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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Apr 13. 2021

당신이 잘 쓴다는 거짓말

빨간 국화, 진실

글쓰기에 전문가는 없다. 

그저 스스로 쓰는 사람만 있을 뿐. 빨간 국화처럼, 진실된 한결같음으로. 




말하자면 글쓰기에 전문가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분명히 없다.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이미 동시대는 훌륭하게 '사기'를 치는 전문가들이 꽤 많아 보인다. 실제로 많이 생기기도 했다. 소위 '책 쓰기'라든지 '글쓰기' 산업이 우후죽순 늘어나고 있는 '꼴'을 보자면. 솔직한 심정을 고백하자면 나는 글쓰기를 가르치거나 책 쓰기를 가르친다는 소위 '전문가' 라 주장하는 혹은 그렇게 보여지고 싶은 초보들을 오랜 시간 최선을 다해서 경멸하며 혐오해왔다. 여전히 그 증오(!)가 없어진 건 아니다. 다만 자기 성찰을 더욱 깊게 할 수밖에 없게 될 뿐이다. 책 쓰기라든지 글쓰기를 도와준답시고 슬그머니 남의 지갑 염탐하는 이들이 상당수 있는 이유는, 결국 그런 이들을 제대로 거르지 못하는 '내 탓' 이겠거니 싶었기에. 



라이센스란 본디 합법적으로 사기 치기 좋은 도구 아닌가. 그런데 '책' 도 사실 비슷한 꼴로 보인다.  

이 시대의 어느 산업계통에서는 (자기 계발, 심리, 그리고 예언자들이 난무하는 주식이나 부동산 분야 특히) 책을 쓴 사람이라는 '저자' 들의 '지적 허영심'과 허세는 그들의 '책' 속에 충분히 훌륭하고 그럴싸한 이야기로 탄생되어 독자들을 찾는다. 물론 독자들은 그걸 모르면서 읽기도 혹은 알면서도 읽는다. '배운다'는 명목 하에. 물론 책을 읽는 건 삶 속에서 두루두루 좋다. 읽는 행위가 나쁜 게 아니겠다만. 문제는 괜찮은 책을 거르지 못하는 독자의 지적 수준은 둘째 치더라도 15,000원의 정가의 가치 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책들을 여전히 '쓰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사실이다... (라는 말을 하면서도 나는 고개가 숙여지고 부끄러워진다. 나의 운 좋아서 나온 책도 그럴 수 있기에) 특히 성인교육시장에서 초보가 생초보를 가르치는 게 만연시된 풍토인데, 거기서 전문가를 가르는 기준은 누구이던가? 애초에 어른을 가르치는 어른을 두고 어떤 어른이 그 어른이 전문가인지 아닌지 그저 말발과 자격증을 가지고 승부하려는 사기꾼인지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조화와 생화는 겉보기엔 같다. 그러나 향기가 없다는 걸 자각하면 그때 아는 것이다. '가짜' 라는 걸. 



가장 충격적인 경험은 사실 몇 권의 책을 출간한 이들이 바로 다짜고짜 책 쓰기 수업을 만드는 행위였다.

거두절미, 그 책이 많이 팔렸든 그렇지 않았든, 그 저자가 글력이 끝내주든 말든, 고전과 좋은 외서에서 나온 책들을 편집하고 리라이팅을 거쳐 뚝딱 하고 베스트셀러 만드는 전문가든 아니든, 지갑을 여는 독자 (소비자)는 그 '가려진 탄생 비화' 를 알 수가 없다. 책은 나왔으니까. 결과가 나왔으니까. 게다가 성공까지 했다면 그것이 운이든 말든 알 바가 없는 것이다. 책이 좀 '팔린다' 싶으면 그 '운' 이 '실력'이라고 착각하고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교묘히 자랑하며 그렇지 않은 이들로 하여금 묘하게 주눅 들게 만들어서 지갑을 열게 만든다. 책을 보시라고, 내게 컨설팅을 받으시라고. 내 이야기를 들어 보시라고. 당신도 할 수 있다고. 선한 에너지를 전파한다고. 지식 나눔이니 뭐니 뭐니 소음을 전파해가면서. 



가만히 생각해보자. 책 쓰기나 글쓰기 클래스를 오픈하는 '빈껍데기 전문가' 들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그들의 종착지는 어디였나? 자본주의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이 곳은 자본주의 상거래, '시장' 속에서 살다 죽는 인간이라는 대중이 사는 곳이라는 걸. 완전한 학자를 제외하고 소위 상거래에서 전문가들이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바로 '자본' 이다. 그들이 필요한 건 선동할 대중, 그리고 자본이다. 자신의 돋보임아니면 이익을 위해. 비양심적으로 고액의 컨설팅이나 책쓰기를 종용하는 이들은 '착한 사람' 코스프레를 한다. 그러나 명심해야 한다. 전문가들의 말은 설득력이 있다. 감정적이고 이성적 의사결정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왜? 그들은 선동에 탁월한 영리한 술수를 부리는 '전문가' 니까. 선심으로 '돕겠다'는 단어는 도덕이나 윤리과목에서나 나올법한 단어다. 애초에 '상거래'에서는 쓰일 수가 없는 것이다.  



가장 경멸하게 만드는 그들은 자기기만과 오만에 탁월한 위선자들이었다. 

그나마 제대로 괜찮은, 혹은 엄청난 개성 강한 필력 혹은 경험치 혹은 한 분야에서 최소한 글쓰기만 10년 이상 한 사람이라면 그마저 이해해주겠지만 정말이지 형편없이 재미없는 그럴듯하게 훌륭히 교과서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이 운 좋아서 책 몇 권 출간을 했다고 하여 그새 그 '책'이라는 걸 '글' 산업 안에서 콘텐츠로 만들어서 팔고 있다니.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따지면 왜 정말 진심으로 '작가' 들은 왜 그런 산업에 뛰어 들어 돈을 벌려 하지 않을까? 이유는 명징하다. 그들이야말로 '작가' 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것에'만' 몰두해도 시원찮을 판인 '작가' 이기 때문이다. 정약전이 '자산어보' 하나만 두고 남들이 뭐라 하든 말든 출세 하든 말든 재물이 쌓이든 말든, 그저 진실되게 그 한 편을 위해 몰입하다 죽은 격과 비슷한 이치겠다...



작가는 자신의 글을 가지고 거래하지 않는다.. 시간과 거래할 뿐. 혼자 쓰는 시간을 투자해서 만들어낼 뿐. 




책쓰기 전문가들은 '거래'라고 표현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돕겠다'고 할 것이다. 

감정에 치우치기 쉬운 뇌 구조를 가진 인간의 심금을 건드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채택한 동사, '돕다'라는 것이 가진 위대한 힘을 마치 '시크릿'처럼 사용하고자 했던 '지적 사기'를 펼치려는 것임이 분명하다면 그들은 칭찬받아 마땅하겠다. 자본주의를 아주 영리하게 사용하는 '전문가' 임은 분명하다. 소비자는 이미 합리적인 소비를 하는 주체가 아니라는 걸 -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소비 행위에 멍청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나! - 행동경제학에서도 누차 우리에게 경고했으니 말은 다 했지 싶다... 그래. 그들은 영리하다. 합법적으로 사기를 치는 건 이 자본주의에서 영리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이 짧은 지면을 통해서나마 누군가들을 있는 힘껏 조롱하고 싶었다. 

사실은 글보다 자신의 삶이 남들에게 더 인정받고 돋보이고 싶었던, '운'을 '실력'이라고 생각하며 누군가를 돕겠다는 혹은 가르치려 하는 오만한 빈껍데기 전문가들에게. '작가'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읽고 쓰는 자들이며 정말 작가라면 누군가를 가르칠 시간 조차 없어 그저 자신의 이야기와 경험치를 어떤 문장으로 쓸지 내내 고민하다가 고통받는 존재들이라는 걸. 그들이 알 리가 없다. 애초에 그들의 관심은 '잿밥'에 있을 테니까. 제사를 차리는 사람 따로 그 후에 그 풍성한 제사상을 즐기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처럼. 그것이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증거이고 눈에 보이지 않게 이 세계를 지탱하는 법칙일지 모른다. 



능력이 있다는 오만함을 가지고 누군가의 지갑에서 고액의 컨설팅비나 수업료를 뺴 가는 '저자' 들이여. 

대단히 훌륭하시다. 그러나 한편 주의하시길. 진심으로 다양한 책을 읽고 다양한 글을 쓰는 '작가' 들은 당신들의 행위가 순진무구한 누군가들을 교묘히 부추겨 자신들의 뱃속을 불리게 하는 상거래라는 걸 안다.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걸 드러내는 사람들은 병신취급 받거나 위인이거나 했었다. 몽테뉴, 반고흐, 나심탈렙은 모두 전자이자 후자였다.



알고서도 침묵하는 이들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 빈껍데기 전문가들은 함부로 책이나 글을 다루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럼에도 쉬이 물러서지 않을 사람들이라는 것도 안다. 이미 빈껍데기 전문가들은 그들이 누군가를 가르칠 정도로 잘 쓴다는 생각에 지속해서 빠져 살 테니까. 혹은 잘 쓰지 못한다라는 위선적 겸손을 배경에 깔고 나름의 '안심'이라는 감정 상태를 심어둔 이후, 다시금 지적 사기 행각을 되풀이하고 말 지도 모른다. 원래 인간은 자기 성찰하기 힘든 뇌 구조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편한 게 좋고 누군가 대신해주기를 바라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편향적 동물이니까... 



그럼에도 우리에게 남은 '희망' 은 있다.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고 읽고 또 읽으면서 혼자 극복하고 돌파하며 자신의 세계를 누가 알아주든 말든 계속 나아가려는 '작가' 들이 이 세계에는 있다는 것이다. '에바 일루즈' 나 '한나 아렌트'를 읽고 고통스럽지만 자신의 삶을 성찰하려는 저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캐롤라인 냅처럼 자신의 치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위트있고도 깊이 있는 시선과 성찰을 하다가 단명한 작가도 있다는 것이다. 



반면 운 좋아 성공한 개인의 단면을 과신하려는 게 아닌, 진심으로 삶을 돌파하고 극복하려 했던 지금은 고인이 된 작가들의 명작을 찾아 읽는 독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실용서가 필요하다면 차라리 관련 분야에서 최소한 10년 이상 연구를 했던 이들의 논문이나, 동 장르에서 최소한 5권 이상 출간한 이들의 책을 읽는다는 것이겠고. 난 그런 이들을 (독자든 작가든) 오히려 사랑하고 감싸앉는다. 그런데 그런 이들은 보통 자신이 잘 못쓴다고 생각하며 조용하고 겸손하게 살더라... 빨간 국화 같은 그들은 책과 글을 향해 '진실' 된 마음으로 진심껏 혼자의 고통을 자처한다는 걸 안다. 국화가 진실이라면, 그런 작가들이야말로 진실되게 쓰는 사람들 이리라. 



한결같이 진실되게 살아내려는 빨간 국화의 진실....... 빨간국화를 닮은 작가들을 좋아한다...진실로 살기에. 



그리하여 그들은 알 것이다. 애초에 자신의 글을 쓴다는 건 자신만 알 수 있을 뿐

누가 도와줄 수도, 가르쳐줄 수가 없다는 것을. 그들이야말로 단단한 껍데기 안에서 남에게 피해 끼치지 않고 쓰려하는 본연적 작가라는 것을. 운이 좋지 않아 세상에 보이지 않았을 뿐..



운이 좋아 세상에 먼저 드러난 이들이라고 해서 모두 다 진정한 작가가 아님을. 

나는 자꾸만 알 것 같다. 많이 읽고 그만큼 쓸수록...




#전문가는 없다. 있다면 운에 속은 거짓말쟁이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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