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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Sep 15. 2020

아름답고 쓸모없는 독서

서평 대신 편지를 쓸 수 밖에 없었던 이유...  

나는 네가 아니고 네가 될 수 없으므로.

나의 아픔을 누군가 알아주기를, 나 또한 타인의 아픔에 민감하기를 바라며.

그렇게 서로의 아픔에 닿으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길 바라며. 나는 오늘도 읽는다.


 - 아름답고 쓸모없는 독서 -





책을 받자마자 '드디어'라는 부사를 기어코 내뱉고 말았다.

출간 소식을 알게 되던 그날부터 예약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 시간 동안, 고작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을 시간이었음에도. 나는 왜 그토록 이 한 권의 책을 기다렸던 걸까.  아이들과 분주한 일상을 보내면서도 문득, 혼자 남겨진 시간이면 다른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문득 그리고 또 문득. 왜 그랬는지 이젠 알 것만 같다. 책을 다 읽고 난 이제서야... 책 속에 책이 있는, 그리고 그 책과 책이 묘한 끈으로 연결되어 새로운 이야기와 해석으로 재탄생되는, 그야말로 책들의 잔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책을 왜 그토록 기다렸는지를.



나를 조금이라도 아는 누군가들 중, 어쩌면 가장 유일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읽고 쓰는 세계에서 우연히 만난, 이토록 내밀하고 섬세한 사색력과 문장력을 지닌 분이 계실까. 솔직히 그녀를 제외하고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깊이 빠져들 줄 알면서도, 아프게 읽을 줄 알면서도, 고통을 삭히기 위함인 줄 알면서도, 그렇게 책과 글의 심연 속으로 풍덩 뛰어들 줄 아는 사람...  글에 대한 기대는 언제나 어긋나기는커녕 '역시 내 눈이 맞았어'라는 일종의 유레카를 선사했던 이 분의 첫 책인 '아름답고 쓸모없는 독서'를 읽고 나니, 형용될 수 없는 기쁨과 고마움이 밀려온다. 그리고... 포기를 감히 선언한다. 이 책의 서평 쓰기를. 대신...



구구절절 쏟아 나오는 단어와 문장, 생각들이 이상하게 물밀듯 차오르는 마음이 앞섰기에.

무례할 것을 알면서도 그녀에게 서평 대신 서평을 뛰어넘어  '편지'를 써 보려 한다. 지금부터...


아름답고 쓸모없는 독서, 김성민, 다반, 2020.09.10.



저녁 7시의 어디쯤, 빛이 집 안으로 들어왔고, 이 모습처럼 책은 아름다웠다.




'책을 쓸 만한 자격을 갖추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쓰기 때문에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까.

에필로그에서 '쓰면서 끊이지 않았던 자격에 대한 의심과 불안'을 행한다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부디 그 생각에 마침표, 아니 쉼표를 주어도 충분히 좋다고 감히 생각하는 저는..... 기다렸습니다.



 '작가님'이라고 선명하게 부를 날을. 오늘처럼 말이죠.

당신의 문장을 처음 접하던 날. 블로그에서 한 편의 서평 글을 읽던 그날, 그 이후로 몰래 생각을 훔쳐보듯 숨죽이며 단숨에 몰아읽던 나날들. 당신의 글들이, 책에 대한 생각들이, 일상 글들이, 원고의 한 부분들로 엮이는 그날이 있을 것이라는걸, 어쩌면 저는 직관적으로 끌렸던 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제 자신의 무력한 무능을 깨달았습니다.



고백하자면, 제 글과 문장은 한없이 빈약하고 빈곤하기 그지없다는 것을 제가 알았습니다...

당신의 깊은 사색력과 문장력, 그것들을 책에서 현실의 '자신'으로 끌어당겨오는 그 대단한 힘에 저는, 제 문장은, 제 단어들은, 제 글들은, 제 누추한 책들은 모두 중력을 잃어버린 채 공중에 붕 떠 있는 기분이었던 게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독서에 깊이 빠지고 나서 일상으로 돌아오면 현실이 낯설게 느껴진다.

그런 감각이 현실을 다르고 새롭게 보게 한다. 이전과 조금 다른 내가 된다.

나를 변화시키는 독서란 그런 것이다.  p.10


나의 이야기를 버리지 않고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과정은 상한 부분을 도려내 살구를 병에 담고 설탕을 넣어 고정시키는 일과 닮았다. 어지러이 흩어져 있던 살구 더미를 잼으로 만들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듯, 이야기는 이제 작가를 벗어나 독자에게 흘러간다. 솔닛은 이야기를 통해 어두운 시간을 건너올 수 있었다며, 이야기의 힘을 증언한다. p.114




이렇게 많이 접어야 했던 이유는 '마음' 과 '기억' 만이 알 테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시작되어 박완서와 나희덕, 토지의 박경리 선생님, 입센의 인형의 집, 레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 몽실 언니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도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등등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중간중간 영화 - 생일 -까지 엮어서 이야기를 건네주시는 다채로움까지!) 책을 읽기 시작하며 제가 계속 가지고 있던 어떤 질문들에 조금은 답을 얻은 기분이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소설 속 주인공은 모두 결핍을 지녔다. 빨강 머리 앤은 생후 3개월에 부모를 잃었고 토지의 서희는 엄마 없이 자랐다. 몽실 언니의 몽실은 결핍 그 자체였다. 작가들도 전쟁을 겪거나 가족을 잃거나 한눈에 보아도 감사할 조건보다 감사하지 않을 조건이 더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핍 속에서 자신만의 삶의 비단을 짰다. 결핍을 원동력으로 삼는 삶이었다.


p.78, 결핍은 예술이 된다




당신께 문학은, 고전은, 인문은, 철학은 그리고 시는, 아울러 글쓰기는, 어떤 의미였는지...

어쩌면 당신도 나와 같을지, 혹은 내가 겪었던, 겪는, 아픔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하고 들어줄 수 있는 '귀' 가 있는 읽고 쓰는 동지일지. 감히도 바랐었나 봅니다. 평행선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현실적이고도 개별적일 생업을 유지하면서도. 서로 한 번 만나지 못한 연 이더라도... 글로 책으로 계속 연결되고 싶다는 마음. 이렇게 유치하고 부끄럽고도 무례한 생각을 혼자 잘도 해 댔던 제가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책을 통해 아주 조금은 제 생각에 어떤 끈끈한 신뢰를 느껴서인가 봅니다. 제가 생각하는 문학, 그리고 인본주의적 독서... 조금은 흡사하게 나란히 읽고 쓰는 문우(文友)  같다 생각했기 때문일지도요.




나는 문학을 읽으며 나와 그들의 상실을 애도하고 기억한다. 나의 읽기와 쓰기는 애도에서 비롯되며 잃어버린 대상을 향한 끊임없는 그리움의 표현이자 사랑이다. 데리다의 말처럼 '위로할 길이 없어 슬픔에 마침표를 찍으려 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애도의 윤리' 일 것이다. p.188


나는 울고 있는 아이의 아픔에 건너갈 수가 없었다. 아이와 나를 이어주던 탯줄이 끊어지는 순간 우리 사이에는 촌수가 생겨났고 그렇게 우리는 개별적인 존재가 되었다. 아이의 아픔에 동참할 수가 없었다. 아이가 겪는 고통과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아픔 사이의 거리는 아득했다. 다행히 아이는 일주일 입원 후 퇴원했다. 지금 건강히 잘 자라고 있는 아이를 보면 그날 일이 거짓말처럼 느껴지지만 타인의 아픔에 도달할 수 없다는 슬픔을 내 몸에 문신처럼 새긴 순간이었다.  p.194



@ Interior with a woman reading



일방적으로 읽는 입장이었지만 저는 어쩐지 책 속의 또 다른 책 소개와 그 책 이야기를 읽자니

일종의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었습니다. 특히 '인형의 집' 과 한나 아렌트의 이야기를 거론해 주셨을 때는 더더욱 말이죠... 그러다 다시 질문에 빠지고 맙니다. 당신을 이 책으로 이끌게 만드는 트리거는 무엇이었을지를. 그것이 자유를 위함이든, 애도를 위함이든, 배우기 위함이든, 이해를 하기 위함이든, 도피하기 위한 수단이었든 어떤 것이었든... 저는 감히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당신의 '쓸모없음의 쓸모' 가 얼마나 아름답고 그래서 얼마나 현재의 삶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인지를.  




말할 수 없는 경험이 언어로 번역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한다. 그중 하나는 들어주는 대상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 같지만, 말해지지 않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조금 더 섬세한 듣기가 요구된다. 판단하거나 해석을 배제한 경청이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경험은 들을 수 있는 귀(대상) 를 만날 때 비로소 이야기가 될 수 있다.  p. 124-5


오늘의 글이 내일의 나를 설명해 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쓰려는 나, 잊히지 않는 기억이 되기 위한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소설가 필립 로스와 허수경 시인의 기억이 내 앞에 있다. 그들이 세상을 떠나자 나는 비로소 그들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 갔다. p. 211




다 읽고 첫 원고인 '혼자 책 읽는 시간'으로 돌아가 한참동안 그 그림을 보았습니다.

덴마크 화가 피터 일스테드의 '촛불 옆에서 책 읽는 여인'이라던 그 그림을요.  '그림 속 여인이 되고 싶었다'라고 했던 작가님이 연상이 되니, 제가 책을 다 읽고도 책갈피를 해 둔 문장들을 한 번 더 읽었던 그 시간은 왜 그리도 타이밍 좋게 TPO 가 적절한지요. 혼자라는 환경설정, 해 질 녘의 시간, 음악, 그리고 책... 말입니다. 그러니 '아름답고 쓸모없는 독서'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 Peter Vilhelm Ilsted, Woman Sewing Outside Liselund




'아름답고 쓸모없는 독서'를 향한 자조적 연서였던, 이 글에 부디 너그러운 용서의 마음 보내 주시길.

그리고 다시 한번... 그동안의 글들이 더 아름다운 문장의 조합들로 엮여져 이렇듯 '책'이라는 선물로 다가와 주었음에. 부족한 감사를 이렇게 글로 대신 전합니다.



아름다운 '성민 작가님'의 첫 책

제게는 문학 같기도, 엄마의 시로 읽히기도, 그러다 결국, 저는 읽었습니다.

한 여성의 조용하게 뜨겁고 투명한 이야기들의 모음을. '아름답고 쓸모없는 독서'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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