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을 떠나다.
부모님께 전화를 드려 휴직 소식을 전했다.
"그래, 그동안 많이 힘들어했는데, 잘했다. 마음 편하게 쉬렴."
역시나 따뜻한 엄마의 응원.
그런데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리시고는, 엄마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잘됐다! 다음 주에 아빠랑 둘이서 여행 가기로 했는데, 너도 같이 가면 되겠네! 네가 운전도 해주고~ 너랑 같이 가면 우리도 더 재미있을 것 같은데, 어때?"
갑자기 내린 결정 뒤에, 일사천리로 찾아온 휴식의 시간.
그 막막함 앞에서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여행 일정까지.
마치 누군가가 그려놓은 큰 그림에 편승한 것처럼, 준비 없는 휴식의 시간은 부모님과의 여행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수원에 있는 친정에 들렀다가, 부모님을 모시고 강릉으로 이동했다.
4박 5일간의 여행.
우리는 바다가 보이는 도로를 차로 달리고, 경치 좋은 음식점이나 카페를 찾아다녔다.
햇살이 좋은 날에는 바다와 나란히 놓인 솔밭의 산책길을 천천히 거닐었다.
산책 후에는 그저 멍하니 앉아서 봄바다의 향기를 몸에 담기도 했다.
나뭇가지가 하늘을 가리는 울창한 숲을 찾아서 새소리, 바람 소리를 듣기도 했다.
정해진 일정도, 만날 사람도, 서두를 이유도 없었다.
아빠는 매일 저녁 식사 전에 잠시 낮잠을 주무셨고, 그 시간에는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바닷가를 걸었다.
부모님이 일찍 잠자리에 드시면 나는 음악을 들으며 뜨개질을 했고,
내가 늘어지게 늦잠을 자는 동안에는 부모님이 산책을 나가셨다.
그저 그렇게.
흐르는 시간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세상에서 이렇게 여유로운 시절이 또 있었을까.
바로 며칠 전까지 내가 버텨내던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 기분으로.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라는 느슨한 해방감과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라는 걱정이 함께 들었다.
하지만 괜찮다.
혼자 있을 때, 잊을만하면 찾아오던 불안감이 조금은 잦아들었으니까.
나는 내 상태를 온전히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지금 도움이 필요하다.
나에게는 치유와 회복의 시간이 필요하다.
어쩌면 해답은, '시간'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며 바쁘게 살아왔던 일상에서 벗어나, 이제는 시간을 세는 새로운 방법을 배워야겠다.
마치 계획 없이 떠난 여행처럼.
세상을 온전히 느끼고, 나를 들여다보며.
여전히 안개가 자욱한 숲 속에 갇힌듯한 기분이지만,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잠시 멈춰 서서 숲을 느끼면 된다.
길은... 안개가 걷히면 저절로 보일 테니까.