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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Apr 23. 2020

절망을 건너는 방법

한 사람은 그를 위해 인생을 바친다고 약속했고 

한 사람은 그 약속을 위해 사랑을 양보하겠다고 약속했었다. 


- 먼 바다 - 




딸기잼이 들어있는 유리병이 아이의 손을 거쳐 바닥으로 떨어지는 찰나였다. 

만 3세 아들 쌍둥이... 이제는 민첩함이 생긴 건지 원체 손이 (아니면 성격이) 빠른 덕분인지, 손으로 간신히 받아낸 이후 나는 심장의 덜컹거림을 못내 느끼고 말았다. 이상하게 두근거리더라. 그리고 나는 역시나 모자람을 깨닫고 말았다. 유리병이 깨지지 않아서, 그래서 아무도 다치지 않았노라는 안도보다는 사실은 분노가 더 앞섰기 때문에. 다시 그 잼을 가지고 찐득하게 바닥 여기저기 묻히며 천진난만하게 노는 아이들, 그리고 계속되는 요청 사항, 그 요구에 맞춰 바로 들어주지 못했을 때의 칭얼거림. 몇 번의 '주의'와 '경고'에 눈물로 호소하며 내뱉는 아이들의 순수한 한 마디. 



"엄마 미워"




탄식인지 한숨인지, 나는 들숨과 날숨을 연속으로 내쉬고 말았다. 

그 후에 찾아오는 속이 막힌 체증 같은 답답함은 금세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변하려 했다. 정말 화가 났을 땐, 고함을 치지 않는다. 다만 목소리의 톤이 급히 낮아진다. 상당히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 그러나 칼날처럼 뾰족하게 날카로운 문장으로 얼마든지 고함보다 더한 상처를 낼 수 있다는 걸, 나는 그것을 아는 나쁜 사람이고 나쁜 엄마를 기어코 드러내버렸다.



"그래. 미운 사람하고 살지 마. 엄마가 나갈게. 없어져줄게... 잘 있어"




그대로 하던 집안일을 멈추고 나는 열쇠를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아직 미취학 영유아인 터라 바깥에서 문을 잠갔으니 안에선 도통 열기가 쉽지 않을 것이며 아이들이 어떤 것에 '공포'를 느낀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아주 못된 어른의 행동이었다... 10초도 되지 않아서 첫째가 울고 둘째는 나를 찾는다. 어쩔 도리 없이 엄마를 부르짖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알면서도... 아이들에게 '떨어짐'을 안겨 주려 했다. 그것이 나의 '분노'의 표출이었기에. '이탈' 하고 싶다는 어리석은 감정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난 못난 행동이었다... 



감정이, 굉장히 드라이해지는 순간이 있다. 금방 탈 것 같은 바싹 마름...



경력단절이 된 채, 전업주부의 삶에 돌입한 지 이제 겨우 두 달이 되어가지만

여전히 그 '전업주부' 로서의 나는 커다란 절망을 느끼고 만다. 일상의 루틴함은 이미 잡혀가는 중이지만. 한편으로 이대로 집에 눌러앉아(?) 가사 노동에 취하듯 아이들을 돌보며 사는 것에 '익숙' 해지고 말면 재취업이 쉽지 않을 것이니, 막연한 두려움에 이력서를 가다듬다가도 문장은 곧잘 막히고 만다. 아이들과의 실랑이가 거센 날이면 더더욱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고 마는 나를 발견한다. 



퇴사 후 가끔씩 나는 나 자신에게 묻곤 한다. 

지금 무엇을 원하냐고, 무엇을 바라냐고, 그리고 현재 무엇을 위해 사느냐고. 처음에 답은 의외로 간단히 나왔다. 이제는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아이들'을 위해 사는 삶이 절반인 인생이라고. 그러나 이건 한편으로는 언행불일치나 다름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을 위해 산다는 사람이 정작 자꾸만 그 아이들이 있는 집을 '나가려고' 하는 행동들을 하고 마니까. 최근에 지역 창업센터의 소식을 전하는 SNS 기자단에 지원을 했고, 기타 모 대기업의 주부 모니터에 지원을 해 보기도 했다. 그뿐이랴, 각종 모임들을 직접 만들어 온라인으로든 오프라인이든 자꾸만 기어코 나를 세상에 드러내고자 하는 '나'를 발견한다. 집 '안'에서만 있지 않으려 하는 나의, '아이들을 위해 산다'는 문장은 상당히 이율배반적이 아닐 수 없다... 



생각이 끝없이 다가와 끝내 좌절하고 절망하고 마는 '나'는 

아이들을 무사히 등원을 시키고 집으로 귀가하는 그 시간 동안 괜한 눈물이 또 나오려 했다. 도대체 '나'라는 여자는 어찌 이 모양인지 싶었기 때문이었다. 기어코 집 밖으로 나오려는 행동을 하고자 하는 '나 '때문에, 정작 아이들에게 자꾸 해를 끼치는 건 아닌가 싶었기에. 이번 생은 그런 '나'를 적어도 반 정도는 포기하고 살아야 마음이라도 평온하지 싶었기에. 나의 '부모'가 자신들이 하고 싶었던 것들의 대부분을 하지 않고 견디듯 살아온 그 세월을 생각하면... 이런 내가 너무나도 미안하고 못나 보여서. 




사랑을 하려 애쓰는 '부모'로 사는 이번 생에서, 이 감정은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 자꾸만 미안해진다.. 그냥...



돌아오던 중, 핸드폰으로 메일함을 열어 보았다. 그리고 이상하게 또 한 번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 흘렀다. 

문자 연락이 오지 않아서 불합격이라고 생각하고 넘겼던 모 회사의 고객모니터에 합격을 했다. 꽤 경쟁이 치열하고 소수만 뽑는 것이었던 터라 기대를 별로 하진 않았었다. 그런 '주부' 로서의 대외 활동을 해본 경험도 전무한 워킹맘으로 살았을뿐더러, 더군다나 단체 토론 면접 (세상에, 고용이 아님에도 면접을 진행할 정도라 잠시 놀랐다) 에도 나는 그 회사 제품에 대한 너무 솔직한 피드백 덕분에, 다른 분들은 다들 '좋다, 사 먹겠다, 나는 이 회사 제품을 선호한다' 등등의 의견이었지만, 청개구리인 나는 '이게 별로고 왜 이래야 하는지 모르겠고, 나 같으면 이 제품이 시판 상품으로 나와도 안 사 먹겠다'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했기 때문에... 그랬던 청개구리를 합격시켜 주셨던 터라. 이게 뭐라고....



괜히 눈물이 나려 했던 건, 아이가 생각나서였다. 

쌍둥이들을 어린이집에 맞기고 한 달에 약 두 번, 평일 낮 3시간 정도를 그럼에도 집 '밖'에서 나의 시간을 소비하고자 했던 나의 행위가, 어찌 된 영문인지 자꾸만 집 밖으로 나가려는 엄마의 새로운 '시작' 이... 못내 아이들에게는 이상하게 미안해졌기 때문이었다. 다 큰 아이들도 아니고 아직 손이 참 많이 가는 미취학 아동, 아들 쌍둥이.... 언제나 주홍글씨처럼 나를 메는 수식어, 나 스스로 가둬두고 마는 우리들만의 왕국... 



나를 죽이고 감정을 침잠시켜야, 내가 아닌 누군가를 돌보거나 보살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다둥이 육아와 집안일이란, 회사를 다니면서 해내는 시간이나 그렇지 않고 온전히 혼자 물리적으로 버티듯 해내는 지금의 시간이나. '하지 못하는 것들'을 어느 정도 철저히 인정해야, 반대로 지켜낼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나는 아이의 눈을 바라보고 나의 기쁨을 알리고 싶었을 때. 동시에 차오르는 슬픔이라는 그 역설적인 감정과도 닿았을 때, 비로소 나의 민낯을, 집에만 있고 싶지 않다는, 잠시라도 좋으니 '이탈' 하고 싶다는 어떤 감정을 아이에게 들켜버리고 말았을 때조차도...



흘러야 살 수 있는 게 바다라면.. 때로 그 바다처럼 되고 싶어서..



나로서는 삶의 절망을 건너는 방법은 다름 아닌 어떤 '시작들'이었다. 지금처럼... 

비록 고용이 아닌 대외 활동임에도, 몇 푼 안 되는 원고료를 받으며 글을 쓰는 시간이나, 어떤 회사에 찾아가 제품을 모니터 하는 행위라든지, 남들이 읽어주지 않는 글을 혼자 쓰는 시간이라든지. 돈이 되든 되지 않든 전업을 탈피해 새로운 세상과의 연결고리와 '시작'과 '시도'를 자꾸만 하려는 '엄마'인 내가, 끝내 아이들에게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눈물을 흘려버리고 말 지언정, 절망의 나락에서 자꾸만 우울과 슬픔이 찾아오려 할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최선 아니 차선책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찰나의 시간을 '틈새' 공략하듯,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 그리고 보이차 한잔을 마시면서 자꾸만 새로운 '시작'에 '엄마' 이전에 '나'를 드러내 보려는 못나고 미안한 행위들... 



그러나 이제 나의 아이들은, 이런 나를 받아들이고 아는 것 같기도 하다. 

때로는 나의 배우자보다 더. 아이와 등원을 하며 주고받았던 대화는 그래서 나를 울렸고, 아이를 잠시 기관에 맡기고 돌아오는 길에서는 내내 하늘을 쳐다보면서 연신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엄마, 있다가 데리러 올 거지, 아까처럼 안 없어질 거지."

"그럼. 와야지. 엄마가 가긴 어디 가... 돌아와야지. 나갔다가도 돌아올 거야. 데리러 올 거야."


우리들만의 왕국이면 아무렴 어떨까. 서로 보듬어줄 수 있는 갇힘이라면... 그 갇힘도 괜찮아. 정말.. 괜찮을 거다..



나갔다가 '돌아올' 곳이 있는 삶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절절히 생각해보게 된다. 

절망을 이겨내려 하는 행동은, 한편으로 또 다른 절망으로 다가올지언정, 이제는 돌아올 곳이 있고 나를 찾는,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어떤 시작이 이상하게 기쁘면서도 동시에 슬픔에도,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모든 시작은, 누군가를 더 생각하게 만드는 시간이 될 것이고, 

결국 그로 하여금 모든 지나가는 삶의 기억으로, 죽음 직전에 남을 테니까... 




#한편으로_너희 둘 덕분에 산다는 말은 진짜다...... 

#너희 둘은 모르겠지만..... 이 마음에 대해서. 


미안하다..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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