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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Nov 07. 2017

#14. 친해져요 우리.

여전해서 화가 나. 안고 싶어 져서. 

나는 사실 탈진 상태였다. 모든 게 지쳐만 갔을 때, 그래서 서둘러 떠나기로 결정했다. 

떠나면 해결될 것만 같았기에. 벗어나고 싶었다. 마주한 현실에서. 도망친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연을 계기로. 


한국에 두고 가는 게 정말 많구나..


 진우가 걱정되지는 않았다. 

 키워질 할머니와, 엄밀히 아직 헤어지지 않은 아이의 엄마가 곁에 있었으니까. 이혼 서류는 그대로 서재 안 책상 서랍에 자리한 채 나는 수현이와 미국에서 새 출발을 해 보기로 스스로 다짐했다. 다시 잘 지내보기로 했다. 

 

 처음 1년은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적응을 해 내기 위해 수현이도 나도 정신없이 보냈다. 계절이 어떻게 지나가지도 모를 만큼의 속도로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헤라는 점점 내 기억에서 사라져 갔다. 단 한 곳, 레드 너의 지역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갈 때면 생각이 날 뿐. 


그녀는 항상 책을 읽고 있었다. 그때는 어린왕자였는데, 지금은 어떤 책을 읽고 있을까.. 탁 트인 곳에서 함께 책을 읽고 싶단 생각이 든다. 보고싶다..


 살다 보면 그렇게 까맣고 잊고 있던 일을 기억할 때가 있는데, 내게는 가을이 그랬고 도서관이 그랬고 책이 그랬고 추운 겨울이 그랬다. 그렇게 잊고 있었지만 사실 어렴풋하게 시간의 단편들 속에서 그녀와 함께 했던 공기를 마주할 수 있었다. 


지혜의 숲은 여전하려나. 벌써 낙엽이 다 떨어져 가네. 이렇게 한 해 또 다 돼가는구나..

 

 오히려 한국에서 보다 수현이와의 관계가 이따금씩 좋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허전함과 쓸쓸함은 여전히 마음 깊숙한 곳에 잔재해 있었다.  



 돌이켜 보면 걱정했던 일들은 생각 외로
걱정했던 딱 그만큼, 실제로는 아무 일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지도 모른다. 



 수현이와 11주년 결혼기념일에는 생전 처음 미국 횡단 여행을 떠났다. 

 낯선 곳이 주는 호기심과 설렘은 그녀를 충분히 자극시킬 만했으니, 그녀로선 기쁜 일이었고, 나도 나쁘지 않았다. 그녀에게 맞춰 주는십 년이 지나서 군살이 배겨 이제는 익숙해졌으니까. 여전히 나는 '맞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아마 꽤 오래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일상이 그랬다. 현실은 벗어날 수 없는 마주해야 할 정면이다. 


기쁘다는 것과 나쁘지 않다는 것은 엄밀히 차이가 있었지만, 나는 큰 기쁨도 큰 행복도 바라지 않은 지 꽤 오래된 중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므로, 크게 기쁘지 않아도 괜찮다. 


전 기쁘면 움직여요. 별도 생각하지 않는 편이죠. 안 기쁘면 안 움직이고.. 단순한가요 
아니. 그래서 좋아요 당신 다워요..


 아주 가끔 주변이 깜짝 놀랄 만큼 조용한 순간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리우면서 익숙한 목소리. 헤라의 목소리는 내가 잊고 있었던 대학 시절의 순수함을 되찾아 주곤 했다. 그녀는 그런 존재였다. 내게 우울감을 선물해 준 그녀의 목소리가 여전할지는, 미국 생활의 대부분을 지내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준비를 할 때쯤 문득 다시금 생각이 나곤 했다. 어쩔 수 없었다. 여전히 그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딱 생각 거기까지.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나임을 알기에 나는 현실과 타협하기로 했다. 그녀도 나도 여타 할 안부 메일이나 전화 한 통 없이 그렇게 3년을 각자의 길을 흘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아내는 일자리를 구하지 않았다.


경력이 아깝지 않아? 호텔리어 경력 10년 넘었잖아.
지겨워졌어. 그냥 진우만 잘 볼래. 자기가 원한 게 이런 거 아니었어
원할 대로. Don’t care 야.(사실 나도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어) 
한국 돌아가면 하고 싶은 거 많아. 약속한 대로 쿠킹 스튜디오도 렌트할 거고
그래… 수현아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
남 말하듯이 말해…. 아직도야 여전히? 서운해 나한테? 
그런 거 없어.
그런 거 없다는 사람이 말투가 왜 그래 
진우 꺴나보다. 보고 올게 


 아내완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 

 그렇게 생각해야 마음이 놓였고 난 그래야 하니까. 벗어나고자 했던 마음도 이젠 사라져 가고 있었다. 헤라의 느낌도 혼자 남겨진 불 꺼진 서재 방에서 일을 하다가 주변이 아주 조용해져서, 정말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기분이면 그때만 잠깐 떠올렸을 뿐. 


생각이 깊어지지 않은 것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잊는 연습을 해 나갔다. 


 

 복도에서 그녀를 만나기 전 까지는, 모든 게 제대로 다시 제자리로 흘러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예상 밖이었다. 


 그녀를 다시 보자마자 3년 전으로 급히 돌아가는 듯한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여전한 그녀에게 여전한 느낌을 받고 있었던 나를 숨기 지를 못하겠다. 머리가 좀 길었고, 좀 더 느릿한 걸음이었으나, 그렇게 그 날의 복도에서처럼 모든 게 제자리를 다시 벗어나고 있었다.


위험하게 살아라, 그러나 애쓰진 마라


엄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해 준 말. 그리고 갖은 고생을 한 어머니가 항상 다 큰 아들을 위해서 건네는 말. 이 두 목소리와 함께 헤라의 목소리가 겹치는 느낌이었다. 내게 그렇게 말하는 듯 들렸던 건 내 착각 이리라. 


잘 있었나요. 보고 싶어요. 여전히, 아직도..



 마음을 감추려 하는 걸 애쓰지 않다면 위험하게 살아질 수밖에 없는 지금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달리 크게 할 수 있는 것 또한 없었기에 나는 그저 순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시야에 들어오면 들어오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괜찮다며 그렇게 지내보면 된다고. 아니 이제는 그녀도 나와 같이 생각이 난다고 그래서 다시 다가온다고 할지 언정 차가운 멘트를 날릴 여러 독설도 마음에 반대로 담아두고 있는 나였다.


 헤라는 이런 나를 얼마나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을지. 아니 받아들이는 것조차 생각이나 하고 있을지. 3년이라는 시간이 짧은 건 아니기에. 그 나약한 눈물 많은 여자가 걱정이 되지만 내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이기도 했다. 그녀도 나도 위험하게 사는 것보다 보통의 제자리를 찾아가려는 연습을 3년이라는 시간 동안 했을 테니. 그저 그 시간의 힘을 믿고 있을 뿐이었다. 


 하나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첫마디부터 너무 부드러웠다. 나도 모르게 그래 졌다. 그녀는 나를 여전히 그렇게 만든다. 내가 모르는 내가 불쑥 튀어나오게 만든다. 여전히 도. 그래서 우울하고 괴롭다. 


잘 지내셨어요 
여전하네요. 목소리는 여전해요.
네. 아. 승진.. 하셨다고. 축하드립니다. 언제 오셨어요..? 
지난주에 왔어요. 잘 있었죠? 헤라 씨도 승진했다고… 축하해요.. 
시간 지나면 다는 명찰 같은 건데요 뭐. 제게 중요치는 않아요. 
여전.. 하군요 그 말투도. 
팀장님께만 보이는 말투일 수도 있겠고요.. 
그래요.. 



 사람들이 회의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나에게서 조금 떨어져서 앉았고 노트북을 쳐다보며 일을 하고 있었다. 어딘지 낯선 모습이다. 멍하니 노트북을 바라보며 열심히 키보드를 치고 있는 그녀에게서는 더 이상 어리고 나약하고 눈물 많은 여자가 아닌, 단단하고 세월에 익은 듯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여자가 저렇게 섹시할 수 있구나를 그 와중에 생각한 내가 바보같이 느껴진다. 


그럼 이 정도로 마치죠 
회의록 곧 공유드리겠습니다.
수고했어요 헤라 씨. 아니 고헤 라 대리
네 팀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저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그녀의 뒷모습이 멀어져만 간다. 그렇게 우린 다시 멀어질 수 있을까. 저만치 걸어가는 거리만큼 그럴 수 있을까. 시선이 여전히 그녀를 계속 찾고 있다. 바라보게 된다. 바쁜 와중에 여유가 생기면, 차가운 겨울이 되면 될수록 더더욱. 




너무 미운 마음이었다. 

  홀로 마시는 심야의 따뜻하게 데워진 우유를 홀짝거리며 웅크리고 앉아 있었지만 이상하게 쓰리기만 하다. 그를 보고 온 이후 마음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알자마자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닿지 못하는 마음이라는 걸 알게 된 3년이었다. 그의 상황이 어찌 되었는지를 묻기보다는, 그저 아무렇지 않게 안부를 묻는 그가 이상하게 미웠다. 


 그럼에도 마음을 물어보는 시간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는 나라는 걸, 공원의 달빛을 쳐다보며 앞에 떨어진 고구마 말랭이 조차 먹고 싶지 않은 나라는 걸. 그는 얼마나 알 수 있을까. 


 행복과 기쁨이라는 게 지속적인 감정이 아니라는 걸 안다. 특히나 사람 동물이든 고양이든, 24시간이 행복하고 기쁘다는 건 거짓말이고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다. 


여전했어 목소리... 하필 왜 그렇게 여전한 거야. 차라리 많이 좀 바뀌든가…


원망스러웠다. 여전한 목소리, 미소, 분위기. 아니 그보다 원망스러웠던 건 여전히도 그를 바라보면 마음이 아파 오는 3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한 나라는 게 몸서리 칠 정도로 미웠다. 


유난히 아침 출근길이 춥게만 느껴진다. 한참을 어떤 옷을 입을까를 아주 오랜만에 고민했다. 평소 같으면 5분 만에 나왔을 출근길이, 여전한 존재 때문에 생각이라는 걸 하면서 시간을 지지부진 끌게 만들다니. 그렇게 만든다. 그는 내게 여전히 그런 존재라는 사실이 얄궂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을 생각이다. 마주했을 때, 그냥 그렇게 스쳐 지나가면 그만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앞을 향해 흘러나갈 뿐이니깐.
그렇게 앞을 향해 나아가면 그만이다. 



헤라... 씨? 


3년 전으로 되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다. 저 목소리 다음엔 어떤 말들이 우리들에게 펼쳐질까. 애써 외면하려 했으나 이미 내 고개는 등 뒤를 향해 그리웠던 목소리를 찾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 하세요. 일찍 나왔네요? 
네 출근이 좀 빨라졌습니다
원래 그렇게 빨랐나...
네 3년 전부터.. 아.
아.... 그렇죠 3년 전엔 안 그랬던 것 같아서 
네..
차 한잔 할까요 이르기도 했고, 복귀 기념으로 내가 살게요 
아니.. 괜찮습니다. 아침에 하는 일이 좀 있어서요 
아.. 그래요? 그래요 그럼. 
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지나치고 말았다. 겨우.

 정말 마음이 새어나가는 걸 겨우 틀어막은 채. 발걸음과 마음은 이미 온통 그에게 다시 물들여지기 시작했는데. 궁금한 것들이 한 두 개가 아닌데, 사소한 안부 정도는 물을 수도 있었을 것을. 나는 왜 그랬을까. 마냥 후회가 된다. 


그렇게 후회의 연속으로 하루를 어떻게 지냈는지 모를 만큼, 어느새 9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늘 그랬듯이 가방을 들고 사무실로 빠져나오려는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멀리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그가 보인다. 


아.. 또 만났네요 
아.. 네 
지금 퇴근해요?
네... 지금 퇴근하세요?
네. 여전히 일이 많네요 
네. 많네요...
그렇죠. 많아요 
.....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그렇게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에 둘이서 탔다. 그때 갑자기 쿵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악. 
어?! 


꿈일 거라고. 이건 정말 꿈일 거라고. 꿈이 아니고서야, 영화나 드라마나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현실이 되어 고양이인 내게 다가올 리 만무했는데, 이건 꿈이 아니었다. 그와 단둘이. 엘리베이터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잠깐만요 경비실을 누를게요. 걱정 말아요. 곧 올 거예요. 아 어둡다.. 잠깐만 핸드폰이.
저... 있어요 여.. 여기... 핸드폰 


 덜덜 떨리는 손을 겨우 움켜 쥔 채 나는 핸드폰의 플래시를 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배터리가 간당해서 금방 꺼질 듯했다. 희미하게 그의 실루엣이 보일 뿐.. 한데 신기한 건 사실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폐쇄된 어두운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편안한 엄마 뱃속의 양수에 떠 있는 것 같은 몽글몽글한 느낌이 든 건 왜였을까.


음.... 오려면 한참 걸릴까. 모르겠네요 
어쩌죠..
어쩌긴 기다려야죠 
아....
잘됐네
네?
얘기할... 시간이 생겼으니깐. 
아..
헤라 씨
네?
...
친해져요. 우리
.. 아?
친해집시다. 다시. 그럴 수 있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 있는지..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친해진다는 표현이 우습죠. 미안.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했고, 어떻게 변했는지도 보고 싶었고..
..... 보고 싶으셨나요? 
보고 싶었습니다. 네. 맞아요 그랬어요. 여전히. 
지금 보시고 있잖아요 
그렇군요.. 어둠 속에서 보고 있네요. 울지 않은 여전한 헤라 씨를. 
.... 울었었습니다. 
... 
많이. 그러나 이젠 눈물 흘리지 않을 생각이에요. 누구 때문에 울기엔 제가 아깝거든요 
아... 강해졌네. 당신 더워요 그래야지 내가 뭐라고 
네... 차장님이, 아니 팀장님이 뭐라고. 제가 지금도 뭐라고...
...?
당신이 뭐라고 여전히 이렇게 아직도 그 친해지잔 말에 마음이 아프다고요 
아..
제가 아직 그렇다고요..
고헤 라.... 여전하구나. 
바보 같이 여전해서 화가 난단 말입니다. 
화내요. 화나면... 나도 나한테 화가 나니깐. 나도.....
...
나도 여전해서 화가 나. 만지고 싶어서 화가 나. 안고 싶어서..
...


그가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익숙한 따뜻한 손이었다. 친해지자는 그 말은 참 잔인하게 들렸지만 그 차가운 잔인함과는 대비될 정도로 손은 여전히 따뜻했다. 


아니.. 조금만 더 이렇게.. 조금만 더.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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