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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Nov 05. 2020

신용

아들에게

지난 편지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너무 긴, 장황한, 그래서 괜히 마음 심란(?) 하게 만든 건 아닌지 문득 걱정이었다. 현재의 너희 둘은 그저 천진난만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 투명하고 순수한 눈은 어쩌면 시간이 흐를수록, 사회를 알아갈수록, 알아가는 사람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네 행동반경이 커지고 또 많아질수록... 가끔 흐려지거나 혼탁해질 수 있는 것 또한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자본주의 같았기 때문이었어.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니 앞으로도 편하게 읽어주되 네 시선으로 '현재'를 다시금 생각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오늘은 그 연장선으로 '신용'에 대해 말해보려 해.

이 세계를 지탱하는 규칙은 나로선 다름 아닌 이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나에게도 너에게도 그리고 그렇게 다른 '나'와 '너'가 만나서 '우리'가 될 때 있으면 좋은 것, 때로 반드시 있어야 할 것, 생존을 위해서든 성공을 위해서든 성장을 위해서든 이걸 빼뜨리곤 말할 수 없을 것 같아.



믿어 의심하지 않는 마음, 바로 신용이다.

경제 세계에서는 특히 이 '신용'이라는 일종의 서로 간의 약속이 커다란 규칙이 되어 굴러가는 것만 같아. 돈 공부를 하면서 엄마가 느낀 건 대부분 그랬어. 결국 신용의 문제지 싶었거든. 모든 문제들이... 하다못해 경제 관계뿐 아니라 어쩌면 인생 전부를 놓고 보아도 말이지. 아들... 그리고 나는 진심으로 네게 이걸 지켜내라고 말하고 싶다. 아마 반복해서 말해도 부족함이 없는 것 같아. 이 '믿음성의 정도'에 대해서 말이다.



신용을 지킬 것. (신뢰)

믿기는 자가 될 것. (관계)

그리고 믿되, 함부로 믿지 말 것. (추종)




끊어지지 않을 것 같아도 어떤 변수들이 많은 게 바로 이 세계의 묘한 매력이기도 하단다.



마지막 당부는 조금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것도 같다.

이 세상은 그만큼 경계와 의심을 놓치면 살기 힘들기도 하거든. 사건이 하나 있었어. 네가 태어나기 2년 전엔, 우리가 소속된 이 국가의 국민의 대부분은 기암을 토해야 했던 '사건' 이 있었다. 일종의 국가를 향한 '신용'을 잃어버린 사건이었지. 세월호라는 커다란 배가 여러 생명을 빼앗아가버렸단다. 사익을 추구하기 바빴던, 공적인 위치에 있는 인간들의 행위는 '믿음직해 보였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를 믿고 살았지만 그 믿음이 금이 가 버렸단다. 그리고 믿음의 최후는 참담했지...



함부로 믿지 말라는 당부 속엔, 네가 믿는 어떤 것이 진정 옳은 것인지, 계속 의심해 보라는 의미에서다.

아들... 그리고 이 '신용'으로 받쳐지는 게 바로 '돈의 세계' 란다. 생각해보면 단순하지만 아주 명확하잖니. 어떤 재화의 대가를 앞으로 치를 수 있는지의 유무를 가리는 능력, 이 신용은 은행에서도, 회사에서도 인간관계 속에서도, 곳곳 어디에서나 바로 너 자신을 대변하고 네가 지닐 힘마저도 만들어 나가는 것이란다.



예컨대 현금부자나 상속이나 증여를 엄청나게 받은 소위 금수저로 태어난 (2020년의 용어란다, 있는 집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말이지) 이가 아니라면, 살면서 우리는 이 세계에서 한 번쯤 '빚 (대출)'이라는 걸 이용하게 돼. 그런데 이 빚에도 나름의 '등급' 이 매겨지는데 바로 그 등급을 정하는 게 다름 아닌 신용이란다. 쉽게 말해 금전 거래 혹은 상품을 팔고 사는 데 있어서 그 '대가'라는 걸 우리는 생각하게 되지. 예컨대 돈이나 집을 빌려주면 (채권) 그 '빚'이라는 걸 졌으니 대가를 치러야 하지. (채무). 그리고 그 '빚' 은 물론 값아야 하는 형태가 일반적이지만 이 세상에는 교묘하게 갚지 않는 사람들도 있단다. 그게 가능하냐고? 물론. 충분히 가능할 수 있는 게 또한 자본주의의 역설 같기도 해...



그래서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라는 말은 오래 회자되기도 하지. 똥인지 된장인지 정말 먹어봐야 아는 것과 먹어도 모르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지..



신용은 때로 조작되니까. 믿음이란 언제든 깨질 수도 있게 만드는 게 바로 '인간 본성' 일지도 모르니까.

허울을 벗겼내었더니 진실되지 못한 이로 판명이 되면 바로 깨져버리는 게 또한 신용이지. 2020년 시대의 용어로 소위 '털린다'는 재밌는 말이 있는데, 대중으로부터 빠르고 뜨거운 관심을 받은 인물이 있었어. 소위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생겼단다. 그는 신뢰가 생긴 셈이지. 그런데 과거의 오점이 밝혀지기도 하면서 대중의 단두대에 올랐고 그를 향했던 믿음과 관심은 추락하고 말았단다. 어디 이 뿐이니. 이게 만약 '돈'과 관련된 사건이라면 어떨까? 2020년엔 그런 커다란 사건도 가득했단다. 국가 기관마저 투자를 했던 어떤 금융 운용사가 판매했던 금융상품이 그야말로 거대한 '폰지 사기 (피라미드식 다단계 사기수법)  같은 사건이 있었지... 긴 말은 하지 않을 생각이지만 여하튼 '신용' 은 그래서 함부로 믿거나 또 추종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아무튼, 신용이란 사실 모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란다...

은행, 기업, 사업을 비롯해 가정, 국가, 친구, 연인, 하다못해 지나가는 행인 마저도... 어쩌면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이라면 이 '신용'을 빼놓고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을까 싶구나. 최소한 '잘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말이지. 그것이 경제적이든, 정서적 심리적 의미로 해석되든.



너를 믿고 일을 하는 것도

너를 믿고 돈을 주는 것도

너를 믿고 물건을 사는 것도

너를 믿고 사랑을 하는 것도



내가 없는 너의 그 시간에도, 나만큼 널 믿어주는 이가 단 한 사람이라도 곁에 함께 한다면...정말 좋겠다.



사실 '믿음' 이 없다면 그 어떤 인간적 행위는 잘 흘러가지 못하는 게 이 세계의 규칙 같다.

아들... 그래서 엄마는 네게 진심으로 이 말을 꼭 건네고 싶어.



어제, 네가 쌓은 신용을 오늘도 지켜내며 살다 보면, 너의 내일은 풍요로이 살 수 있는 '힘'을 가질 거라고.

사람을 모을 수 있는 힘은 다름 아닌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

아울러 이 세계에서 사람을 모을 수 있는 자에게 돈은 결국 저절로 붙을 수 있는 것.. 설령 원치 않아도.

그러나 신용이란, 믿음이란, 단 한번, 단 한순간에도 깨질 수도 있는 것

그리하여 진실되고 견고하게, 매일 매 순간 '너'를 살피면서 튼튼하게 만들 것.



아들. 끝까지 믿기는 자로, 믿고 싶은 자로, 건강한 믿음을 주고받는 이로 살아주면 좋겠다.

널 믿는 친구들이, 동료들이,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과 네 주변 모든 인연들이 부디 진실된 철옹성 같은 믿음으로 이 세계를 나아가 주면, 아마 엄마가 지내는 '오늘' 보다 조금 더 괜찮은 '내일'을 그렇게 만들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고 싶은 말은 계속 샘솟지만, 오늘은 여기서 줄일게.

2020년의 아들... 너와 함께 한 시간을 나는 믿는다. 그리고 믿어줄래.



세상에 단 한 사람,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널 믿어줄 단 한 사람이 존재했다고.

설령 네 목소리가 거짓으로 점철된 문장일지언정, 세상에는 끝까지 믿는, 그런 존재가 단 한 사람정도는 있었노라고.

그러니 너 또한 자신을 건강한 인간으로 가꾸어, 스스로 믿고 나아가도 좋다고.

너의 믿음 뒤엔, 나 라는 믿음이 받쳐주고 있을 것이다. 눈을 감기 전까지.



2020년, 나보다 너희 둘을 믿는 내가, 나의 신처럼 믿었던 순수했던 네가,  여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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