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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Apr 07. 2020

'죽음'을 생각하던 아침 길에서

나는 '나'가 없다. '나'가 마치 티브이나 세탁기 같은 가전제품 중 하나인 것처럼 말해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가 누구야. 나 자신. 나는 나 없이 산다. 나 없이도 살게 되더라.


- 너는 너로 살고 있니 - 




한껏 쥐고 있단 끈 하나가 탁 하고 풀어져버린 걸까. 

아이들을 기관에 맡기고 돌아오는 오전 10시 30분경, 참던 눈물이 북 바치자 기어코 나는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고 말았다. 그간의 '우울'과 '분노'를 배우자에게 연신 토해내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정말이지 어리석은 짓이고, 부질없으며 오히려 서로의 마음에 상처만 끼치는 행위라는 것을 그때는 모른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주저앉아 울고 난 이후에 고요함이 찾아들 무렵, 그제야 '후회'와 만날 수 있을 뿐. 절망이라는 감정에 삼켜지는 순간엔 '후회'가 다가올 것이라는 것조차 알 턱이 없다. 조절하지 못하고 마는 감정은 그래서 여전히 무섭기만 하다. 



같이 낳았지만 같이 키우지 못하는 '현재'라는 시간을 탓하고 말았다.

조용히 듣고 있던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니 들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일방적인 성토와 분노에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했으리라. 내조를 잘하려는 아내로 살기로 다짐했지만,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고 늘 생각하는 편이지만, 한편으로 나라는 솔직한 인간의 유형은 그 '아내'와 '엄마' 자격을 박탈당해야 될 것만 같다. 내가 아닌 남들에게 '좋은' 기준은 - 그것이 가족이라는 관계로 만난 인연들일지라도 - 나에게는 최악의 기준일 수 있기에. 



한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좌절'을 죽이거나 숨기며 지내야 한편으로 '가족' 들은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슬픔과 절망, 고통과 인내의 한계, 한 사람의 이 감정들을 죽이면, 혹은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 표현하지 않으면 남은 세 명은 온화하고 평화롭게 그들의 시간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엄마'가 된 나는, 잘 알게도 되었다. 반대로 그 한 사람의 마음 챙김에 균열이 생기고 기어코 틈이 벌어지고 말면, 한 사람을 망쳐버리는 것도 순식간이라는 것도. 이미 잉크가 물속에 떨어졌을 때 순식간에 퍼지는 것처럼 마음의 틈새에 어느새 우울과 부정이라는 감정은 빠르게 번진다. 잘 지내다가도 사실 그 '잘 지냄'이라는 건 잘 깨질 수도 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마음먹기에 따라서 어둠 속에서도 꽃은 보이기 마련인데.... 그 마음이 그래서 참 중요하다. 



혼자 아들 둘을 키우는 절망과 고통은 어느 정도일까를 생각하다가 눈물이 났다. 

미혼모가 아니고, 반대로 혼외 자식도 아닌 버젓이 내 배 갈라서 낳은 자식들 이건만. 어찌 이리 자식 두 명 키우기 버거워서 나는 늘 이렇게 절망하는 걸까를. 퇴사 전후로 다시금 눈물을 달고 살기 시작한 나는 오늘 아침... 다시금 '죽음'을 잠시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저앉아 오열했다. 한편으로는 울음이 나오는 것에 다행이지 싶기도 했다. 



죽음을 생각하는 순간 눈물이 나온다는 것은 나로 하여금 죽고 싶지 않다는 반증일 테니까.

한편으로 죽음을 다시 생각하게 될 정도의 감정이 순식간에 밀려온 '원인'에 대해서... 나는 생각해보게 되었다. 냉정하게 생각하자면 가족으로 만났으나 내가 아닌 이들을 위한 비위 맞춤과 끝없는 요구사항의 적절한 대응, 그림자 노동이나 다를 바 없는 댁 내 살림 수발의 연속, 내 몸무게와 맞먹는 50kg가 훌쩍 넘어간 웨건을 끌고 등 하원을 오고 가는 시간들, 아직 손이 마는 영유아 미취학 아들 두 명을 보살피다 나도 모르게 나오고 마는 한숨, 차오르는 우울과 좌절, 그 와중에 지침 없는 아이들의 에너지 발산, 장난의 연속, 때로 비위를 맞춰주지 못한 날이면 '엄마 미워'라는 목소리... 그리고 잠자코 듣지 못하고 기어코 화를 내고 마는 나 자신... '내가 왜 미운데'라고 아이와 실랑이를 벌이려는 여전히 하찮은 어른에 속하는 인간,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아니 포기하지 못하는 이번 생의 '엄마'라는 양육자로서의 책무.... 혼자 하는 양육, 보육, 훈육, 교육, 앞으로도 계속될 듯한 때론 넌덜머리 나는 4종 세트...



나의 가장 밑바닥엔 언제나 '죽음'이라는 친구와 함께 살곤 한다.  

뜨거운 분노와 슬픔과 절망과 좌절이 급습하며 기어코 모든 주어진 역할과 책무를 깨끗하게 반납해버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기어코 눈물을 흘린다. 반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결국 '죽음'이라는 선물 밖에는 없는 것 같기에. 이렇듯 속수무책의 심정이 될 때마다 여전히 나는 분노하고 분개한다... 둘이 낳았으나 왜 고통의 몫은 한 사람에게 더 가야 하는지를. 




“그리하여 나는 어려운 시절이 오면, 어느 한적한 곳에 가서 문을 닫아걸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불안하던 삶이 오히려 견고 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삶의 기반이 되어주는 것은 바로 그 감각이다. 


-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 



오다가 벚꽃을 보았다. 만발한 벚꽃은 예뻤지만 왜 꽃을 보고 더 눈물이 나왔던 걸까...


감정에서 멀어지려 애를 쓰던 아침, 나는 오열했고 '죽음'을 생각하고 그러다가 차츰 안정을 찾는다.

어쩌면 나로 하여금 가장 섬세하고도 날카롭게, 나를 객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바로 이 '죽음을 생각하는 아침' 일지도 모를 테니까... 고단한 삶으로부터 상처 받을 때, '죽음'을 생각하고 마는 나는, 다시금 문장을 기억한다.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갈 수 있다고.” 



아이들은 한 사람의 고통을 모를 것이고 또 몰라야 한다. 나의 친정 엄마가 그러했듯이. 

그녀가 끝없이 고단한 일상을 이어나가며 연년생 남매를 키워내며 겪었을 그 고통을, 나와 남동생이 알지 모르고 컸던 것처럼..... 그것이 빌어먹을 부모 자식 간의 순리라면 나도 이젠 '부모'의 길에 들어섰기에 함부로 '죽음'을 생각하나 함부로 실천을 거듭해선 않겠노라고...



나는 아침 귀갓길에 눈물을 닦으며 길가에 핀 꽃을 쳐다보았다. 

벚꽃은 만발해있으나 나는 만개한 꽃잎보다 어쩐지 바닥에 떨어진 꽃잎들에 더 눈길이 갔다...

그리고 생각했다. 다음 생엔 여자로 태어나지 않겠다고, 글을 쓰는 불행한 여자로서는 더더욱.... 



삶의 유한함을 생각하면... 반대로 살 용기도 좀 나지 싶은데 모르겠다... 좌절에 먹히지만 말자고, 꽃을 보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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