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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Sep 04. 2020

당신의 도시락  

낱말 하나가 삶의 모든 무게와 고통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그 말은 사랑이다. 


- 소포클레스 - 




배우자의 도시락을 준비하기 시작한 지 이제 5일이 지났다. 

도시락이라는 사소한 아이템은 나로 인해 어떤 감각의 부활을 선물하는 것만 같았다. 내일의 도시락 반찬을 궁리하는 시간만큼은, 그간 축적된 알 수 없는 환멸과 절망, 고통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는 듯한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각종 야채들의 활용으로 탄생되는 부침전들의 향연, 해산물과 고기류와 같은 식재료는 든든한 메인 지원군, 인공 조미료는 거의 쓰지 않는 터라 오롯이 올리브유와 참기름, 마늘과 표고버섯 가루, 육수 국물로 만들어 낸 맛간장과 고추장, 고춧가루와 매실진액에 의지한 채, 그렇게 그의 도시락은 탄생된다. 매일 새벽 5시부터. 



 - 코로나 때문에 회사에서 도시락 먹기 시작했다며. 어때?

- 그냥 밥이지... 그저 그래 

- 별로군. 

- 응.. 그 돈이면 다른 걸 사 먹는 게 낫겠는데 모르겠어. 그냥 먹는 거지 뭐. 

- 마땅히 먹을 데도 없다면서. 

- 그렇긴 해... 주변이 삭막하다..

- 그럼 내가 싸줄게.

- 됐어. 애들 보는 것도 피곤한데 무슨 사서 고생이야. 

- 원래 고생은 스스로 사서 하는 건데 모르시는군. 

- 편하실 대로 하시라. 절대 무리 마시고. 무리해서 화내는 게 더 무서우니까 ㅋㅋ

- 두고 보시라. 나 지금 의지 충만하다. 




완성품을 열었을 때의 당신을 생각하니 괜히 짠하고 기뻤다. 도시락, 이게 뭐라고 말이지..



우리의 처음, 그 감각의 상실감, 그로 인한 안타까움

어쩌면 그 감각들이 나로 인해 어떤 알 수 없는 본능을 일으켜 세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중심이 된 삶이 시작된 이후 언젠가부터 우리는 서로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도시락은 내게 더없이 중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우선순위로 올라오는 순간, 나는 짧지만 강렬한 설렘을 잊을 수 없다. 완성된 도시락의 형태를 본 당신의 표정을 상상하면서. 도시락, 이게 뭐라고 말이지. 



역시 모든 실행은 자발적 의지로 인해 유지된다. 

매일 중복되지 않은 채로 후식까지 곁들인 섬세한 도시락의 향연을 향한 나의 질주는 5일 내내 계속되었다. 냉장고를 털어 1일 차의 불고기와 콩나물, 미역 줄거리와 멸치볶음을 시작으로 각종 호박과 양파, 가지, 감자, 당근, 파프리카, 콩나물, 두부, 김치와 같은 기본 재료들을 벗 삼아 볶고 삶고 부치고 튀기고 조리는 시간은 정신없이 흐르다 어느새 뚝딱. 간단한 편지와 메모를 남기며 화룡점정을 찍는다. 도시락을 만드는 묘한 '성취감'에 새벽 댓바람부터 내내 도취된 채



별 거 아닌 집밥(?) 에, 어른 도시락통도 아닌 아이들의 미키마우스 도시락통이지만...  


당신은 알까. 내가 가장 사랑하는 단어는  바로 '정성'이라는 것을.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죽어간다, 

그래서 처음의 모습, 처음의 형태에서 변해간다. 변색이 되고 낡고 고장 나기도 한다. 시간이 흐르며 변하는 것들 속엔 사물뿐 아니라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을 향하는 마음도 마찬가지. 영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영원한 세계 속의 우리를 원한다면, 삶으로부터 배신당하기 쉽다는 것을.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기 시작하며 무슨 수로 그런 인생의 원리들을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변하는 과정 속에서도 변치 않고 싶은 어떤 그리움을 붙잡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 이거 뭐심. 대박. 

- 의지 충만하댔잖아. 기대하시라. 계속 업그레이드된다. 

- 무리는 마시라 

- 할 수 있을 때 하는 거야. 뭐든. 언제 스팸과 참치캔, 도시락 김으로 대체될지 모르심. 

- 뭐든 좋다! 못 하는 게 없네! 

- 못 하는 게 많고, 제일 못하는 건 육아! 주말엔 나 좀 살려주시라 

- 알겠다 ㅋㅋ




무슨 수로 그걸 설명할 수 있을까. 

도시락을 만드는 5일의 새벽이 하루 중 가장 기쁘고 기대되는 시간이 되어 버리고 만, 지금의 감정을 소중히 기억하며 나는 그저 바랐다. 우리가 하루 중 단 몇 시간밖에 함께 할 수 없는 채로, 서로의 자리에서 누군가들을 대하며 가끔은 우리가 아닌 다른 이들로 인해 시달리는 그 시간 속에서도. 그저 알 수만 있다면. 희미한 사랑의 감각은 잠들어 있을 뿐 깨어나면 언제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온기로 데워질 수 있다는 것을. 그저 알 수만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에둘러 표현한 도시락 속 편지 속에 담겨 있었다는 걸. 그가 알아챌 수 있기를. 



그의 무게를 덜어내려는 문장들을 쓰고 

그의 소박한 하루 설렘을 지키려는 맛을 만들며

우리는 그렇게, 자유롭게 해방되리라. 

짓눌리려는 세계로부터 서로를 지키려는 마음과 함께... 



석양, 그리고 바다는 언제 보게 될지 모르겠지만. 



#당신의 맛있는 하루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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