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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May 28. 2020

절제

그들은 서로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고 그럴 수도 없었다. 

침묵에 가까운, 사교적인 배려라는 담요가 그들을 결속하는 만큼이나 그들의 차이를 덮어버리고 

그들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이었다.


- 체실 비치에서 - 






한껏 아침의 에너지를 소모하고 난 이후 아이들의 무탈한 등원을 알리기 위해 그에게 안부를 건넸다. 

물론 말이 아닌 텍스트로. 육성보다는 글자가 낫다 싶었던 건 목소리는 여전히 둘째와의 실랑이 덕분에 격앙되어 있었을 뿐더러 한껏 고조된 마음을 침착하게 다스리기에 여전히 역부족인, '성난 엄마'역할을 도맡았기 때문이리라.  



- 아기들 잘 등원했어. 걱정마. 

- 오늘은 떼 안 부렸어? 

- 그럴리가.

- 그렇군.



말을 더 잇고 싶었지만 막상 그럴 수도 없었던 건, 연속적이 아닌 끊겨지는 대화 속 시차 때문이었다. 

'바깥의 일' 이란 보통 그렇듯 큰 탈이 없는 (것으로 예상되는) '집의 일상' 을 내내 생각할 수 없이 '일' 이라는 행정 처리에 더 앞장서야 하는 것이 그의 '책무' 이며, 나는 그것이 그이에게는 더욱 걸맞는 '가장' 의 상식적이고도 지극히 일상적인 행동이며 그것이야말로 보편적인 평범함이라는 것마저도 너무나도 잘 알면서도...



- 오늘도 늦어?

- 응. 오늘은 미뤄둔 저녁 회식도 있어서 늦어. 

- 그래... 일 해. 



그러면서도.... 계속적으로 대화를 '굳이' 꾸역꾸역 차츰차츰 어찌어찌 하든지간에 

나의 상태를 그이에게 전하고자 하려는, 가끔 내 안의 얄팍한 심보를 도무지 이해할 길을 찾을 수 없어서 가끔 당혹스러운 시간을 맞이한다. 그러나 또한 안다. 그 심보의 결말엔 '침묵' 이 있을 뿐이라는 걸. 그이와의 별 쓸모 없는 일상의 대화를 적절히 '절제' 하는 것이 그에게도 나에게도, 서로를 도와주는(?) 것 같다는 일방적인 결론을 지어내며. 한편으로 이렇게 무미건조한 대화의 시간이 쌓아지고 길어질수록, 아주 가끔, 그러니까 정말이지 아주 가끔... 이게 가족인지 아니면 가깝게 같이 사는 타인(?) 인 건지, 애써 정의를 내리려다 그냥 그 생각 조차 하지 않기로 해버렸다. 어느 순간부터 내내 그렇게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썩 반갑지는 않다. 그런 '나' 의 모습이...  



- 말을 재밌게 하셔서 좋네요. 

- 말을 잘 들어 주셔서 좋아요. 




우리에게 그 땐 두 사람 뿐이었으니까.  


그때 우린 그랬다. 그랬었다. 과거형이 되었다. 

내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고 하물며 아주 하찮은 일상의 '좋고 싫은 슬프고 기뻤던' 모든 것들마저 모두 그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그도 그랬을까. 비슷한 마음... 서로 확실한 '관심' 과 '호기심' 의 대상으로 별 의미 없는 이야기에도 궁금해하며 서로의 모르는 시간을 섞여버리게 만들고 싶었을 그 마음. '사랑' 이라는 '이야기의 탄생' 이 두 인물 사이에 번지기 시작했을 무렵엔 이미 대화의 시차 따위는 없었고 절제도 보이지 않았을 터였겠다. 그때는, 아이가 없었을, 미혼의, 우리 두 사람은, 그이와 나는... 




그녀가 필요했던 건 그의 확실한 사랑과,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으니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다는 그의 다독거림뿐이었다. 사랑과 인내가, 그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기만 했어도, 두 사람 모두를 마지막까지 도왔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들의 아이들이 태어나서 삶의 기회를 가졌을 것이고, 머리띠를 한 어린 소녀가 그의 사랑스러운 친구가 되었을까.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그렇게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말이다. 


- 체실 비치에서 - 




나는 요즘 그에게 '절제' 하는 연습을 한다.

말도 행동도 하물며 어떤 생각들도 과다한 분출 보다 절제를 하려 노력하는 나를 발견한다. 가장 많은 절제의 부분은 바로 '목소리' 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지 못하는 감정이 밀려올 때에도. 바로 토해내거나 하소연을 해버리고 싶은 그 순간에도. 손을 내밀면 들어줄 '그'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노릇이지만, 나의 돌변으로 인해 상처를 받거나 갑자기 당황하거나 그럼으로 인해서 그의 평온했던 감정 상태에 조금이라도 균열을 주는 대상으로 자리하고 싶진 않기에.... 



서로의 적당한 거리가 때론 두 사람을 건강하게 만들기도 하다는 걸.... 이제는 제법 알 것 같다. 



뭐 이러 저런 이유지만, 마음은 그렇다. 절제를 해야 한다는 생각 뿐이다. 

이것의 부작용은 눈물이 좀 더 많아진다거나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분명 상대는 '아이' 인데 마치 '어른' 처럼 대화를 하고 마는 정말 우습고 형편 없는 어른인 나를 마주하게 된다는 것... 어쩌면 일상 속 좌절이나 절망, 슬픔과 우울의 원천은 바로 그런 것들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오늘의 '절제' 로 인한 쓸쓸한 공허는 이제 꽤 익숙해졌다. 아이를 키우면서 우리는 서로의 어떤 것들을 묵시적 동의 하에 절제하게된 것들이 많아져간다는 걸, 나는 종종 깨닫는다. 



아이를 키우면서... 얻는 게 있다면 잃는 것도 그렇게 생기는 걸지 모른다는 걸 

그이도 나도 제법 잘 아는 '어른' 이 되어가는 것일까...그와는 다시 바다를 보러 가지 않아도, 이제는 정말 괜찮을 같은, 아니 오히려 둘이 가면 어색할 것이고 아이들과 가야 마음이 제법 놓일 것 같은, 현재 이 마음이 여전히 가끔 슬프고 아쉬울 뿐이다... 



그래도 고마운 건 세 사람의 뒷모습으로 인한 기쁨이 여전하다는 것이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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