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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un 01. 2020

생각보다 담담한 거리감  

상처가 나쁘기만 하다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거지. 

피하지 마. 피하지만 않으면 돼. 

우린 마치 서핑을 하는 것처럼 그 파도를 넘어 더 먼 바다로 나갈 수 있게 되는 거야.


- 먼 바다 - 






름이 정말 시작된 것만 같은, 5월의 마지막 주말은 그야말로 '찜통 더위' 였다. 

시댁을 내려가는 차 안에서부터 실감할 수 있었다. 시댁에 내려가는 길은 한참 오전의 시간이었고 아스팔트의 고속도로를 에어컨도 없이 창문을 닫고 달리기엔 아이들은 투정을 부릴만 했다. 충분히 그래야 마땅한 나이라는 걸 나는 알았으니 가만히 아이들을 어떻게 달랠까 궁리하는 중이었다. 사실 나도 힘들었으니까...그러나 그이는 아이를 조금씩 다그쳤고 그럴수록 아이들의 반대시위(?) 는 거세졌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제법 '엄마' 로서, 혹은 남은 한 사람의 '보호자' 로서 노련해진걸까. 핸드폰의 유튜브로, 간식 가방 안에서의 사탕으로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모든 요구사항들을 들어주기로 했다. '안전특공대 피피루' 와 '신비아파트 귀신송' 덕분에 살았다. 때로 서툰 부모 보다 만화 속 캐릭터들이 백배는 낫지 싶다. 아이들의 마음을 차분하게 달래고 어루는데 있어서만큼은. 




시댁에서 집으로 귀가하던 때, 석양이 너무 예뻐서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후 6시 30분이 지나가고 있었고, 때마침 아이들은 차에 타자마자 고맙게도 잠들어 주었다. 차량 내 에어컨은 냉매가 이미 고장나 있었기에 고속도로로 진입하기 전, 잠시 창문을 열어 두었다. 밤바람은 시원했고 그렇다는 핑계 삼아 쓸모 없는 과거의 기억들은 곧잘 되살리기에 충분히 선선한, 좋은 바람이었다. 나로서는 '밤바람' 이 그런 역할을 한다. 생각하면 따끔해서 몹쓸 기억도, 여전히 몇 년이 지나도 쿵 하는 두근거림을 자극하는 기억도, 모두 '밤바람' 과 함께 찾아온다. 



- 바람 좋네...

- 수고 했어.

- 애들이 고생했지. 에어컨 하나 나오지 않는 더운 차 안에서... 어른도 힘들었는데. 

- 그러게. 아무튼 고생했어. 고마워 

- 에어컨 사 드리고 와서 고마운 건 아니고.

- 어떻게 알았지.

- 됐어. 고마워 하지마. 내 도리 한거야....자식 세 명 있어도 누구 하나 그럴 생각. 안했잖아. 




석양은 어느 계절이나 예뻤지만..




시댁에 에어컨을 선물해드리고 왔다. 

사실 그러려고 간 거였다. 몇 년전부터 생각해왔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선뜻 실천되지 못한 건 어리고 어리석은 마음이 여전히 마음에 잔존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무슨 앙금이 그렇게도 남아있었던걸까. 구매를 하려 할 타이밍엔, 그 해의 여름들엔 언제나 시댁분들 중 누군가와의 트러블이 꼭 생겼다... 그이에겐 작지만 내게는 크게, 누군가에겐 옅지만 나에겐 진했던, 그들에겐 내가 이기적으로 보였을테고 나에겐 그들이 무섭기만 했던 그런 아픈 시간들이 있었다...



'시' 댁 분들은 내 얼굴에서 미소를 흐릿하게 만들어 주시는 일이 잦은 관계였다. 

대부분 과거의 일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현재의 마음 언저리가 그리 편한것만도 아니다. 첫 만남이 아팠던 건 아니었지만 뭐랄까. 신혼 시절부터 그들과 주고 받은 대화가, 서로 생각하는 태도의 차이가, 그 모든 낮선 이들과 '가족' 이 되어가는 시간들이 그만큼 내게는 쓰리고 아팠다. 달갑지 않은 순간이 꽤 많았다. 그래서.... 



그래서 그랬다. 내내 에어컨을 미뤘던 것은

하물며 자식 세 명 중 누군가 먼저 장만해주시겠지라고 내내 생각했다. 그 생각은 결혼 후 9년이 되어서 결국 아무도 실천하지 않았던 그걸 결국 내가 실천하게 될 줄은...나도 사실 몰랐다. 생각보다 담담한 거리감이 생긴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보다 담담하게 견딜 수 있는, 생각보다 시간이 흐르니 담담해지는, 그런 익숙한 거리감이... 때로 거리감이 있으면 편안해지는 역설 처럼. 그 아이러니 덕분에 이렇게도 변했다는 걸, '고맙다' 는 말을 해 주는 그이에게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모든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 것이 때로는 '가족' 에 대한 '예의' 일테니까... 특히 '부부' 사이에는. 




- 독서 모임 갈 걸 그랬나... 5월 다 지나갔네. 나 뭐 했지...

- 가고 싶음 가지 그랬어. 내가 갔다 오라고 했잖아.

- 그랬지. 당신은 가라고 했지. 그런데 내가 못 간거지. 안 간 거겠지.

- 왜 그래 갑자기.

- 이래저래 마음 불편했어...정말 나'만' 생각하는 여자였음 갔겠지. 근데 난 이제 여자 아니고 엄마잖아. 개인만 생각하면서 살면 안 되는 사람이 나 아닌가. 아이들 팽개치고 하고 싶은거 다 하고 살만큼, 사실 난 의외로 '엄마' 다운 구석이 있나 싶고... 겉으로 이기적이 되고 싶다 말하면서도 사실 굉장히 이타주의적이고, 모르겠네. 이건 뭐 나 뿐 아니라 당신도 사실 마찬가지 아냐. 그렇잖아. 결혼하고 애 낳고 살다 보면...다들 안 그런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 모르겠네. 

- 그래..고마워 아무튼. 나도 사실 같이 가주면 좋지. 편하고. 아무튼 수고했어. 

- 시간 빠르다. 벌써 6월... 뭐 했지 정말...난 한 게 아무것도 없네. 당신은 돈이라도 벌지. 난 뭐 했지...

- 둥이들 키웠잖아. 

- 그렇지. 키웠지. 퇴사하고 열심히. 더 열심히 기르고 살피고 있지...

- 고마워 아무튼 오늘.

- 에어컨 덕에 그 말을 당신한테 다 들어보네. 

- 무슨 말? 

- 고맙다는 그 말. 당신이 잘 하지 않았던, 내가 힘들때, 가끔 당신한테 유일하게 듣고 싶었던 그 말. 




그 문장이 자주 들렸다면 난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어리석은가.  



기혼녀로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고, 그 안에서 관계로 인해 다치고 절망스러웠을 때. 그 한마디면 됐었다. 

고맙다는 말, 그 한마디면 모든 게 위로가 되고 아픔이 씻겨지고 다시 일어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그 한마디는 나로서는 마법과도 같은 치유이고 정화이고 사랑의 표현이었다는 걸, 그는 몰랐었던걸까. 그이는고맙다는 말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니었다. 감정표현이 서툰 사람이라는 건 알았지만 없어도 그렇게 없을까 싶었으니까..고맙다거나 미안하다거나, 자신은 그런 말 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 라고 생각했던걸까. 여전히 그런 류의 문장들을 그의 입으로 듣는 것은 희소하나 아이를 낳고는 그의 인색함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래서 내게는 선물이다. 누군가를 변화시키니까. 어떤 식으로든...어떤 방법으로든. 




많이도 미워하고 많이도 원망했었다. 그러나 이만큼 살고 죽음이 더는 두렵지 않은 나이가 되고 보니 사랑 하는 사람에게는 사랑한다고 말하고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날씨가 춥죠? 하고 인사하고... 살아보니 이 두 마디 외에 뭐가 더 필요할까 싶다. 살아보니 이게 다인 것 같아. 


- 먼 바다 - 




배우자에게 서운함이 생기거나 괜한 씁쓸함이 밀려오는 때는 유독 그의 가족들과 엮이곤 한다. 

다툼이 쌓여가는 원인을 살펴보자면 그랬었고, 나는 그럴 때마다 더욱 선명히 알 수 있었다. 그의 우선순위에서 이미 '기혼' 으로 입성한 '나' 라는 '여자'는 조금씩 멀어져가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이 생각에 증명받기라도 하듯, 그의 언사를 세심하게 관찰하자면 그런 생각에 종지부를 찍을 수 밖에 없는 것들이 많았다. 물론 이 또한 나만의 해석이니 그의 진심은 그게 아닐지언정... 




물론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흐릿해지다가 결국 없어진다. 그게 순리다....




이제는 아득해져버린 아픈 날들의 기억이지만 

생각보다 담담한 그의 가족들 혹은 하물며 그와의 적당히 편하고 건강한(?) 거리감 덕분에 이젠 괜찮은 듯 싶기도 했다. 귀갓길, 잠든 아이들을 태우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그럼에도 그의 '고맙다' 는 새삼스러운 한 마디에 감동은 커녕 사실은 '왜 이제서야'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게 사실이지만... 



밤바람이 너무 좋은 6월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밤바람이 너무 좋다보면 나는 쓸데 없는 기억들이나 상상들을 자주 하게 된다. 부디 너무 많이 해서 괜히 혼자 생경스럽게 힘들어하지 않기를, 나는 차 안에서 창문 밖으로 선선한 바람을 맞이하며 기원했다. 6월도 잘 헤쳐나가보자고, 아이들과 함께...그리고...



멋진 밤공기를, 단 한순간만큼은 '나' 를 위해서 

나'만' 위해서 제멋대로 사용하고픈 욕망을 꾹꾹 마음에 눌러 담은 채로...



시원한 밤공기와 석양은, 바다와 잘 어울린다... 천국과 닿아있는 것 같은 풍경은 이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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