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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Oct 24. 2020

자본주의에서 전업주부로 산다는 것

에필로그...

그러니까 그 밤에 내가 실감한 건 너와의 간극이었고 격차였다.


- 너라는 생활 -




'희망'이라는 허울 좋은 외피를 걸친 '퇴사자'로서, 공식적 실업급여 종료가 한 달이 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동안 가장 크고 또한 뚜렷한 변화가 있었다면 그것은 나의 정체성일지도 모른다. 사회적 '역할'로 정의되는 것이든, 스스로 분류하는 어떤 업적 카테고리든. 나는 어느새 워킹맘에서 전업주부로 살아보고 있다. 그렇다. 워킹맘의 표류가 전업주부가 되었다는 중간 결말에 도착하고 말았다는 것...



누구는 내게 말했다. 넌 '노는' 주부지만 동시에 '작가'가 아니냐고. 그러니 노는 게 아니라고.

나는 당황함과 동시에 표정에 어떤 분노가 일어나는 걸 겨우 감췄다. 안부를 건네는 그 옛 동료의 말에 난색을 표하진 않았다. 다만 생각하며 인내하려 했다. 그저 당신과 내 관점이, 우리가 '논다'라는 것이나 '일' 이라든지 '작가'라는 것을 정의하는 서로의 가치관이 다를 뿐이라는 것을, 당신이 주부를 바라보는 그 시야의 간극이 있을 뿐이라고. 게다가 내게 '작가'라는 업적 위치야말로 그렇게 '함부로, 쉽게' 되는 자리는 결코 아니라는 것 또한. (개나 소나 작가 한다지만 개나 소나 다 좋은 글을 쓰는 작가인 건 아니니까)  책은 몇 권 운 좋게 냈지만 그 '작가'라는 직업적 분류는 여전히 '공적'으로 드러내기에 보기'만' 좋은 겉치레 같기만 해서 되도록 '나는 작가다'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말하지 않고 산다. 다만 그 대화 끝에 웃으며 이 문장을 건넸다. 나는 '주부'라고. 그렇지만 놀지 않는다고. 나는 '노동자'라고. 현재 5세 아들 쌍둥이를 '전적으로 전업' 삼아 돌보는 '엄마이며 동시에 댁 내 모든 안위를 돌보는 주부' 로서 노동을 한다고. 날카롭고 단호하게.



그 누구도 놀지는 않는다. 누군가를  품고 앉고 생각하고 또 나아간다. 어제에서 오늘로, 오늘에서 내일로.



생활 패턴을 냉정히 살펴보면 그게 맞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 주부로서의 노동을 더 한다.

작가로서 완전한 '일'을 하는 시간보다 (이를테면 글쓰기, 사색, 독서, 기타 경험치를 쌓으려는 어떤 '개인' 이 중점이 된 활동 등등) '주부' 로서의 시간이 나의 우선순위와 대부분의 '노동' 으로서의 시간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더 큰 변화는, 내가 이젠 후자로서의 역할에 반감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맙소사. 그렇다. 정말이지 '맙소사' 다. 이 감탄사는 나로서는 꽤 큰 의미를 지닌다. 퇴사 전후의 극도의 불안과 불편함, 그로 인해 약을 오용한 사람과도 같이 부작용처럼 동반되는 우울감을 비롯한 어떤 일상의 극한 분노들이 조금씩 감퇴하고 있다는 증거 아닌가.



경제학에서 정의되는 '자본'으로 환산될 수 없는 노동을 일삼으며 경제인구에서 배제된 '전업주부'.

그러나 나는 어딘지 희미하게나마 알 것만 같다. '주부'라는 이들의 노동 없이는 이 사회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1인 가구도 '주부' 로서의 기능 없이 '생존' 이 불가한 것처럼. 경제학이라는 분야에서조차 정의되못한 (마르크스, 당신은 '자본론'에서 애당초 이런 '노동'을 왜 편입시키지 못한 건가요? 못한 건가요 하지 않은 건가요!) '가족'이라는 단체 속 주부의 노동은 애초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리고 경제학에서 정의되는 단체에서 배제되어 설명되고 있는 게 아닌가 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나는 이제 워킹맘에서 전업주부로서의 삶이 그리 고통스럽거나 슬프진 않은 것 같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말한 상실의 5단계 중 마지막 단계인 '수용'에 다다른 걸지도 모를 일이다만.



받아들이니 편안해지는 것들이 정말 있더라. 내겐 '주부' 의 삶이 그렇다... 이게 은근 재미를 붙이니 또 할만....(하다....는...)




공적 단체의 이윤 창출이 메인인 곳의 노동은  '아웃' 됐지만, 나로선 노동을 삶에서 뺄 수 없다는 걸 안다.

방향이 잠시 바뀌었을 뿐. '집'이라는 거주 공간에서 '가족 구성원'이라는 사적 단체의 돌봄과 안위를 책임지며 부단한 노력과 부산스러운 매일을 챙기는 '노동자'가 되었다는 생각. 어쩌면 자기 합리화 일지 모르나,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업주부로 살면서 종종 느끼고 마는 어떤 불편한 생각들을, 게다가 간혹 마주하는 '비혼' 이자 같은 젠더의 목소리마저도 주부를 대상으로 하는 어떤 '혐오적' 발언을 간접적으로 듣고 마노라면. 이해한다. 오롯이 개인의 몸과 영혼'만' 이 우선인, 그 개인이 지닌 한계에 대해서도. 이 사회에는 다양한 계층의 인간이 있고 그런 인간의 다양한 면을 해석하는 '한계'는 결국 자신이 보고 믿고 또 경험한 딱 그 세계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안일함과 편협함에서 나온다는 걸. 아니까... 이해한다.



그리하여 나는 '노동자'라는 생각을 해서라도 어떤 분에 찬 해묵은 감정을 해소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가족의 의식주를 챙기는 것이, 더불어 그 가족 구성원들이 사회에 나가 '돈'이라는 것을 벌어들이는 그들의 경제적 인간으로서 자신의 구실을 제대로 행하는 데 물심양면 조력하는 그림자 노동자들. 이는 마치 백오피스에서 보이지 않게 회사가 돌아가는 모든 잔업들의 서포팅을 조용히 하는 직장인의 기분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렇지만 결국 '돈'을 생각하면 국민총생산을 측정하는 데 배제된, 공식적인 '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전업주부이긴 하지만. 그렇지만.




아이들의 인격이 형성되는 이 시기의 일들은 어쩌면 가장 큰 생의 '비즈니스' 가 아닌가 싶고...그렇다.



나는 썩 괜찮다.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 역할이야말로 어쩌면 자본주의에 일종의 '반기'를 드는 가히 혁명적인 노동일 수도 있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말기에. 계산이 통하지 않는 노동 말이다. 나의 온 마음과 에너지를 완전히 내가 아닌 타자에게 내어 주는 일. 내가 아닌 너에게 모든 나를 받치는 일. 그것도 아무 대가 없이.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야말로 아무 물질적 대가 없이 시간과 베풂의 미학을 풀어 버리는 이 엄청난 노동에 대해서. 물론 가끔 가다 찾아오는 여러 피폐한 부작용이 수시로 마음으로 파고들어버리기도 하지만. '너'라는 타자의 생활이 잘 유지되는 것에 완전한 조력을 하는 이 '전업주부' 로서의 노동은 그 어떤 자본주의의 노동 형태보다도 상위에 서야 하는 게 아닌가. 아닌... 가....(아니면 말고)



내 것이었고 내 것이 될 수 있었던 어떤 추억에 대해.

관계를 망가뜨린 것에 대해. 내가 깨부수지 않아도 좋았을 어떤 신뢰와 믿음에 대해.

시간이 더 지나면 지금 이 순간도 불쾌한 기억으로 남게 될지 몰랐다. 그래서 몇 달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나면 내 안의 무언가가 이날의 기억을 말끔히 지워버릴지도 몰랐다.


- 너라는 생활 中 다른 기억, p. 60-61 -




사실은 전업주부로 살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마음 한편에서 '전업맘'과 '취업 맘' 사이를 오고 간다.

나의 노동과 생각들이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급기야 '자본'으로 환산되어 '이익'을 창출하고 싶은 '욕망'을 여전히 느끼는 '경제적 인간' 으로서의 자아는 여전히 습관적으로 의식 속에 남아있나 싶다. 그리하여 종종 귀엽지만 오싹한 투자를 저질러 볼까 싶은 '창업 맘' 으로서의 나도 가끔 툭툭 일상 속에서 튀어나오곤 한다. 여전히 이런 생활을 유지하면서 나의 메인은 5세 아들 쌍둥이를 돌보며 틈새 시간을 쪼개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글을 자기 만족감에 도취되어 쓰거나 혹은 책을 읽거나, 그러다 아이들을 돌보며 가사를 챙기는 주부라는 걸 안다.



Girl reading a letter in an interior. 1908.  @ Peter Vilhelm llsted



손이 많이 가는 유아기의 아이들 덕분에 개인적 가용 시간은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정규직 취업을 다시 할 수 있을까 싶은 막연한 고민을 하면서도 이미 구직 사이트에서 찾아보게 되는 자연스러운 나의 검색 키워드는 계약직 혹은 파트타임 혹은 프리랜서 혹은 기타 등등등의 '저임금' 시장으로 눈을 돌린다. 그렇게  다시금 '취업 맘' 이 되어 이력서를 살피다가 나는 생각에 빠진다. 부끄럽지 않았던 나의 외국어는,  나름 손 빠르고 잔 재주 있고 화려했던 나의 각종 OS 활용 능력은, 오지랖이 빛을 발했던 영업력은, 사회적 연결망들은. 다시 제로에서 시작하게 되었다고.



그렇지만 나는 또한 안다. 쉽게 놓지 않을 '나'라는 것을.

전업주부로서 '집에서도 행복할 것' 이 철학이 되어 버린 나는, 이런 순간(?) 도 결국 삶의 과정 중 하나이고 어쩌면 나의 윗 세대들, 그 여성들이 이미 통과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시간이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고민하며 방황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라는 것을. 그 시간들이 모이고 쌓여 오늘에서 내일로 자신을 나아가게 만든다는 것도. 사실은 믿고 싶은 것이다. 나의 밤은 워킹맘의 진 빠지는 저녁에서 더 진 빠지는 전업주부의 밤이 되어 버렸지만, 이 시간들이 이렇게 흐르고 채워지면서 내 사람들을 지키고 있다고. 그러니 더할 나위 없는 의미가 충만한 '업' 이 아니겠느냐고 말이다.



아무렴 어떨까 싶다. 아무렴. 뭐든. 하루를 앞으로 나아가 볼 뿐.

나아가다 보면 나오기도 하는 게 길이고 인생이지 않은가 라고.

이렇게 워킹맘 표류기는 '주부 표류기'로 진화해 가는 중이다...



일출과 일몰이 반복되며 시간은 흐른다. 한 시절이 통과하는 중일 뿐, 그 무엇도 아름답지 않은 시절은 없었노라고...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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