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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May 13. 2020

나는 종종 죽음을 생각한다.   

거짓말을 보탤 바엔 소설로 쓰자 해서 내 이야기가 끼어드니까 소설이 되고 만 겁니다.


- 박완서의 말 - 





스위스 태생의 유명한 의학 학자이자 죽음 학자였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그녀는 아버지의 친구가 나무에서 떨어져 죽은 것을 보면서 죽음에 대해 일찍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후 생전 죽어가는 많은 이들과 숱한 대화와 연구 끝에 '어떻게 죽느냐'의 문제가 삶을 의미 있게 완성하는 아주 중요한 과제임을 깨닫고 말기 환자 5백 여명을 인터뷰해서 책을 출간, 일생을 죽음학에 온 에너지를 받쳐 연구하던 그녀를 통해 우리는 죽음, 상실의 5단계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최소한 '우리'가 아닌 이 글의 주인인 '나'로서는.... 그녀와 그녀의 책이 떠올랐던 건 아주 못난 '나' 때문이었다. 



불편한 진심을 고백하자면, 아니 어쩌면 글로서 부끄럽게 토해낸다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요즘 종종 '죽음'을 생각한다. 종종... 다행히도 종종. 자주가 아닌 종종. 자주와 종종의 차이를 부끄럽게도 사실 모르겠지만 이젠 그러려니 한다. 그리 대단한 사람도, 잘 팔리는 책도, 베스트셀러 작가도 아닌 '덕분에' , '빛'과 '빚'을 구분하지 못하고 막 쓰기도 잘하는 나로서는 이제 철자나 맞춤법도, 비문이든 구문이든 이젠 그 조차 글의 세계 안에서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는 요소가 아닌, 읽는 이 배려 전혀 하지 않는 이기적이고 못돼 쳐 먹은 인간이기에....(벌써 정신이 혼미해진 걸까, 글이 산으로 이미 가려한다) 



죽고 싶단 생각이 문득문득 나를 파고드는 건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것은 정말이지 아주 여러 이유들이 뒤섞여 뭐 하나 뚜렷한 연유를 찾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굳이 찾아낸다면 약해지고 지칠 때로 지친 신체와 마음의 절묘한 타이밍적 조화(?) 정도로 오늘은 결론지었다... 쉴 데로 쉬어 버린 목 상태와 내 것이 아닌 다른 신체 장기들이 들러붙어 있는 것 마냥 무거움을 느끼기 시작한 신체 여기저기들. 자주 터져버리는 눈물, 권고 퇴사 이후의 자멸 감과 그로 인한 우울감, 그리고 현재의 주양육자로서의 집 안에서 아이들과 부대끼며 생활하는 시간 속에서 극도로 밀려오는 피로함과 괴물적인 공격 본능, 다스림의 한계는 자주 찾아와 아이들에게 전해지는 호통 그 이후에 깊은 죄의식과 스스로 느끼고 마는 뻗치는 자괴감과 허망함.... 



창문 하나 있는 게 얼마나 큰 선물이던가. 어둠만 가득한 방에서는.... 창문은 그런 존재일 것이다. 




권고 퇴사를 받기 직전에 사실 아이들 병간호를 위해 휴가를 냈었다. 

전엔 짧지만 시부님의 병환을 걱정하고 돌보기도 했고... 여하튼 아마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목이 자주 쉬게 시기가. 이후 이러저러 많은 일들을 겪어 냈고 (객관적으로 보면 아닐지 모르지만) 이미 성대결절 판정도 받았기에 원래의 불편함 없는 목소리의 상태로는 회복되지 않을 거라는 짐작했다. 각오도 필요했다. 돌봄과 손이 많이 가는 영유아 주양육자로서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환경에 처한 나는 직감했었다. 앞으로 하면 더했지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자고. 최소한 유지할 것들을 지키자고. 최소한의 것들을.... 



여기서 최소라 함은 나의 심신이며 이를 유지하려는 이유는 내가 아닌 이들을 위한 필요이기 때문이리라. 

그들을 지키기 위한 최선... 나의 최선, 나의 구원이자 동시에 나의 절망이기도 한 역설적인 대상들. '가족'... 너무 부끄럽지만 나에게 현재의 가족은 나의 구원이고 선물이며 삶의 이유이지만, 한편으로 쉽게 죽지 못하게 만드는 나의 절망이기도 하다. 이 또한 정말 부끄러운 고백 중에 하나이지만, 세상에 사랑을 주려는 부모라는 전제 하에, 쉽게 죽을 수 있는 부모가 이 세상에 있을까? 



없을 것이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믿고 산다. 부모가 된 이후의 삶은 언제나... 여태껏, 앞으로도 아마도. 

부모라는 정체성을 두른 이들에게 (다시 한번 전제는 '사랑을 주려는' 이들이다. 받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그냥 무엇을 줄 수 있는지'만' 생각하는 부모) 스스로 죽을 권리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건 어쩌면 '죄' 일지 모르니까. 세상에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이들의 탄생 앞에서는 '부모'라는 이들이 저지르지 않아야 할 최대의 죄악은 아마 '인위적인 죽음' 이 아닐까 싶다... 자연스러운 노후 혹은 사고로 인한 죽음이 아니고서야. 



흑백처리되고 싶었던 나쁜 마음. 



그러하니... 종종 죽음을 떠올리고 마는 나는 그 상상조차 일종의 죄의식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생각 조차 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사실 생각을 하게 되는 건.... 신체가 약해졌고 그 덕에 마음도 일정 부분 '정신 똑바로' 차리지 못한 상태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며 (다행히 혼자일 때만) 더군다나 아이들의 극성화의 연속인 나날들과 한편으로 기대했던 무언가에 연속적인 실망을 느끼게 되거나, 아니면 평소와는 다르게 (평소란 무엇인지) 남들과 별로 비교하지 '않았던' 내가, 어느새 비교를 하고 말아 괜한 '현재의 삶'에서 허탈함과 무기력함을 느끼고 말면, 이웃집 여성분이 생일선물로 샤넬 가방과 시댁에서 용돈 50만 원을 받았다는 그 인증샷 하나에  나로서는 정말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혼란한 지경'에 처하고 만다는 스스로에게 향하는 역한 핑계가 솟구치는 것이다... 참고로 그분의 샤넬이 부러운 게 아니라 배우자와 시댁의 물질적일지언정 '보살핌' 이 가시적으로 보인다는 것에 나는 큰 부러움을.... 느끼고 말았던 것이라는 자조적 고백을 해 보며. 



'백세 일기'에서 어느 노 철학자는 이런 말을 했는데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사실 소름이 돋았었다...



모든 남성은 두 여성의 사랑으로 자라고 행복을 누리면서 살게 된다. 어머니와 아내의 사랑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결혼 전에는 어머니의 보호와 배려가 있었고, 그 후에는 아내의 도움이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 기간에 얻은 교훈은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을 받는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그 사랑이 미미한 것 같아도 그것이 타고난 모성애임을 깨닫게 된다. p. 74 




타고난 모성애는 없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그 '모성애' 운운함에 치가 떨리고 말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빌어먹을 모성애.... 내가 끊어내지 못하는 그 '모성'이라는 생겨버린 또 다른 자아에 대해서. '어머니'라는' 아내'라는 빌어먹을 단어 속에서 존재하는 서사가 결국 '모성' 이라든지 '돌봄' 이라든지 '뒤에서 조용히 지지' 하는 '희생' 이라든지.... 뭐 그런 게 여전히 떠오르는 거다. 아마 앞으로도 인류가 존재하는 한 그건 만고불변의 법칙일지도 모른다. 각국에 실존하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 철학자들이 들으면 콧방귀 뀌실지도 모를 일이지만.... ('생각하는 여자'라는 책의 서평을 쓰고 있던 터라 괜한 말이 또 튀어나온다. 글은 계속 산으로 간다.. 어느 산봉우리까지 오를 것인가. ) 



이런 말을 해서는 사실 안 되지만 사는 게 너무나도 숨이 막힐 때가 있다. 요즘이 사실 그렇다. 

막상 일을 그만두고 나를 제외한 이들은 오히려 홀가분하게 '놀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지만.. 어디 태생(?) 이 그리 놀면서 살 팔자인가 싶었던 거다. 논다는, 쉰다는 '환경' 설정이 정말 되는 '게임' 인가 싶었던 거다. 이 삶이, 현재의 나로서는...... 그러니 또다시 한번 타인들의 변변찮은 위로(?)에 나는 붕 뜨는 기분을 느끼고 만다. 


나의 천국은.. 나의 헤븐은...




이렇게 막무가내로 '글'을 쓰는 이 행위는 여전히 오로지 나를 위한 최대의 최선이다... 부분이자 전부...

글의 세계에서는 누군가에게 또한 이 문장들은 다시금 갈취당할지언정.... 내가 썼던 문장과 아주 비슷한 문장을 보고도 나는 모른 척할 것이며 (그/그녀가 나보다 파워가 있는 작가라면 어떨까) 아마 베껴 썼다는 이에 대해 사회는 내가 되어야지 파워풀한 그들이 가해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피해자가 되는 건 언제나 약한 자의 몫. 권력자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권위는 바로 이런 것들일 것이다. 언제든 마음먹은 대로 '조작' 하고 '모방' 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오늘따라 글이 정말 여러 산으로 간다..) 



이런저런 위에서 언급한 여러 이유들이 그물처럼 복잡하게 엮인 채 

이미 내면에선 '분노'가 차 오른 지 오래되었다.... 아주 오래... 그것이 요즘 들어 정말이지 침묵의 틈새를 비집고 삐쳐 나오고 있는 모양인지 그리하여 나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5단계를 떠올리고 만다. 죽음의 5단계에 대해서.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 나는 사실 2단계인 분노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거의 4에서 5단계에 머물고 있다는 결말에 다다른 이유는 다름 아닌 단절된 침묵을 선택하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손쓸 수 없이 나는 '단절' 되고 싶다는 폐쇄적 자아가 돌연 나로 변해버리고 마는 걸 느끼는 중이다. 

아마 최근에 별 연유도 없이 연락처를 거의 정리한다는 핑계로 모두 삭제해버린 이유도...(사실 거의 지워버리고 싶었다. 정말 가족들 빼고 모두 다) 나는 침묵하고 싶은 걸까, 그렇게라도 해서 타협하고 우울을 거쳐 수용하는 지경에 처해버리는 걸까 싶은...



아이들을 제외하고 나는 말수를 줄이고 싶다... 유일하게 말을 주고 받는 대상이 아이들이면 이미 그것으로 충분히 과부하다...



죽으면 어떨까를 생각하다가 영정 사진 앞의 남겨진 가족을 생각하자니 

금세 눈물을 쏟아내 버리는 나를 발견한다는 것은, 반대로 죽음을 생각하는 나는 반대로 아직 살고 싶다는 반증인 걸까, 아니면 죄의식 때문인 걸까. 어느 쪽이든지 간에 어떤 장면을 상상하자 바로 눈물을 흘려버린다는 것은 살고 싶다는, 살아야 한다는 아주 오랜 시간 연습된 긍정 이리라. 나에 대한, 삶에 대한, 현존에 대한 악에 받친 긍정.... 



속에서 웅성거리는 날카로운 문장들 때문에

 '글이 작품이 되는 브런치'에서 이 글은 본디 노잼에 너무 우울의 도가니라 금방 스크롤을 내리시든가 구독해지의 지경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지금 이 순간, 너무나도 제멋대로, 그저 '쓰자' 싶은 마음에 몇 분이 채 되지 않아 이 글을 이만큼 쓰고 이즘에서 일단 그만두자 싶었다.  이렇게 논픽션으로 다 보여줄 바에야 차라리 '픽션'으로 가자 싶었던 건, 박완서 선생님의 문장을 내내 기억하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나목'을 비롯한 그녀의 작품을 모두 읽어 해치우기 시작한 요 근래는 더더욱. 그리고 말미엔....



헤져버린 감정의 끝에선 '죽음' 대신 '삶'을 생각하자 싶었던 이유는 

아이들의 두 눈은 나를 직시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이번 생의 과업이자 도리이기에.

나를 포기할 순 있어도 그들을 포기할 순 없고, 이젠 내가 무서운 건 다름 아닌 '자식' 들이기에....... 



제 몫을 다 해낸 이들이 누릴 수 있는 권리도 결국 '편안한, 좋은 죽음' 일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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