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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Oct 20. 2020

우리의 내일

이보게, 로비노, 인생에 해결책이란 없어. 

앞으로 나아가는 힘뿐. 그 힘을 만들어내면 해결책은 뒤따라온다네.


- 야간 비행, 생텍쥐페리 -

 



편지지는 그를 닮아 있는 것 같았다. 

약간 두꺼운 재질의, 반듯한 가로열 줄이 그어져 있는 파란색 편지지. 그 위엔 폰트 10 정도의 고딕체를 연상케 하는 글씨는 총 25줄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양쪽 정렬로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봉투는 없이 3등분으로 접은 파란색 편지를, 나는 받은 지 이틀이 지난 이후에나 읽었다. 몇 년 전부터 나는 그의 편지를 받은 이후에 바로 읽지 않고 며칠을 묵혀 두곤 한다. 그것은 마치 숙성을 바라는 사람 같기만 하다. 이상한 의식일 수 있으나, 그의 편지를 손에 들었을 땐 바로 읽고 싶지가 않아진다. 혼자 남겨졌을 때, 마음껏 울어도 괜찮은 진정한 혼자의 시간이 생길 때. 그때가 가장 적합한 타이밍라고 생각해서일지도 모를 일이다. 



꽉 찬 9년을 지나 10주년을 바라보는 부부의 시간은 한 문장으로 압축되어 있었다. 

'참 싸우기도 많이 하고 서로 씩씩거렸지만 요즘은 나름 서로에게 적응하여 평화롭게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것 같다' 고 말하기 시작한 그의 편지는 우리들의 '어제'에 대한 시간이 예의 바르게 요약되어 있었다. 계속 읽어 내릴수록 갑자기 코끗이 시리기 시작했고 나는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사람처럼 왼손에 쥐고 있는 손수건을 힘껏 눌러보았다.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동시에 과거의 시간이 떠오르지 않도록. 되도록 힘껏..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다 보니 어느새 쌓인다. 편지도, 기억도. 



오늘보다는 '내일'을 사는 우리들이었다. 

아이 없는 두 사람의 신혼은 그랬다. 빚이 제거된 완전한 주거 공간과 언젠가 생기게 될 아이들에 대한 상상, 게다가 '퇴직' 이라든가 '노후'라는 단어를 좀 일찍 품고 살기 시작한 나로서는 그것들이 암시하는 막연한 불안함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오늘보다는 내일이 우선이었다. 누군가들에겐 흔해진(?) 여행이라든지 화려한 공간에서의 고급스러운 외식은 우리 부부의 일상에서 많이 동떨어져 있었다. 대신 하찮게 보이는 일상의 시간들을 여행 삼는다는(?) 생각이 더 강했던 것 같다. 




누군가에겐 당연한 것이 누군가들에겐 당연하지 않고 썩 관심이 없는 대상으로 밀려나듯이. 

어쩌면 돌이켜 생각하니 무자녀 기혼이었을 때의 시간은 의식적인 어떤 분투와 노력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경제활동인구로서 서로가 사회적 노동력이 뒷받침될 때 되도록 무너지지 않을 강하고 건강한 사유 재산 증식과 더불어 2인에서 발전된 4인 가족 만들기를 생각하는 게 우선이었고 그 목표가 너무나도 선명했기 때문이었을까. 매번 도시락을 싸가지고 열심히 계절을 즐기듯 이곳저곳의 공원을 돌아다니며 훗날 다시 짓고 싶은 집의 조경 공간을 상상해보며, 도심 혹은 외곽 지역의 잘 지어진 건축물을 보러 다니기도 했던, 나름 둘 만의 의미 있는 일상 속 여행들... 기타 밀린 독서나 회사 잔업을 처리하기 위해 한 사람은 노트북을, 한 사람은 책을 펼치곤 했던 주말, 단출한 집밥을 해 먹으면서 나눴던 끊이지 않은 대화들... 일방적인 한 사람의 재잘거림을 곧잘 들어주었던 당신... 시리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문장조차도 들어주었던 당신의 귀... 




지쳤을 석양의 시간도,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놓치지 않았기에... 다시 밝은 석양을 맞이할 수도 있는 거겠지. 




여행이나 맛집 탐방, 힙하다는 카페 투어와 같은 것들은 전부 '내일'로 밀리는 게 당연했다. 

나에게는 언제나 '내일' 이 우선이었고 그런 걸 마냥 즐기고만 살기엔 뭐랄까 우리의 그릇은 부족하다 생각했으니까. 반대로 그는 내심 '오늘'을 잘 살기를 바랐다. 그러나 자주 양보(?) 하기 일쑤였던 지난 시간이, 그래서 서로 부딪치며 상처를 주고받기도 했던 그의 마음은 편지 속에서 상당수 압축되어 친절하게 묘사되어 있었으니. 나는 읽는 내내 어딘지 모르게 큰 실수를 저지르며 살았던 건 아닐까 싶은 자괴감으로 인해, 미안해서... 고집스러웠고 이기적인 내가 한없이 부끄러워서 자꾸만 눈에 물이 고이다 기어코 흐르기 시작한 건 너무나도 담담히 적혀 있었던 그의 문장과 만났을 때였다. 



- 그 어느 때보다 마음 편하고 행복한 지금인 건 다 혜원이와 우리 둥이 씨들 덕이 아닐까. 조만간 아니 좀 약간 먼 미래에 캘리포니아 해변을 같이 걸으며 지금 이 순간을 즐겁게 회상하거나 맑고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큰 마당 안락의자에 우리 네 명이 같이 앉아서 대화하고 있을 날이 올 거라 생각하니, 지금의 직장이 바로 실리콘벨리인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해. 다 사람 마음먹기 나름인 듯. 



그곳이 아니더라도, 사실 어디서든 이제는 '우리' 만 있으면 괜찮을 것도 같다. '우리'는 영원하진 않으니까. 더욱 더...



오늘보다는 내일을 사는 게 이젠 너무나도 익숙한 당신은 너무 많은 것들을 양보하고 살아준 것 같아서. 

그래서 눈에서 자꾸만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던 걸지도 모른다. 당신의 양보들이 너무 아프게 다가와서. 내가 너무 삭막하고 모질게, 그 예뻤던 우리 두 사람만이 공존했던 시간을 쓸쓸하게 채운 것만 같아서. 내게 맞춰주려 노력했던 당신을 때로 잊으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파괴해버리기도 했던 어리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아이들의 말을 빌리자면 그야말로 '엉터리 같은 마음'으로 가득 찼었던 시간들이 자꾸만 떠올라서... 



그는 자신이 노년에 이를 때까지, 인생을 감미롭게 해 줄 모든 것들을 

'시간이 생기면'이라는 전제로 조금씩 미뤄왔음을 깨달았다. 


- 야간 비행 中 - 




'담담하고 의연하게 이야기하는 요즘의 나는 기특하다' 고 했던 당신이

그런 당신의 '내일'을 위한 오늘의 수고스러움들이 이상하게 아파서.... 그의 도시락 위에 매번 포스티잇으로 나는 과거의 미안함을 대신 상쇄하려는 어떤 노력을 하는 것만 같다. 그것은 마치 '좋은 오늘 지내야 해'라는 반복되는 끝 문장이 대신 전해주기를 바라는 것만 같고, 혹은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까 그만큼 더 웃고 힘내시라'는 툭 하고 건네는 문장이 정말 당신에게 '힘'을 주기를 바라는 마음과 같다. 



아이가 있는 부부로 여전히 그와 나는 일정 부분 오늘보다는 내일을 사는 사람으로 살아갈 테지만 

나는 바란다. 당신의 오늘들이 그래도 알 수 없을 내일보다는 이젠 조금 더 순하고 아름답게 흘러가기를. 당신의 오늘이 내일로 인해 자주 양보되지 않기를... 부디 당신의 평온한 미소가 잘 지켜지는 오늘이기를. 내일을 위해 분투하며 사느라 때로 고생하는 당신의 '오늘'을 내가 지켜줄 수 있는 힘이 여전히 남아 있기를...



우리의 내일 그 언젠가, 서로의 빈자리를 발견했을 때 너무 많이 쓸쓸해하지 않기를. 

어제와 오늘이라는 두 사람의 시간은, 바로 우리의 '내일'을 향함들이 만들어 낸 소중한 기억일 테니까.




기억했던 어제와 오늘들이, 우리의 내일을 만들어내듯이...



# 일 년에 한 번, 작가가 되는 당신의 편지는 나를 매번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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