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쉼표를 찍을 시간이다.

-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가 있나요?

by 너울

일주일 전에, 상담 선생님은 나에게 전화를 걸어 첫 상담에 필요한 서류를 미리 작성해서 보내 줄 것을 요청하셨다.

서류는 모두 여섯 종류나 되었는데, 상담에 앞서 나의 가족 관계나 어린 시절에 대해 자세히 묻는 질문지가 하나였고, 무려 500개가 넘는 문항에 '예/아니요'로 대답해야 하는 객관식 질문지도 있었다. 그 외에 문장 완성 검사, 우울증 검사, 분노 조절 검사 같은 심리 검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마주 앉은 책상.

선생님의 앞에는 내가 작성해서 보냈던 서류들과 큼지막한 노트가 펼쳐져 있었고, 내 앞에는... 꼭 맞잡은 나의 두 손이 놓였다.


"요즘 직장에서 스트레스가 많으신 것 같은데, 어떤 점이 가장 힘드신가요?"


이 한마디 질문에 봇물 터지듯 나의 하소연이 터져 나왔고, 내 두 손 안에는 눈물에 젖은 휴지가 점점 쌓여 갔다.


선생님은 마치 아이를 걱정하는 엄마처럼 주의 깊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종종 특정 상황이나 인물에 대해서 추가로 질문을 하시기도 했다.


"가끔은 가슴이 너무 답답하고,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어요. 제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사실 다 내려놓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요. 하지만 부끄럽게도..."


속내를 시원하게 털어놓지 못하고 말을 돌리자 곧바로 질문이 이어다.


"아까 부끄럽다는 말 뒤에는 어떤 이야기를 하시려고 했던 건가요?"


"..... 제가 그만둘 수 없는 이유요.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부끄럽지만... 만약 제가 힘들어했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채워지고 그분은 이 일을 너무나 잘 해낸다면 어쩌죠? 그러면 저의 무능력이 증명되는 것 같아서 두려워요."


"아니죠. 그 자리에 잘 맞는 다른 사람이 있다면, 그건 모두에게 행복한 일이죠. 연애할 때를 생각해 보세요. 나랑 맞지 않는 상대와 스트레스를 받으며 굳이 계속 만날 이유가 있을까요? 하지만 나와 헤어진 그 사람도 결국엔 자기 짝을 만나잖아요."


"단지 이 상황이... 저의 성향과 맞지 않는 걸까요?"


"네. 무능력해서 힘든 게 아니라 단지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환경일 뿐이에요. 그 상황이 못 견디게 힘들다면 거기서 벗어나는 게 맞는 거예요. 단순하지만 중요한 일이죠. 지금까지 말씀하신 상황을 들어보면... 저라도 단 하루도 버티기 힘들 것 같아요. 이대로 계속 있다 보면 더 힘들어지실 거예요.

혹시, 일을 그만두는 게 망설여지는 또 다른 이유가 있나요?"


"......... 글쎄요... 굳이 찾자면.... 돈? 아닐까요?"




상담을 마치고 나오며, 두 가지 생각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와 맞지 않는 상황에서 굳이 버티려고 애쓸 필요 없다.'

'내가 일을 그만둘 수 없는 이유는 뭘까?'


맞다. 내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이면, 그리고 그게 너무 힘들어서 스스로를 갉아먹을 지경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나는 벗어나면 된다. 누군가는 분명 그 자리에 잘 맞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 (만약 적임자가 없다고 해도, 그건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고.)

그리고, 내가 일을 그만둘 수 없는 뚜렷한 이유도 없다. 돈이야... 더 많이 벌면 좋긴 하겠지만, 당장 수입이 준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다. 잠시 쉬면서, 다른 방법을 찾아봐도 괜찮다.


결정을 하고 나니 마음을 짓누르던 무게가 절반쯤은 사라진 것 같았다.

그래. 그냥 당분간 쉬자. 쉬어가자.


지금, 내 삶에 쉼표를 찍을 시간이다.

이전 09화2년 만에 다시, 상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