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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Nov 08. 2017

40. 흔한 사무실 잔혹사

보람 따윈 됐고 야근수당을 바라지만, 그럼에도 지켜내고 싶은 게 있어요.

 이거 만든 새끼 누구야, 바보 아냐? 왜 이따위로 일하지?


 '바보같이 이따위로' 일하고 말하는 건 정작 당신 아니던가요 라고 되받아 치고 싶었다.

 사업 배경의 맥락도, 설득도, 논리도, 이해도 없이 그저 바보 같은 말과 단어를 초이스 하여 아랫사람들의 사기와 의욕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건 바로 리더라는 위치의 당신이라고 말이다.


 시간이 흘러감에 아무리 직장생활의 군살이 붙었다고 해도, 일을 하며 종종 보게 되는 직장인들의 화법은 나를 종종 당황스럽게 만들곤 한다. 가령 어제 회의실에서 있었던 일, 그리고 들었던 말은 여전히 그랬다.  


 해외 고객사의 데드라인이 촉박했던 가격 제안서를 급히 작성해야 했던 상황과 마주했었다. 그에 맞춘 백 데이터를 겨우 받자마자 엑셀 파일로 정교하게 짜여 있는 소위 가격 틀에 맞춰 제품 판가를 세팅했고 이제 의사결정권자의 '디시전 메이킹'만 남겨둔 상황이었다. 내 주 업무 중 하나인 그 가격 제안서를 만드는 건 사실 어렵지 않았다. 늘 10년간 해 오던 일이었으니.


고객사님들이 데드라인은 정말 '데드'라인이다.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더 정성스러울 텐데, 덜 그래야 하는 현실이 항상 아쉽다.


그러나 오히려 나를 어렵게 매번 만드는 건 이런 것들이다.  회의실에서 주고받는, 내가 들었던 몇 사람들의 목소리들.


밥 먹고 하는 '짓'이 숫자 맞추긴 데 '이 딴' 실수하냐
이걸 왜 못 만들어, 이렇게 하면 만들 수 있잖아. '밥 값' 안 하냐
내가 1년 개고생 해서 따온 딜인데 난 이걸 보여 주고 싶단 말입니다. 다시 가져와. 그전엔 결정 안 합니다


  회사란 그런 걸까. 밥값을 결정하는 건 회사다. 그러나 그 밥값은 내가 일해서 내가 받는다. 사장이 아니고서야 다들 따지고 보면 밥값을 '받는'건 마찬가지일 텐데.


 왜 그렇게 누가 누구를 못 괴롭히고 못 까서, 정치판에 못 끼어 들어서 안달인 걸까.

 물론 악의야 없다지만 주고받는 말들을 가만 듣다 보면 종종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특히 복직 후 팀을 옮겨서 새롭게 출발해 보고 있는 이 사업부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그 밥그릇이 넓디넓은 대야 그릇이냐, 작디작은 밥공기냐의 차이가 있을 뿐. 리더라는 사람의 나보다 더 한 밥값을 받는 인간들이 가끔 나의 밥값을 운운할 땐, 감히도 괜스레 화가 나고 괘씸해 지진 않는지?


일에 경중은 없다고 보는 편이나, 그와 달리 하찮은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분해 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좀 많이 싫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새롭게 배치받은 이 곳에 대해서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회의실에 앉아있었던 나와 같은 사람들이 들었던 그 몇 마디의 말들 덕분에 말이다.


 육아 휴직 후 합병 예정인 자회사로 강제 발령받았다.

 직책도 직함도 모두 바뀐 상태였다. 중요한 건 아니었으나, 소속과 직무가 엄밀히 틀려졌다. 인사팀은 나를 파견 직군으로 분리한다고 했다. 합병 과정에서 기존 휴직 직원의 소속을 보호해 주기 위해 회사가 만든 시스템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월급에 지장을 준 건 아니었으나 당최 인사팀의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고 사실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제 그런 시스템이 내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기에


이해되지 않는 것은 굳이 이해하려 들지 않게 되었다.
직장이란 그저 시간에 맞춰 일을 하고 정당한 임금을 받아야 하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기대해선 안 되는 곳임을 알아 버린지도 모르겠다.


 

 나는 용병이었다.

 10년 동안, 늘 팀이 바뀌었었다. 하는 일은 사실 따지고 보면 거기서 거기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팀과 맡은 해외 시장과 다루는 제품,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익숙하려 할 때 항상 내겐 변화가 찾아왔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러나 괜찮았다. 오히려 여러 사업들을 경험해 볼 수 있었기에, 한편으론 고맙기도 하다.


 여하튼 육아 휴직 이후의 복직하기 전후로는 이곳저곳 손이 필요한 곳으로 투여되는 신입 혹은 인턴들이 대부분 배치되는 팀으로 소속된다고 했다. 외국어를 할 줄 알며, 그간 해외마케팅 일 좀 했다는 인력이 필요하다는 곳으로, 복직 이틀 전에야 나는 내가 새롭게 발령될 팀을 알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배치된 사업부는 타 팀장들 및 사장조차도 어떻게 돌아가는 생태계 사업판(?)인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 같은 곳이었다. 다루는 산업군과 제품군이 아예 회사대 회사로 틀려 버리니 당연히 생태계와 업무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소울이 그간 내가 겪었던 것과는 진심으로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는 곳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같은 회의여도 기분 좋은 회의와, 뒤끝이 구린 회의가 있다. 전자가 많아지를~바라는 건 욕심이라 했다 젠장


 사장과 임원, 기존에 일하던 사람들이 엄밀히 존재하는 하나의 회사였었던 곳. 그 회사가 원래 있던 나의 회사로 합병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갔다고 했다. 그 와중에 사장도 몇 번 바뀌었다고 했다. 내가 감히 알지 못하는 정치적인, 인적인, 일적인 사연이 많은 곳이라는 것과, 퇴사자도 꽤 많이 나오고 있는 곳이었다. 복직하고 사무실에 앉아서 일을 하고 있으면 여기저기 퇴사 인사를 하러 다니는 사람들을 곧잘 볼 수 있었으니까.


 그냥 다른 회사 이직했다는 생각이 드는 조직이었다.

 모두가 암묵적으로 인정했다. 한 지붕 아래 다른 가족처럼. 같은 회사지만 사실 다른 회사라고. 완벽한 새 출발이라고. 너한테는 더 잘 된 일이라고 친한 지인들이 말해주었다. 나와 같지 않은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위로했다. 위로로 느껴지진 않았고 단지 위로를 해 주는 그들의 ‘예상’에 맞춰 나는 그냥 일을 하기로 결심하며 다시 출근을 시작한 지 이제 반년이 지나가고 있다.


나는 10년 차에, 다시 신입 1년 차 사회초년생이 되었다.


 내 의지는 그곳에 없었다.  

 물론 의지와 정체성을 회사라는 밥벌이 일터에서 찾는다는 게 어리석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냥 일을 하는 곳이다. 회사는 내가 투여한 노동에 맞춰 임금을 밀리지 않고 받는 곳이며 밀리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이고 감사해야 하는, 그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곳일지 모르겠다.


 이 현실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회사’의 얼굴이 딱 그 정도라는 것. 애석하나 이제는 제법 알 것 같은 나이가 되었고 연차가 돼 버렸는지 모르겠다.


 이왕 돈 받고 일 하는 거라면 좀 더 ‘사람’ 답게 일하면 안 돼? 응. 안돼. 네 욕심이야.

 누가 내게는 그걸 욕심이라고 했다. 그 마음도 애사심이 있어서 아직 그런 거라고. 월급루팡이 되고 싶진 않아서일까. 그래. 나는 아직 회사를 좋아하는 것 같다. 아니 좋아하게 되었다. 회사가 요즘은 고맙단 생각이 드니깐 말이다. 집에서 아이들만 보기엔 성격이 그렇지 못하고 바깥 생활을 하며 돈을 벌고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는 것에서 생의 가치를 느끼는, 모든 건 내 탓이어서 그렇다는 걸 안다.


 꽤 오랜 시간 한 회사에서 일을 하다 보니 이제는 제법 어떤 일을 어떤 사람들이 각자 위치에서 하고 있는지, 고만고만하게 눈에 보일 때가 있다. 그리고 자연스레 체득하게 된 건, 역시 일은 사람들이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조직 문화를, 팀의 문화를 만들어 낸다는 것.

 헌데 신기한 건 그 문화의 큰 주축이 되는 것 중에 하나가 리더의 캐릭터에 의해 꽤 많은 영향을 적지 않게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하다. 어떤 리더를 만나느냐, 내가 모시는 상사가
 어떤 캐릭터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인지, 닝겐인지.


 아웃룩을 열고 노트북의 키보드를 강하게 때려치우면서 일을 해야 하는 곳인지, 아니면 부드럽게 키보드를 어루만지며 회의실 들어가는 발걸음도 꽤 즐거울 수 있는 곳인지는 모두 나를 둘러싼 이가 ‘사람’이냐 ‘닝겐’이냐 에 따라 달라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지 모르겠다.


마음에 이런 말 담고 계셔도 입밖으로 꺼내면 미워요 우리 그러지 말자며.... (꺠갱?)


 예전 임신했을 때의 사업부와 지금 새롭게 배치된 사업부의 소울과 기업문화는 극과 극이다.

 전자는 일관성이 없이 너무 바쁘게 시간에 쫓겨 살아남기 위해 해외 사업 제안과 매출 발생에 급급해야 했던, 그러나 사람들과의 돈독함과 배려심을 갖고 역동적으로 움직여 온 신사업부라 한다면, 지금 배치된 곳은 꽤 오랜 경력의, 갑질의 문화가 여실히 살아있는 생테계의 올드하고 각진 에지가 넘치다 못해 딱딱하게 굳어져 있어서 쉽게 변하지 않으려 하는 사업부라는 느낌이다.


 이름만 들으면 익숙히 알 법한 굴지의 국내외 고객사들과 일을 하는 우리 조직은, 파트너 고객사의 어린 노무 시기가 신입 때부터 보고 배운 게 내 상사의 갑질이었기 때문에 그 갑질의 말투, 행동들이 모든 메일과 회의 속에 은연중에 다 드러났다. 내가 소속된 이 조직도 그대로 답습하고 보고 배워온 걸까. 그러지 않다곤 해도 그렇게 느껴진다. 그들에겐 이방인인 반년밖에 안된 '10년째 근무 중에 6개월 차가 되어 버린 막둥이 팀원'인 나에게는 말이다.


 새벽 6시에 나와서 일을 하고 회식이라도 하면 새벽 1시 2시는 기본, 그럼에도 퇴근을 해서 다시 정시 출근을 하며 일을 고되게 해내고 있는 고객사와 일을 하는 게 우리 사업부라 했다. 더군다나 여직원과 남직원의 일을 엄밀히 구별하는 곳이었다. 일을 하는 것에 여자 남자를 가리다 보니 종종 회식 자리에서 나이 적고 머리를 쓰는 일의 중요도가 덜한 직원이 무시당하고 조롱당하는 게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곳 말이다.


 복직 후 첫 회식에서 내가 봤던 어떤 장면이 생각난다.

 이제 막 계약직에서 정식 사원이 된 28세의 이 업계에선 꽤 어린 어린 여자 직원이 내 앞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3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지고 있는 아빠 뻘의 상사가 아주 친근하게 그 여직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술자리를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나에겐 선뜻 술을 권하지 않았다. 나에겐 깍듯한 존대어를 처음에 사용해 주었다. 나는 그 조직의 사람이 아직 아니었고, 외부인이었으며 여자였지만 아줌마였기 때문에. 더군다나 그 아줌마도 그냥 보통 아줌마가 아니라 할 말은 좀 할 줄 아는 듯한 포스의 '다나까체'를 쓰는 키가 크고 대들 줄 아는 듯한 일하는 아줌마여서 그랬나? 소위 그들에게 나는 '쉬운 여자'는 아니었던 듯하다. 쉬운 여자였으면 나에게도 술을 권했을까. 모르겠다. 그냥 쿨하게 나는 그들에게 술을 권했다. '일 잔 하세요'라는 정중한 어체와 함께. (그 여직원을 대하는 그 상사에게 청하에 처음처럼을 말아줄걸 그랬다.)


 페미니즘까지는 아직 아닌 듯 하나, 여자인 내가 수없이 겪고 본 사례가 참 많고, 아줌마라는 현실이 유독 감사한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어쩐지 씁쓸한 건 지울 수 없어서 일단 이쯤에서 단락은 종료하련다. 더 이상 쓰고 있자니 갑자기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려서 못 쓰겠다.


일을 하는 여자로 10년을 버텨온 내게 그들이 한 말로, 내 이미지가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일, 좀 하는 ‘여직원’ 이네요. 잘 해 보세요. 이 바닥이 쉽지 않아요



 쉽지 않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다. 너의 그 터진 입으로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여전히 열정이 남아있는 탓일까. 나는 여전히 잘 견뎌내 보고 싶다. 화장실에서 꺼이꺼이 우는 것도 이젠 지겨워서 눈물도 안 나오게 변해버렸으니깐. 다른 개인적인 이유의 감정선을 건드리지 않는 하에서는. 그래서 내가 속한 이 새로운 사업부에서 웅크리며 어디선가 러브콜이 들어오기 전 까지는 모든 행복한 딱갈이(?)를 다 해줄 기개 넘치는 비장함과 웃으며 일을 해내 줄 깡으로 무장하며 오늘도 출근을 무사히 해 냈다.


 사실 알고 있다. 나와 함께 일을 하는 팀원과 팀장의 고단함과 애씀, 안쓰러움을. 그들도 집으로 돌아가면 누군가의 아빠이고 누군가의 아들이라는 걸 안다.


  우리들이 누군가의 딸이고 아들이며, 엄마이고 아빠라는 사실을 항상 마음에 담아두면 좋겠다. 

사실 회사에서 일하는 모든 '밥값'을 받는 입장이라면, 좀 더 배려있는 격 있고 각 있는 근사한 말을 사용하면서 일할 순 없을까. 일은 그렇게 우리를 삭막하게 만드는 걸까. 여전히 힘든 숙제 기는 하다만, 뭐 일이 몰아 치면 그런 숙제도 그저 생각에 그치고 만다.


 업무를 오고 감에 그들이 사용하는 거칠고도 걸쭉한 육두문자의 충격이 이제는 나도 제법 익숙해졌는지 이해가 될 법도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이곳에서 겪고 보는 말투 속의 조롱하는 듯한 목소리는 여전히 애석하긴 하다. 리더의 화법에 대해서, 말의 품격에 대해서 정말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말이 그 사람의 인성이라는 것. 그 사람의 됨됨이라는 것을. 그 덕분에. 그래서 감히 나는 다짐해 본다


 오늘의 내가 쓰는 말 한마디가 좀 더 우아하고 부드럽기를. 사랑이 가득하기를.

 일 하는데 무슨 사랑 타령이냐고 엉뚱하다 할지 모르겠지만, 마음에 사랑이 담겨 있는 사람은 쉽고 함부로 말하지 않는 다고 믿는 편이다. 또한 인성에 격이 있는 사람은 사람다운 말을 사용할 줄 안다.


  돈을 버는 일터에서 이왕 하는 말이라면
좀 더 ‘사람’이 ‘사람’을 대할 줄 아는 격 있는 말들을 주고받길 바란다.


 생각이 올곧고 사람을 진심으로 대할 줄 아는 마음의 사람이라면, 그 행동도 자연스레 나올 거라고 믿어보고 있다. 이 지겹고 거칠고 무시무시한 회사라는 전쟁터 속에서, 여전히 나약한 미생에 불과한 내가 하는 이 어리석은 생각을,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깨지더라도 지켜내고 싶다.


지켜낼 끼, 깡, 꼴이 아직 내 마음에 남아있다면 가능하겠지. 


육두문자는 개한테도 하면 안돼요.
강아지도 삶의 격이라는 게 있답니다.
개 같은 소리는 마음에 묻어 두고 우리 좋은 말 많이 사용해요 호호호.


강아지도 고양이도 인격이 있어요 살아있는 건 다 소중하다며....하아 (오늘 원고는 거칠었습니다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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