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준비생의 직업 찾기
0.8평 남짓하는 직사각형의 방이었다. 그리고 방의 가운데엔 네모 반듯한 모양의 정직한 책상이 서있었는데, 그 책상 너머에는 꽤 정직해 보이지 않는 인물이 앉아 있었다. 단박에 알았다.
‘너로구나 삐삐.’
농도 짙은 새까만 칼 라거펠트 선글라스에 하늘색 지방시 셔츠를 입은 그의 모습은 흡사 힙한 저팔계 모습이었다. 빠삐 도사님은 거대한 체구와 풍만한 담배 냄새를 자랑하고 계셨고, 너무나도 시선 강탈 현장인 탓에 그의 주위 것들은 내 시야에 뒤늦게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코를 찌르는 담배 냄새에 다른 것들이 보이지 않기도 마냥 쉽지 않았다.
방은 ‘휑하다’라는 표현에 좀 더 가까웠다. 그래도 18년도의 트렌드라면 트렌드라던 미니멀리즘이었다. 그렇지, 여기는 압구정이니까. 뭔가 찢어지고 휑해도 레트로고 미니멀인 거야. 노오란 벽지와 방 한가운데 반투명 유리 책상, 에이포 용지, 원형 재떨이가 전부였다. 책상의 오른편엔 대기실(거실)과 연결된 베란다 창이 이어지는 구조였는데, 그 모습이 꽤 볼품없었다. 커튼조차 달리지 않은 베란다 창문을 보고, 겨울엔 도사님 춥겠다 싶은 정도였으니 말이다. 한낱 취준생인 내가 압구정에 지방시 걸친 도사를 걱정하는 겪이었다.
둥그런 재떨이는 좁은 방을 가득 메운 담배 매연에 걸맞은 소품이었다. 서울의 실내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데코레이션 기법인데, 아마 그의 한 손에 쥐어진 담뱃갑과 라이터가 섭섭지 않도록 구비해둔 모양이다. 실로 영화의 한 장면에 갑자기 초대받은 느낌이라 속으로 두어 번 피식했지만, 혹시라도 도사님이 연금술을 써 내 마음을 읽어 버릴까 봐 현재에 좀 더 집중하기로 했다.
삐삐 도사와 나 사이에는 반투명한 책상과 그 위에 놓인 에이포 용지가 전부였다. 삐삐는 듣는둥 마는둥 방관의 태도로 생년월일를 받아 적곤 내 이름을 물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우리 엄마는 삐삐가 묻지도 않은 나의 태어난 시도 먼저 밝혔다. (실은 혼자 갈 용기는 도저히 안 나, 나보다 좀 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엄마를 앞장 세워 간 탓에 생긴 일이었다.) 덕분에 그 밀실에는 우리 셋이 함께 호흡할 수 있었다. 조금 더 직관적이게는 우리 셋이서 내 미래를 결정 지을 수 있었다.
“남자 사주예요. 좀 더 공부를 해요.
더 할 생각 없어요?”
“아, 할 생각은 있는데..”
“교육 쪽으로 …”
“교육? 컨셉 잘못 잡았어. 서비스 쪽이 맞을 거 같아.”
‘서비스..? 으음’
“두바이나. 두바이에 서비스직. 호텔이나 이런 쪽에서 일한 다음에 나중에 대학원 가서 그런 쪽으로. 서비스가 맞아 차라리. 나중에 경력 쌓이면 항공사나 이런 데 좋잖아.”
이십 분의 호흡 끝에 얼추 원하는 정답을 들었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중간중간 잇몸이 만개하려던 순간도 여러 번 있었다. 그렇지. 좋지. 당시의 나는 어디든 붙여줬으면 싶은 취준생이었다. 항공 업계에 대한 생각도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떠밀리는 졸업 후의 공백기가 두려워, 아무나 ‘소속사’를 찾던 중에 항공사 채용 공고들을 볼 때면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솔직히 한 달 전엔 국내 항공사에 면접을 본 경험도 있었다.
‘맞아. 나 영어도 꽤 잘하고, 서비스직도 얼추 맞고, 비행기도 많이 탔지. 그래, 이 정도 글로벌 인재면 승무원 해야지.’
지금 생각해 보면 단언컨대 참 무례하고 염치없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도 이 우스운 생각을 사뭇 진지하게 풀어쓸 능력은 있었는 모양이다. 자소설에 가까운 입사지원서로 국내 항공사의 서류 전형을 뚫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아직 면접에서의 쓰라린 패배의 상처는 아물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래도 이 때문인지 삐삐 도사의 승무원 설계가 마냥 낯설지는 않았다. 아니 심지어 이 설계도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마음에 들었다. 자매님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한다던 내가 점집에서 나와한 첫마디였다.
“엄마. 나 승무원 되나 봐.”
영화 <비포 선셋>
"제가 살아온 삶은 평범했지만 제 관점에서는 저의 삶도 드라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