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븐 Apr 27. 2020

스스로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을 때   

그녀가 그렇게 본능적으로 도와주고 베풀어주려던 것은 

오로지 자기만족을 위해서였을까. 


- 버지니아 울프, 등대로 - 





주말에 친정에 다녀온 후 엄마와 짧은 대화를 나눴다. 



- 쉬어보니 어때.  

- 일 하는 게 사실 더 편해... 이력서도 조금씩 준비하고 있고. 느리고 잘 되지 않지만.  

- 그냥 애들 키우면서 좀 쉬어. 너 일 오래 했잖아.

- 집에서 살림하고 돌봄만 한다는 게... 난 더 힘든 사람인가 봐... 육아는 정말... 같이 해봐서 알잖아 엄마... 

-... 니 성격 어디 가니. 팔자 좋게 살아 그냥. 애들 클 때까지 좀 지켜보고. 

- 팔자 좋게... 그러게. 팔자 좋은가 나... 근데 엄마. 이 팔자가 내가 원하는 게 아닌가 봐. 



흔히 말해 '팔자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배우자가 벌어 주는 월급으로 살림 관리를 하면서 아이들을 기관에 맡겨 두고 난 이후에 서너 시간 동안의 독서와 글쓰기, 기타 집안일과 가사노동을 마치고 난 이후의 아이들과 지지고 볶으며 지내는 이 시간들...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복에 겨운 일이라는 것도 이제는 넌지시 이해가 될 법 하나, 한편으로 이렇게 '팔자 좋은' 삶을 지내지만 정작 본인은 과연 행복한 것인가를, 나는 스스로에게 묻고 말았고 그 질문 덕분에 한참을 멍하게, 그렇게 멍해 있었다. 



혜원아... 너는 지금 행복하니 라고.

스스로 이름을 불러주고 말았을 때, 스스로 이 질문을 기어코 해내고 말았을 때 나는 어쩐지 아직까지도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눈물이 커다란 두 눈에 차오르고 만다. 눈에 있는 힘없는 힘 다 쥐어 짜내듯 힘을 다 주어 보지만 결국 차오름의 공간이, 눈 속의 여백이 가득 차 없어져 재빨리 볼을 타고 흐르고 마는 걸 옷소매로 괜히 쓱 닦아내 버린다. 그렇게 다시 아무렇지 않게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한다. 아이들의 저녁 찬거리를 만들고 키보드 위에 손을 얹은 나는 뭐라도 써볼까 싶은 요량에 하얀 화면 속 깜빡이는 커서를 멍하게 바라본다...  



아무것도 쓰지 않아도 그냥 편안해지는... 때가 있다는 걸 쓰면서 알게 되었다. 



아무리 상식적이고 내면이 꽤나 튼튼한 사람이어도 슬프고 아파서 온종일 울 때도 있을 테니까. 

어쩌면 인간은 완벽을 향해 나아가지만 끝내 불완전한 모습으로 살다가 죽는 건 아닐까 싶었다. 오늘만 해도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집으로 귀가하는 오전 10시 30분의 나는 눈물바람이었으니까. 이렇듯 '팔자 좋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여도 무슨 영문인지 행복의 근사치조차도 다가가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마니 이게 무슨 팔자인가 싶고. 그런 생각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퇴사 이후 친정 부모님에게, 동생에게, 몇몇 안부를 걸어오는 동료에게, 그리고 배우자에게, 나는 '괜찮다' 고 말했던 나였다. 아니 오히려 호언장담을 했었다. 그냥 그만두는 타이밍이 조금 일찍 찾아왔을 뿐이라고. 아무렇지 않아 했고 씩씩하게 집에서의 '일'을, 맡은 바 소임과 책무를 하면 그만일 거라고 호언장담을 스스로도 주문 외우듯 다짐했지만. 



말하자면 거짓투성이, 가증스러운 증언이라는 걸 가끔 들켜버리고 만 것이다. 

스스로 이름을 부르며 철저히 객관화시키듯 현재의 상태를 자신에게 물었을 때, '이게 아닌데' 싶었던 걸까. 아니면 나를 제외한 모두가 완전하게 잘 나아가고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을까. 물론 그렇게 '보인다는' 것뿐이라는 것도 잘 알지만, 그럼에도 인스타그램 속 봄을 즐기는 타인들의 일상들, 순수한 이들의 세상 걱정 없이 평온해 보이는 인증사진들, 사업가들의 잘 되는 사업의 증거 같은 멋진 광고 잘난 모습, 짜릿하게 멋져 보이는 대인 관계, 온통 잘됨 투성이로 보였던 걸까. 좋아하는 작가님의 책 제목 그대로 '인스타그램엔 절망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편으로 나는 그 모든 것들의 피드를 '차단' 시켜 버리고 오로지 '책'이나 자연 풍경 몇 개만을 남겨 둔 채 핸드폰 조차 쳐다보기 싫은 날, 오늘 같은 날은. 



시끄러운 세상 소리는... 구름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언제나 곁에 있어준 건 구름이고 자연이었고 공기였음을...



삶의 좌표를 잃었다고 생각했던 나를 '다시 고침' 하려 노력을 할 뿐이다. 

한 때, 일하면서도 쉬고 싶다는 생각이었고, 쌍둥이를 뱃속에 지니며 많은 축복과 축하 인사를 받았음에도, 향후 불어 닥칠 어떤 두려움 때문에 낳는 걸 여전히 기쁘게만은 생각하지 못했던 못난 예비 엄마였던 나였고, 낳고 나서는 이윽고 우수수 재앙이 불어닥치듯 온갖 좌절과 우울에 몸서리가 처질 정도였었다. 



한 여성의 일을 위해 한 여성의 희생을 등에 짊어진다고 생각했었다. 

한때 그렇게 바라마지 않았던 육아 휴직 이후의 복직이라는 걸 해낸 이후에도 아이들 생각에, 두 녀석 돌봄을 물심양면 지원했던 친정엄마의 몸이 망가지기 일쑤일 땐, 그녀에 대한 죄책감에, 걱정도 슬픔도 끊임없던 나였다... 그러니 지금, 이 일상적인 풍요(?)와 안정과 어찌 보면 그럴싸한 편안함을 생각하면, 이 '슬픔' 은 위선이 아닐 수밖에 없지 않겠냐고... 나는 괜히 따지듯 약해지려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지 말라고. 마음을 고쳐 먹으라고. 예전에 비해서 정말 용 된 게 아니냐고... 



흔히 사랑을 하는 사람이 사랑을 받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고 하던데. 

나는 때때로 아직도 미성숙하고 미미한 사랑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충분히 아이들을 사랑하고 가족을 돌보는 사랑을 '하고 '있음에도, 어째서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만 건지. 행복보다 불행에 가까운 삶이 아닐까 생각하다가 이윽고 생각이 정말 현실이 돼버리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애써 생각을 아예 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시도한다. 아예 행복이라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 말자고. 마냥 행복하면 그게 미친년이 아닌가 싶었기에. 미친년이 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한편으로 이번 생에 미친년으로 살다 간 내가 지키려는 사랑들을 지킬 수가 없기에. 미친년이 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것이라면 



엄마. 제가 그랬었죠. 머리에 꽃을 달면 차라리 편할 것 같다고. 제정신이어서 더 견디지 못했었다고.. 그때 그랬었습니다..



이렇게 차오르는 감정 끝에서야 기어코 글은 '시작' 되고 마니, 어쩌면 이것 자체가 행복 아닐 것이냐고...

우스운 행복일 수 있지만, 나로서는 여전히 글의 '시작' 은 이런 '차오름'의 말미에서 시작된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쌓이고 또 쌓여서 더 이상 간직할 수 없듯이 기어코 온갖 문장들과 만나고 말 때. 웅성웅성 내게 말을 걸어오는 순간. 이렇게 글은 시작된다. 그리하여 쓰고 나면 부끄러워서 낮 뜨거워질 감정적인 글이 되고 말지언정. 



아직도 '작가'라는 이름은 굉장히 부담스럽고 멋쩍기만 하다. 내가 뭐라고. 

제대로 된 '글'을 쓴다는 것이, 그 길을 가보려고 기웃거리는 지금, 여전히 작가로서는 한참 모자란 나는 한편으로 그럴싸한 책으로 내보내기 좋은, 혹은 누군가에게 '아주 잘' 읽힐만한 소재는 또한 아닐 수 있음에도 기어코 읽히지 않을 어떤 글들을 혼자서 쓰고 말다가 종종 스스로 이름을 부르곤 한다. 이것이 나로 하여금 본능적이고 철저히 자기만족을 위한 것임에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끝내 어떤 말을 건네기 시작한다. 



당신도 그러했을까요... 그랬으니 그런 작품들이 나왔던 걸까요....



혜원아, 이렇게 쓰니까 좋으니, 넌 그래서 행복하니.라고. 

한때 나의 대답은 '살 것 같아.'였고, 지금도 질문에 대한 대답은 별반 다름없음을 깨닫고 만다. 

부끄럽지만 감사하기도 했다... 오늘은. 아니 요즘은. 








사실은, 당신 덕분에 살 것 같기도 하다는 걸 압니다.  엄마.. 가끔 힘들거나 울 땐, 당신 생각을 해요. 그럼.. 괜찮아집니다. 




작가의 이전글 [리치해빗 스터디] 슬기로운 경제생활, 가계부 모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