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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May 26. 2020

너의 다정함이 나를 구할 테니까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로맹 가리, 자기 앞의 생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증거는, 일상 속 틈틈이 전해지고 있었다.

사람의 형상으로 두 발로 대지를 서서 걷는, 경이로운 그 순간을 여전히 기억한다. 내내 기저귀를 차고 천장을 보며 누워만 있던 두 사람은 어느새 옆으로 뒤집기를 했을 때, 그리고 또 어느새 손바닥으로 땅을 짚고 기어 다니고, 그러다가 결국 걷고 말하고 엄마 아빠를 선명히 말하던 그 순간들... 벅차서 혼자서 내내 아이를 키우면서 울었던 경이로운 성장의 기억들...


 

아이는 이렇게 앞을 향해 꼬박꼬박 빛나는 성장을 행하지만, 나는 어쩐지 자꾸만 퇴보하는 느낌이고

그건 아마 앞으로의 수년을 지내도 쉽게 지워지지 못할 것만 같다. 엄마 자격 상실이라 누군가 말한다면, 나는 어쩌면 1초의 망설임 없이 인정할 수 있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때때로 견딜 수 없는, 차오르는 감정의 끝에서는 결국 무자비한 공격적 발언과 쌀쌀맞은 목소리로 아이들을 대하는 나를 발견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랬고, 그리하여 나는 이렇듯 후회를 반복하고 만다. 지독한 인간의 본성을 이렇게 스스로 반증하고 만다.




미안해. 석양이 좋아진 이유는, 사실 하루가 빨리 지나가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요 근래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면 둘째는 첫째를 때리기 시작했다.

아이들 간의 장난이라 하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만 둘째의 모습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습관은 무섭고 그건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 장난이 습관이 되면 안 될 것 같았기에 나는 제지하려 했고 그럴수록 훈육은 쉽지 않고 실패를 계속해서 거듭하는 중이다. 스스로 미쳐버릴 정도로 에너지는 고갈되고 이것이 양육의 '첩첩산중'이라 했던가 싶어서 요즘 자주 멍 하거나 넋을 놓는 중이다.



여러모로 '엄마' 서는 여전히 서툴기 그지없는 인간이라 급기야 나는 돌변하기 일쑤다.

이유를 묻기 전 냉담하게 둘째를 대하며 반대로 맞고만 있는 첫째를 감싼다. '약한' 자에게 눈길이 먼저 가는 것도 인간의 본성인 걸까... 때리는 아이와 맞는 아이, 둘 중에 누가 약자이고 누가 강자일까. 아니 강약을 따지기 전에 내 뱃속으로 낳은 1분 차이의 아들 쌍둥이들이, 여전히 나는 버겁다. 여전히 무겁고 여전히 아프다. 여전히 나를 갈기갈기 없애고 뭉개 뜨려야 살려지는 것들이 존재한다. 분노는 끊김이 없으나 다만 인내력은 상승 중이다. 그러다 그 인내마저 없어지고 말면 나의 폭언은 시작되고 만다. 어쩔 도리 없다는 하찮고 비루한 핑계를 덧삼아... 이제 세상에 나온 지 몇 년이 채 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몹쓸 말들을 자꾸만 건네는 나를 뒤늦게 발견하고 언제나 죄스러움을 등에 지니며 산다. 나의 부족함을 증명하는, 죗값을 치르는 죄인 마냥....




- 엄마 나 싫어?

- 싫어서 안 보고 싶어. 지금처럼 자꾸 그러면.

- 엄마는 왜 나만 미워해

- 화를 낸다고 미워하는 건 아니야. 정음이가 자꾸 훈민이 괴롭히는 것 같아서 엄마는 그게 싫은 거야.

- 엄마는 훈민 이만 좋아하잖아. 나는 미워하니까 나한테 화내잖아.

- 네가 때려도 훈민이는 가만히 참다가 아프면 엄마한테 오잖아. 서로 제일 많이 놀고 이야기하고 웃는 사람이 누구야? 훈민이잖아. 친구이고 형이고 가족인 사람에게 자꾸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아프게 하면 안 돼. 아프게 하면 싫은 거야.

- 엄마 미워!

- 맘대로 할 거면 혼자 살아. 나가도 좋아.

- 미워!




꽃 같은 너희들이지만... 꽃을 잘 보지 못하고 만다...




그럼에도 정말 놀라운 건, 아이의 반응이다.

오랜만에 등원을 하며 서로 잠시 떨어지려 하던 순간, 둘째가 말을 건네며 다가와 앉긴다. 몇 분 전까지 냉담하고 차가운, 신경질적이고 난폭한 어른에게, 아이는 그럼에도 유하고 부드럽고 살가운 말을 건네고 마는 것이다. 이래서 아이들은 어른의 스승이라 했던가. 신이 있다면 나는 묻고 싶었다. 어째서 이런 나에게 이런 아이들이 다가와준 것인지를, 어째서 이런 못난 인간에게 이들을 키우게 하셨는지를...



- 엄마. 일찍 와. 보고 싶어.

- .... 보고 싶어?  

- 응. 일찍 와야 해

- 그래.... 미안해. 미안하다...



성난 사자가 되어 버리는 이런 못난 어른임에도 '엄마'라서 보고 싶은 걸까.

아니면 자신을 보호해 줄 보호자로서의 어른이 '엄마'라고 생각되는 그 아이의 순수한 본성 덕분에 보고 싶어 하는 걸까. 이유야 어찌 되었든 아이는 여전히 나를 보고 싶어 한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갑자기 다가와 앉기며 보고 싶다는 다정한 말을 건넨다. 이렇듯 이기적이고 때로 차갑고 때로 무자비한 발언을 거침없이 발사해버리는 엄마로서의 나는 아이 앞에서 자꾸만 무력함을 느끼고 만다. 아이의 순도 깊은 다정함과 순수한 사랑 앞에서... 그렇게 언제나 아이의 사랑 앞에서 어른은 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하니 나는 오늘도 아이보다 못한 어른이라는 생각을 쉬이 없애지 못하고 만다...




그렇지만 나는 내 엄마가 몸으로 벌어먹고 사는 여자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엄마를 만나기만 했더라면 무조건 사랑했을 것이다.

내가 존경하는 온다 아메데 씨처럼 좋은 포주가 되어 엄마를 돌봐주었을 것이다.


- 자기 앞의 생 -




너희가 나를 기억할 때, 반대로 내가 너희를 기억할 때, 우리들의 사랑은 다른 느낌일 것이다...




어쩌면 아이와 나, 우리들은 서로가 서로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 도 할 수 있는 관계로 만났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고 말았다. 사람이 사람을 기르고 살피는 시간에 있어서 상대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만약 아무것도 없다고 느낀다면, 그것만큼 비참하고 괴로운 생은 또 없을 것이기에. 완전하고 완벽한 사랑은 아닐지언정, (그런 게 있기나 할지) 서툴고 모자라고 모나고 여전히 슬픔이 기쁨보다 조금 더한 시간이어도....



나는 이제 아이들의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인간이 되어 가는 중인 것 같았다.

너의 다정함에 언제나 지고 마는, 여전히 때때로 무겁고 버거운 마음으로 이 시간을 통과하는 중이지만, 이 또한 지금 아니면 없을, 다시는 오지 않을지 모르는 시간이라 생각하니 또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젠가는 앉기지 않으려 하고 오히려 밀어낼지도 모르는, 다 큰 어른이 되어 반대로 내게 냉랭하고 차갑게 대할지도 모를 너희들이 다가올지언정....



그때는 네가 건넸던 다정함을 생각하며 어른의 차가움을 견딜지 모른다 생각하니.

한때 이렇게 나를 기다리고 바라봐주고 보고 싶다 말했었던 이 아이들과의 다정한 시간을 조금 더 부드럽게, 유하게 지내고 싶다는 바람만 앞선다. 지금의 우리가, 그때의 우리로 변하게 될 먼 훗날, 어리고 순수했던 너희의 시간을 영원히 그리워할지도 모를 테니까....



너의 다정함이 오랜 시간 나를 구할 테니까...




뒷모습이 자꾸 눈에 밟힐 것이다... 아마 평생 그럴 것이다...이번 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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