이었는지를. 오늘 먹을 양식, 몸 누일 수 있는 넓은 주거 공간, 양육 환경, 하고 싶은 것들을 조금씩 하고 사는 이 평범한 삶이 누군가에게는 상상조차 하기 쉽지 않은 호사스러움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마노라면. 역설적인 이 현실의 가려진 단면들을 알아갈수록 더더욱. 



심장은 뛰고 마음은 아파진다. 눈물은 그렇게 어떤 염원을 바란다. 

아이들이 아프지 않은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아이들만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기에... 






https://coupa.ng/bvxPte




https://www.hankookilbo.com/Special/Plan/List/1184


매거진의 이전글 질문하는 아이로 키우는, 엄마표 독서수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