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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Oct 15. 2020

어느 후진 날  

삶의 기본 값은 행복이 아니다. 나는 항상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 또한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이자 최대한은 삶으로부터 성장하는 일이다. 


- 구체적 사랑 - 




사랑받기를 원한다는 건 잘못된 것일까.

이 세계의 규칙 중 기혼남녀가 기본적으로 인식해야 하는 법칙 중 하나는 바로 이런 것 같았다. 일방적으로 기대거나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 설령 서로가 사이가 좋아 '보이는' 관계라 할지언정 그리 쉽게 기대하거나 상상해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포함해서. 가족이라는 '단체'의 평화로운 존속 유지를 위한다면 더군다나. 저녁 식탁의 메인을 장식할 전복과 새우와 기타 야채들과 같은 식재료 손질과 몇 가지 밑반찬을 다 만들고 그제야 식은 보이차 한 잔을 들이켜 마시며 나는 생각했다. 애초에 그런 '기대'를 '부부' 간에 바라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그러니 내가 예의 없는 것이었다고. 그리곤 무심코 쳐다본 달력에 그려진 동그라미를 쳐다보며 웃었다. '결혼기념일'이라 쓰여 있던 달력이 나를 바라보고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오후 반차를 내겠다던 그의 말을 믿는 건 잘못된 건 아니었으리라. 

원래 부부 사이는 '신의'라고 생각하니까. 다만 그 신의에 조금씩 서로 예상치 못하는 균열과 틈이 생기는 건 바로 서로, 혹은 일방적으로 무언가에 대한 기대 때문일지 모른다. 애초에 기다리거나 기대는 것을 배제한다면 좀 더 아프지 않게 서로를 믿을 수 있는 힘도 생기는 것일까. 오후 2시가 다 돼서야 회사에서 출발한다는 메시지를 핸드폰 알림을 통해 보았을 때. 갑자기 눈에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조금씩 그러나 금세 펑펑. 눈물이 샘솟는 건 언제나 한순간이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그건 쉬이 변하지 않아서 안타깝다. 너무 속상하거나 너무 슬프면 눈물도 나지 않는다 하던데. 그렇다면 나의 눈물은 여전히 '너무'의 범주에 속하는 건 아닌 것이다. 나약해서 흘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직도 무뎌지지 않아서. 아직도 딱딱해지지 못해서. 아직도 한참 모자라서. 



아직도 별 거 아닌 것들에 아파하고 울고 그래서. 그런데 별 거 아닌 것들은 정말 별 것들이 아닌가. 



3시가 되니 문 소리가 들렸다. 

눈이 빨개진 채 소파에서 책을 읽던 나를 보고 말을 건네는 그이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금세 눈물범벅이 되어 아무 말이나 내뱉어 버릴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에. 애써 외면하려 했다. 그러나 마음은 머리를 이겨버렸다. 



-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왜 울었어? 

-....

- 왜 그래? 

-....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정말...? 

- 응 정말 몰라. 왜 그래? 말을 해야 알지.

-.... 왜 우냐고 묻는 당신이 순간 뻔뻔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몰라서 묻는다 하니 그래서 말하는 거니까 지금부터 험한 소리 들어도 내 탓하지 마. 당신이 먼저 말하라고 시작해서 나는 지금부터 딱 5분간만 그때처럼 미친년이 될 거니까. 애들한테 화내는 나는 내가 죽도록 미운데, 사실은 당신한테 화를 내고 있는 나는 나 스스로도 죽도록 미워. 그래서 이렇게 금세 미친년이 돼. 

-... 왜 그래. 난데없이. 회의 끝나자마자 온 사람한테. 




꾹꾹 누르고 있었던 마음은 결국 터져버렸다. 

그렇지만 예전과는 다른 무늬를 띄고 있다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침착하려 했고 말을 할 때 눈물은 되도록 삼켰으며, 감정이 이성을 이기지 않기를 애쓰고 있었다. 그래서 오래가지 않을 감정으로까지 순화될 것이라는 걸 예감했고 그 예감은 맞았다. 그리고 느꼈다. 내가 살면서 많이 변해간다는 것을. 그러나 여전히 변하지 않은 어리석은 면이 있다는 것도. 그 구질구질하고 후진 면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 마저도 



- 나를 당신이 대하는 회사 사람으로만 상대해도 낫겠어. 프로젝트할 때도 데드라인. 납기라는 게 있어. 납기가 지연되는 게 예상되면 흔히 인폼을 해. 나보다 경력 많은 자기가 더 잘 알 텐데. 최소한 직장에서 일머리 있는 인간들은 그렇게 일을 해. 그게 바로 기본이고 태도야. 상대를 불안하거나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태도. 나는 지금, 아니 오늘 당신의 태도에서 화가 나. 아주 몹시. 내가 아주 많은 걸 바랐니? 

-....


- 지금 내가 바라는 게 고작 순댓국이라서 더 화가 나. 루이비통을 사달랬어? 마이바흐나 집을 사달랬어? 언제나 연애할 때도 단 하나. 편지랑 시간. 그거뿐이었어. 애들 낳고 생지옥 같은 다둥이 육아. 초반에 죽고 싶을 만큼 우울할 때 당신이 이해해주지 못해도 헤어지지 않고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어. 그런데 그럴수록 우리 사이에 타이밍은 매번 서로 필요할 때마다 어긋났고 9년이 흘러도 꼭 이런 날도 마찬가지야. 서운함이 쌓일 때마다 자기가 나를 대하는 태도를 생각하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큰 변함이 없어. 그렇게 느껴서 지금 이렇게 화가 나. 기다리는 나는 언제나 뭐였어? 차라리 오늘 휴가를 낸다 말하지 말던가. 늦을 게 예상되면 늦는다고. 미리 말했으면 기다리지도 기대하지도 않았을 거야. 기대를 한 내가! 여전히 기대를 하려는 내가! 사실은 그런 내가 나한테 화가 나. 기대를 자꾸만 해서! 기대를 욕심을 마음을 접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내가 너무 바닥같이 후져서! 


-... 미안하다. 지금 가자. 점심도 못 먹었어 나. 

-.... 됐어. 그만하자. 저녁 일찍 먹으면 돼. 집 밥. 당신 좋아하는 거. 내 법적 보호자인 당신이 좋아하는 걸 해 주기로 결심했고 나는 그걸 지키려고 노력 중이야. 지금처럼 지랄하는 이 모습은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걸 아니까, 이제 말은 그만 할 거야. 예전 처럼 지랄. 오래 가지 않으니까 걱정마. 단 똑똑히 기억해둬. 당신 아내. 내 생기는 조용히 죽어갈거야. 이런 기억이 쌓일수록 마음은 굳어질테니까. 

- 무섭게 왜 그래. 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았다. 

-... 아빠로 충분해. 오늘 하원 도와주고 저녁 시간 조금 더 여유 있게 해 준 거. 더 안 바라. 됐어. 



아직도 나는 동화적인 환상, 어린 시절부터 뇌리에 새겨온 신념, 즉 언젠가 완벽한 사람이 나타나서 나를 사로잡아 모든 것이 분명하고 밝고 모호함 따위는 없는 미래로 데려갈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기가 끔찍이 어렵다. 하지만 나도 인간일 뿐인 것을 어쩌겠는가. 나는 사랑받고 싶다. 한없이 한없이 한없이. 


- 캐럴라인 냅, p.81, 명랑한 은둔자 中




급하게 퍼지고 마는 감정을 더 누르는 연습이 필요하지 싶었다... 



독설을 뿜고 후회했다. 결혼기념일은 별 게 아닌 하루의 의미부여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왜 그랬을까. 

그 하루만큼은 깊은 수준의 친밀감이나 사랑의 증명들을 일상 속에서 주고받고 싶었던 건지 모른다. 그렇게 속상했던 것을 보면.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는 안다. 그이도 나도, 현재의 일상을 너무나 열심히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내느라 가끔 서럽거나 속상해질 뿐이라고. 



현재의 환경설정값은 그야말로 '현실 부부' 임을 안다.

여기저기 밥풀과 아이들의 잔반들이 식탁 위에 널브러져 있기 일쑤이고, 바닥에는 과자 부스러기와 물감놀이의 잔재들이 뒤엉켜져 그로테스크를 만들어낸다. 오후 반차를 냈어도 오전 회의가 늦게 끝나는 바람에 휴가가 무색할 만큼 일터에서 분투력을 발휘해야 한다. 고장 난 화장실 변기를 고치면서도 등에 달라붙는 5세 아들 쌍둥이들의 장난을 웃으며 받아쳐내야 하는 아빠의 삶과, 저녁 설거지를 하다가 칼 끝에 손을 베어 피가 흘러도 대수롭지 않게 설거지를 마저 마치고 반창고를 말없이 발라내는, 손에서는 물질이 끊이지 않는 엄마의 삶이 존재한다. 그래서 더욱 자연스러운 감정은 다름 아닌 서로의 공로와 노력과 수고를 치하해주며 그렇게 사랑 '받고' 싶은 마음.... 인간이라면 드는 자연스러운 감정일지도 모를 일이다. 


성실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내다가, 가끔 슬퍼지는 두 사람일지 모르지만

스스로 괜한 자격지심에 후져서 도망치고 싶은 어느 후진 날이 올 지언정 

나는 기억하기로 했다. 이름을 불렀을 때 대답을 해 주는 이의 현존함에 대해서.... 



석양과 새벽을 같이 바라보는 시간이, 이렇게 길어지니.... 난 그 시간의 힘을 더 믿어보려 해. 아이들도 자라겠지. 그리고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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