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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May 14. 2020

기죽지는 말았으면 해

(주의 : 욕설과 비방과 꼰대의식 난무함)

행복하고 선량해집시다. 목소리가 되풀이해서 말했다.

평화를, 평화를 찾읍시다. 목소리가 떨리며 속삭임으로 낮아지더니 잠시 잠잠해졌다.

아, 나는 여러분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 멋진 신세계 -






밤 열 시가 다 되어도 쉬이 잠들지 않던 5세 남아 둘은 그제야 찾아온 아빠를 반겼다.

반가운 부자상봉이 이어진 이후에 나는 슬그머니 안방을 빠져나와 잠시 '글'을 토해버리고 있었던 그 저녁 11시. 그이는 나의 '눈치'를 살피려는 듯 오늘의 안부를 물었다. 그런데... 거기서부터 나는 이미 '꼬일 데로' 꼬여 버린 열등감에 차오른 인간으로 변한 지 꽤 오래되었기에, 그이와의 대화를 시작하고 마노라면 괜히 상처 줄 것 같아서 침묵을 택했다. 그게 최선이었다. 그를 다치지 않게 하고 싶었던 것이 첫 번째 이유였으며 아울러 형편없이 차오르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내적 분노를, 지켜야 하는 나의 가족에게 인정받고 위로받으려는 듯 마음을 쏟아붓기 시작하면 결국 어떤 사달이 나고 마는지 또한 예상이 되었기에.



- 오늘 힘들었어? 표정 안 좋네.

-....

- 김 전무님.. 뇌 뭐였더라. 하여튼 쓰러졌었대.

-...

- 한 번에 훅 간다. 조심해야 해.

- 조심해야 할 사람은 자기지. 나는 덕분에 편안히 잘 있잖아... 건강 챙기면서 일 해..

- 그래. 화난 건 아닌 거 같네.

- 그런 게 아니라.. 요새 내가 좀 모나서 그래. 미안해.

- 그래. 나 자러 간다.




새벽을 준비하는 당신의 저녁이 평안하기를....




'나' 에게, 그리고 현기증이 날 것 같은 '시대'에 화가 나 있었다는 걸 그이에게 알려야 되겠다 싶었다.

다음날, 점심시간이 되어 잠시 그이에게 온라인 대화를 건넸다. 아니 그건 대화가 아니라 어쩌면 배우자의 하소연이자 푸념 정도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요 몇 개월 동안의 신문 속 사건 사고와 흐름들을 지켜보며 (팔자 좋게도) '세태'와 '시대'를 보고 '생각하는 여자'가 되고 말아 급기야 괜한 자괴감에 빠져들어 도무지 그 '의지'라는 것이 일어날 기미 없이 꺾일 데로 풀 죽어 꺾여 버리고 마는 지경에 처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 어젠 쌀쌀하게 굴어서 미안했어. 일하느라 바쁘지?

- 아냐. 지금 점심시간이라 괜찮아.


- 좀 웃긴 이유인데, 세상이 진짜 병신 같이 엿 같아서. 나도 엿가락처럼 눌어붙은 모난 감정 때문에 그냥 스스로 분노하고 열등의식에 사로잡히는 중이라 그랬나 봐. 생일날 샤넬백을 선물 받고 시댁에서 용돈 50만 원 받아서 기념 사진을 올리는 어떤 이웃의 인증샷에 내 사상과 신념과 삶을 괜히 돌아보게 되다가 이상하게 초라하다가 갑자기 스스로 열등 덩어리가 되기 시작했지 뭐야.


- 줘도 싫어하잖아. 샤넬은

- 그 돈이면 책을 사봤지...

- 요즘은 아마존 사셨다면서. 아무튼 무슨 일 있었나 보네.


-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나 건드릴 사람이 어디 있어. 하루 종일 집에서 애들이랑 책하고 당신 이외에 별로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고.  다만 신문 속 '세상' 이 날 건드렸을 뿐이지. 가짜 기사였음 좋겠지만 그 사회 경제 기사가 또 '팩트'만 나열하지 뭐야. 골프랑 샤넬백 산다고 '보복 소비' 한다는 세상이더라. 당장 지옥고에 월세 공과금 낼 돈도 없어서 쩔쩔매는 이들이 다수인데도. n번방 갓갓이 24살 청년이라더라. 개새끼 얼굴은 존나 또 선하게 생겼어. 어디 세상 무서워서 돌아 다니겠어.

- 하하...



- 이태원 프리덤에 이미 돈과 섹스면 뭐든 오케이 같은 시대 같아서 진짜 토 나올 뻔한 거야... 하... 애 키우는 입장이 되어 버린 진짜 꼰대에 늙어가는 애엄마 입장으로 보니 세상에 여자로 태어났으면서 여자 까대는 아니 벗으려면 다 벗지 왜 속옷거적대기도 안 되는 옷 입고 퍼포먼스 하는 미친 쌍년하고 개새끼들이 존나 많아. 뭐 젊어서 잘 '즐기는' 이들 뭐라 하겠냐 싶지만 피해 입는 건 1살 베기 조카이고 치사율이 확률적으로 높은 병든 노인이고 돈 없는 강북구 경비원인데... 빌어먹을 인간들이 너무 많은 거 같아서 애들 어찌 키워야 하나 싶고. 근데 또 애 키우는 부류를 봐도 가만보니 가관이야. 사교육시장 누가 만들었지 싶고 근데 그 사교육비로 존나 잘난 인강 강사가 탄생하고. 뭐 개나 소나 책인지 글모음인지 감성팔이심리잡글그림모음집인지 하여튼지간에 뚝딱 공장에서 찍어진 거 마냥 나오고 그걸 성인 교육물이네 사업 컨텐츠랍시고 다들 존나 온라인 안에서 팔고 앉아있고... 그냥...모르겠어. 순간 현타 와서.....개짜증난거야...그래서 그런...거였다.



-..... 오늘 좀 거치시네. 말 한번 시원해서 좋긴 하네.

- 당신은 양반 해. 나는 상것으로 할 말 하고 살께. 남존여비가 여전히 암묵적으로 통하는 개 같은 세상이라는 건 일찌감치 눈치챘거든. 아무튼 무자식 상팔자가 딱인가 봐. 애 없으니 다들 자유롭게 잘 살아.. 진짜 애 안키우니까 자유로워서 이태원이든 강남이든 그 지랄하고 부비부비 쩌는거지. 안그래? 그 와중에 그 세대가 광고의 시대 속 주인공이잖아. '월 천만 원' 이 고유명사더라. 여보? 하. 나 원 참.  내가 화난 주 포인트는 바로 이거였어. 월천의 시대....와 씨X. 진짜..월 천만 원을 버는 게 참 쉬워진 시대라는 것이, 그걸 주장하고 계속 전파하는 '시대'와 '세대'를 생각하니 내 생각이 진짜 병신인 거 같아서 괜히 꼰대의 열등감에 사로잡혀 버린 거야.


- 우등 의식 가져도 돼. 나한테는 우리 와이프 우월한 사람이다.

-.........  




어리석게 성난 나를 잠재운 당신의 고운 그 말에..어찌나 고개가 숙여지던지 말입니다.




등신 같은 생각에 빠져서 쩔쩔 매고 고통스러워하는 못난이 앞에서 그이의 '우월한 사람'이라는 발언은

나를 울리고 말았으며 아울러 우월한 건 내가 아니라 당신 쪽이라는 것을 밝히고도 싶어졌다. 근 20년 이상을 근속하면서 성실함이라는 기본 무기를 지닌 채 그것을 베이스로 자본주의에서 살아남는 사람. 몸과 머리를 있는 힘껏 쥐어 짜내듯 쓰면서 동전 하나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당신이라는 노동자가 마땅히 존귀하게 인정받아야 하는 시대가 아닌가 싶었기에. 그러나 이미 노동자의 존귀함과 가치는... 온 데 간데 없어진 것 같아서 다시금 열패감에 사로잡히고 말았던 거다.



- 아무튼 어제는 괜히 생각이 깊어져서 나 혼자서 분노하다 자기한테 예민하게 굴었어. 미안해. 요즘 사실 자기한테 의지를 한다. 가족이라... 내가 지킬 사람들만 생각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

- 나도 의지해. 요새 고마워. 건강하게 아이들 잘 키워 줘서. 그거 대단한 거 하는 거야. 남들이 뭐라 해도 나한텐 우월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세상사가 원래 그렇더라. 사람 사는데 업다운도 있고. 그러니 너무 기죽지는 말았으면 해

-.......... 기죽지 않을게. 고마워...



내 생각은 이미 탈선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주류적 시대에서 도망치고 있었던 걸지도.

'월천' 이라든지 '무자본' 이라든지 하는 그 단어가 풍기고 다니는 대단히 잘나빠진 광고나 마케팅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누구나 벌어들일 수 있다던 (신앙도 그렇게 대단한 신앙이 따로 없어 보인다) 아주 손쉬운 금액으로 취급받는 '월천의 시대' 그 자본주의 현장을 미디어 속에서 넌지시 지켜보며 동시에 한편으로는 그 '노동'에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타인의 욕망과 감정을 철저히 활용해서 반대로 돈주머니 꿰차려 하는, 쉽게 벌어 들이고자 하는 '기만적' 인간의 위선이 아닌지를.



인간에 대한 나의 신뢰는 요즘 바닥나버리는 중이다. 뜨내기 장사치도 너무 많고..




가장 낮은 곳에서 낮은 임금을 받고 낮은 자세로 일을 하는 노동자들을 반대급부적으로 생각하다가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돌아오는 그이를 생각하고 마니 괜히 더 차오르는 분노를 요 근래 씻어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 이상한 감정마저도 만약 '사랑'의 근원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면..... 노동자로 여전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그를 사랑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어떤 위로와 격려를 보내고 싶어도 이제는 무력한 나에게 화가 나는 건지..



성과주의 자본주의 속에서 계속해서 다가오는 어떤 비대한 생각들을 뿌리칠 수 있는 건

다름 아닌 그의 한마디 덕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기죽지 말라' 던 그의 목소리는 오늘 오후의 나를 울리며 또한 살리는 중이라는 것은, 그이에게 말하지 않았다. 다만 이 말을 톡방으로 보내며 나는 평화를 찾으려 했다... 격앙된 내면의 목소리를 보이차 한 잔에 가라앉힌 채로.



자기도 기죽지마. 당신 곁에 내가 있으니까. 그리고 건강한 생각으로 살아 있어줘서, 살아줘서 고맙다.

 선량한 당신이 우리 아이들의 아빠라는 것도... 정말 다행이다. 라고....



성난 사자에서 순한 양이 되는 건 누군가의 따뜻한 배려 넘치는 말 한마디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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