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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May 29. 2020

그가 아빠가 되었을 때  

당신은 분명 좋은 아빠로 기억될 것이다. 

언젠간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올거야.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지.

우린 또 다시 고독해지고, 모든 게 다 그래. 그냥 흘러간 1년의 세월이 있을 뿐이지.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 





어김없이 늦게 올 것이라 예상되는 식구가 일찍 귀가한다 하면, 요즘은 괜시리 반갑다.

양육의 짐을 조금은 덜어놓을 수 있을 것 같은 안도감도 현실적으론 적지 않으나, 한편으로는 아빠를 찾는 아이들이 그와 살을 맞닿아가며 노는 모습을 보는 그 즐거움이 이상하게도 한 몫 하기 때문이리라. 나는 반가운 티를 내지 않으려 했으나 이미 식탁 위의 집밥에 반찬 몇 개를 더 만들어 부산스레 준비하는 나를 감추진 못했다. 반가움의 표시를 그렇게 드러내버리고 만다. 



- 손에 든 그거 뭐야?

- 뻥튀기.

- 왠 뻥튀기?

- 둥이들 주려고. 잘 먹을 거 같아서. 

- 왠일로?

- 그냥. 신호등 건너려고 기다리다가 눈에 띄길래 사와봤어. 

- 잘했네. 좋은 아빠야. 당신...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되도록 일찍 퇴근하려는 그는 이제 '아빠' 로 산다. 

어쩌면 '아빠' 라는 환경설정이 되고 나서야 그의 세계에서는 '일' 보다 더 소중한 무언가가 확실히 자리했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자녀가 없던 기혼 시절에도 그는 '일' 을 좋아했고 그래서 이른 퇴근을 하는 경우는 많이 없었다. 오래, 늦게, 잘도 했었다. 물론 그의 일하는 모습, 자신의 업을 향한 성실한 분투력이 매력적이지 않았다면 그를 선택하지 않았을 테지만, 기혼 돌입 이후 그 매력적으로 보이던 '일' 로 인한 다툼도 적진 않았다. 그의 '사회생활' 을 이해한다 했으나 사실 예전엔 머리의 이해였지, 지금처럼 충분한 마음으로 이해하기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살아보고 겪어봐야 비로소 아는 것들이 생겨난다는 건 결혼의 아이러니한 단면이다. 



일을 하는 서로를 좋아했었던 그 시절...



한 사람의 '그' 가 두 사람의 '아빠' 가 되어 노력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는 

어쩌면 우리 두 사람의 사랑은 그저 젊은 한 시절의 열정은 아니었을까 싶다. 결혼을 하고 '집' 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가정이라는 구성원들의 집합체를 꾸려나가다 보면, 우리가 한 때 장담했던, 아니 희망사항이었던 '서로가 서로에게 우선순위' 라던 그 약속은 터무니없이 사그라진다는 걸, 그제서야 아는 것이다. '가족' 의 완성체가 되어 가면서. 가족의 시간이 깊어질 수록 뭐랄까 복잡한 사랑(?) 에서 단순한 사랑(?) 을 향한다는 느낌이랄까. 



한 때 우리가 서로를 위했던 맥주나 녹차 아이스크림은, 이젠 뻥튀기나 스크류바로 바뀌었다.

4인 가구의 작지만 지속적인 행복을 위해, 개인의 욕망을 탐닉하지 않고, 그 개인적인 욕심은 그저 저 멀리 보이지 않는 마음 한 켠에 잠시 숨겨 두는 것. 그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수순이 된 것이다. 가끔은 그런 모습들이 서글프고 아쉽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 그런 모습들이 쌓여가는 덕분에, 지금의 가족이 조금 더 튼튼하면서 견고하게 완성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전자에 대한 아쉬움은 후자의 공백에 대한 두려움보다 덜하기에, 나는 이제 '아빠' 의 모습이 대부분인 그가 반갑기도 하다... 



아빠나 엄마라는 정체성이, 우리들에겐 이미 더 익숙하고 편하게 된 것 같다. 



어쩌면 '가족' 이자 '아빠' 로서의 그가 더 마음에 들어버린 지금일지도 모른다. 

'남자' 가 아닌 '아빠' 로 보이는 그가, 반대로 '여자' 가 아닌 '엄마' 로서의 내가. 우리 두 사람에게 그 모습이 오히려 익숙하고 편하고 한편으로 고맙고 미안한 여러 감정들을 담고 있다면. 어쩌면 아빠와 엄마로서의 지금의 한 시절을 충분한 최선으로 지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다. 남자와 여자는 지워진 채로. 잠시동안은 지워져 있어 보자고. 그 '잠시'가 어쩌면 중년을 지나 노년을 거치며 '영원' 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 또한 순응하며 흘러가 보자고. 또 어떤 좋고 싫은 모습이 나오든, 이 모든 모습들은 우리의 선택으로 인한 것일지니. 



오늘, 서로가 신나게 몸놀이를 하고 땀에 흠뻑 젖은 세 사람을 지켜보다가 

어느새 핸드폰을 들고 사진이나 영상을 찍던 나는, 문득 생각했다. 우리 네 사람은 이렇게 톱니바퀴가 제 역할을 하듯 '가족' 이라는 굴레 안에서 맞물려 살아가는구나 라고. 두 '남녀' 가 어느새 '남녀' 대신 '가족' 이 되어가는 구나 라고.



어떤 영화의 대사 처럼, '언젠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온다' 한들, 

솔직히 그게 썩 불편하거나 이상한 건 또한 아닌 것도 같다. 이미 그 '언젠가'가 '현재' 가 된 것 같아서 어떤 날은 무척이나 서글퍼서 혼자 괜히 울먹이고 싶은 날이 여전히 있는 게 사실이지만.... 사랑의 형태는 개인에서 다수를 위함으로 변했을 뿐, 그 시절 우리가 선택한 남자와 여자의 사랑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는 것일 뿐, 설령 우리가 언젠가 고독해진다 해도. 그 고독도 견딜 수 있는 건 지금 우리 두 사람 앞의 또 다른 두 사람이라는 '새로운 사랑' 덕분에 이겨낼 수도 있을 것만 같다... 물론 이 또한 장담은 하지 못하지만. 



나만 업어주다 이제 나 아닌 두 사람을 업어주는 모습이, 지금은 더 좋기도 한가 싶다. 좋았던 건 그저 기억으로 간직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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